지난 19일 민주당은 검사장 18명을 항명죄로 경찰에 고발한다고 밝혔다. 사진=연합뉴스
1990년대에 공직사회에서 '골프금지령'이 내려진 적이 많았다. 그것도 한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골프해제령'은 내려진 적인 단 한 차례도 없다. 금지령은 여러번, 해제령은 전혀 없는 모순이 발생한 것. 이유를 물었더니 고위공직자의 답변이 걸작이었다.
"공직사회의 공식 행위는 문서로 진행됩니다. 골프금지령은 한번도 문서로 내려진 적이 없어요. 윗분의 뜻을 받들어 알아서 이뤄진 거지요. 그러니 골프해제령을 내리고 싶어도 내릴 근거가 없는 겁니다."
공직사회에서 출세하려면 '눈치 10단이 되어야 한다'는 그 분의 말씀에 새삼 공직자로 살기가 참 힘들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공직자가 '항명'으로 죽는 경우는 없다. 그렇지만 사회주의 국가는 다르다. 항명은 곧 죽음인데, 사실 항명이 아니라 희생양이 되어 저세상으로 가는 경우가 많다.
2009년 북한은 김정일은 후계자 김정은을 띄우려고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화폐개혁의 부작용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으며 북한은 2달도 못 되어 조치를 되돌려야 했다. 이 과정에서 경제통인 박남기는 최대의 희생양이 되었는데 화폐개혁을 주도하였음은 물론이고 당이 외화사업을 독점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인민군을 적으로 돌렸기 때문에 더욱 가혹한 공격을 당하게 되었다. 2010년 1월 4일 희천발전소 건설장 현지지도 수행과 김책제철연합소 종업원들의 새해 공동사설 관철 궐기모임 참석을 마지막으로 실종되었다.
리제강이 밝힌 바에 따르면 김정일이 2010년 1월 본부당 대논쟁에 박남기를 회부하여 비판하였고 2월 4일 간부들을 소집하여 "박남기는 혁명대오 안에 기어든 간첩으로 앞으로 총리가 돼 자본주의 경제로 끌고 갈 흉심을 품고 있었다"고 그를 역적으로 선포하였다고 한다. 국가안전보위부 특별군사재판소에서 사형이 선고되었고 3월 12일에 계획재정부 부부장 리태일과 함께 총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마디로 윗분은 제대로 하라고 했는데, 박남기가 사실상 항명한 것이다. 그러니 죽여야 한다....이런 식으로 죽어간 것이다.
그런데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에서도 묘한 일이 진행중이다. 지난 11일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대표가 페이스북에 “집단 항명한 검사들은 강력한 조치가 필요하다”란 글을 올린 이후 민주당에서는 ‘대장동 일당’에 대한 검찰의 항소포기를 둘러싼 검사장들의 반발을 ‘집단 항명’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강등, 징계, 처벌하라고 요구하는 목소리가 쏟아졌다.
이와함께 여권에선 검사장 18명이 내부망에 ‘검찰총장 권한대행에게 추가 설명을 요청드린다’는 글을 올린 게 공무원의 집단 행위를 금지한 국가공무원법 위반이라고 주장한다. 여권 법사위원들은 “공무원이 다수로 결집해 직무 기강을 해치거나 정치적 중립성을 침해할 위험을 야기할 경우 명백한 위법이라는 게 대법원의 확립된 판례”라고도 했다.
그러나 이번 검사장들이 올린 글에는 정치적 표현이 전혀 없다. 당시 노만석 검찰총장 직무대행에게 항소를 포기한 구체적 경위와 이유를 설명해 달라고 했을 뿐이다. 이번 판결은 대장동 개발업자들에 대한 것이고, 이재명 대통령과 직접적인 관련도 없다. 그래서 정성호 법무부 장관이 “이 사건이 이 대통령과 무슨 관계가 있나”라고 한 것 아닌가. 여권 법사위원들이 어떤 측면에서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을 무너뜨린 일탈 행위”라고 한 건지 납득하기 어렵다.
또 “공익에 반하는 목적을 위한 행위”인지가 집단 행위의 불법성을 판단하는 한 요소라는 대법 판례도 있다. 항소 포기로 대장동 일당이 얻은 천문학적 불법 이익을 국가가 추징할 길이 막혔는데, 항소를 안 한 이유를 물어보는 게 공익에 어긋나는가.
그런데도 민주당은 검찰 항명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행정부와 입법부를 장악하다 보니 항명의 개념까지 자신들 입맛에 맞게 바꿔버렸다. 구체적인 항명 사실을 밝힐 수는 없지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항명으로 몰아간다. 명령은 없는데 항명만 있는 논리다.
굳이 명령을 내리지는 않아도 염화시중의 미소를 보여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으니 항명한 것이라는 논리다. 이정도면 어거지 중에서도 상어거지다.
김상민, ‘좌파는 무슨 생각으로 사는가’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