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희동이 작고하고 7년이 지난 1972년 아들 고흥찬이 오래된 짐을 정리하던 중 부친의 오래된 자화상 2점을 발견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다.

지금까지 1880년대 초 개화기부터 1910년 한일합병에 이르는 격동의 30년 동안 고영철과 고희동 부자(父子) 이야기를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구성해 보았습니다. 구한말 개화기를 깊이 연구하신 고(故) 이광린 교수님, 서울대 정옥자 명예교수님 등 여러 연구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1915년 이후 우리의 미술사에 대해선 많은 연구가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고희동의 초상화 3점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끝맺고자 합니다.

고희동이 그린 서양화로 현존하는 그림은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유화 2점과 동경예술대학이 소장하고 있는 졸업작품 1점 뿐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초상화 2점은 1972년에 그 존재가 알려졌다. 고희동이 작고하고 7년이 지난 1972년, 아들 고흥찬이 오래된 짐을 정리하던 중 부친의 오래된 자화상 2점을 발견했다. 동양화가 아닌 서양화 유화 작품임을 알아보고 놀란 고흥찬은 이 그림을 들고 현대미술관을 찾아갔더니 놀랍게도 한국에서 발견된 최초의 유화 그림이었다. 고희동 본인도 이 그림이 자택에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타계한 것이다. 현대미술관은 고흥찬에게 약간의 사례를 하고 두 점을 인수해서 복원 작업을 거쳤다. 이 두 점의 유화가 <부채를 든 자화상>과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이다. <부채를 든 자화상>은 모시 적삼을 시원하게 풀어 젖히고 부채로 더위를 식히는 자신의 파격적인 모습을 담았는데, 상단 좌측에 ‘1915 Ko, Hee Dong'이란 서명이 있다.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은 <부채를 든 자화상> 보다 완성도가 떨어지고 서명이 없어서 아마도 보다 앞서서 습작으로 그려 본 것이 아니냐 하는 추측도 있다.

동경미술학교는 학생들에게 졸업에 앞서 자화상을 그리도록 하고 이들이 그린 자화상을 학교에 보관했다. 2차 대전 후 동경미술학교는 동경음악학교와 합쳐서 동경예술대학이 됐으며 개교 이래 졸업생들의 졸업작품인 자화상을 보관해 오고 있다. 고희동이 그린 자화상은 1982년에야 공개되어 알려지게 되는데, 이는 미술기자이며 평론가인 이구열 1932~2020)에 힘입은 것이다. 이구열 선생은 동경예술대학을 직접 방문해서 그전까지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동경미술학교 한국인 졸업생들의 자화상을 직접 보고 국내에 소개했으며 이를 계기로 이 자화상들은 몇 차례 국내에서 전시될 수 있었다.

고희동과 이종우는 전통적 의복을 한 자신의 모습을 그려서 학교에 제출했다. 고희동의 자화상은 정자관(程子冠)을 쓴 선비이자 관료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종우(李鍾禹, 1899~1979)도 한복을 정갈하게 입은 자신의 자화상을 졸업작품으로 제출했다. 고희동의 자화상은 정자관을 쓰고 있기 때문에 졸업작품으로 정해진 규격보다 세로와 가로가 각각 13센티와 8센티 더 크다. 졸업작품의 사이즈는 정해져 있어서 무조건 따라야 했는데, 유독 고희동의 자화상만 가로와 세로가 더 큼에도 학교측은 이를 인정해 주었으니 매우 이례적인 경우였다. 동경미술학교가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고희동의 자화상을 인정하는 과정이 어려웠을 것으로 보기도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이다. 그림의 내용은 자율적이라고 해도 어떻게 규격에서도 예외를 인정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오늘날 동경예술대학 측도 의아해한다고 한다. 상상력을 동원해 본다면, 그림 규격 문제가 나왔을 때 고희동의 스승인 쿠로다 세이키 교수가 결정적으로 OK를 하지 않았을까 한다.

이 같은 고희동의 졸업작품에 대해 이태현(李泰鉉) 화백은 고희동이 “민족자존의 당당한 풍모를 지키면서 역사적, 비극적인 식민지 상황을 부정하려는 강한 의지를 표출”했으며,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전통적 관모(冠帽)의 착용은 강한 민족적 자긍심을 표현하는 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는 작품”을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특히 자화상을 그릴 때는 흔히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참조하기 마련이라서 의복의 좌우가 바뀌는 경우가 많으나 고희동은 겉섭이 오른쪽으로 오도록 하는 한복의 우임(右衽)을 살리기 위해 원래 모습으로 그려서 더욱 더 전통적이고 선비의 풍모가 풍기도록 심혈을 기울였다는 것이다.

고희동에게 있어 한복은 민족적 자긍심이기에 앞서 자신의 정체성과 같았다. 고희동이 나온 사진은 항상 한복 차림이었다. 양복을 입은 모습은 1949년 여름에 견미(遣美)친선사절단의 일원으로 미국을 방문했을 때와 1960년 8월 제2공화국 참의원 개회식에서 최연장 의원으로 사회를 보던 때 뿐이었다. 이승만 대통령 부부와 함께 국전 개막식의 테이프를 끊을 때도 고희동만은 한복 차림이었다. 막내딸인 나의 어머니가 “아버지는 프랑스어를 배우고 일본에서 서양화를 배우셨는데, 왜 항상 한복 차림이세요?”라고 물었더니, “나는 한국 사람이라서 한복을 입는다”고 답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그 한복이라는 게 여자들한테는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모시로 만든 여름철 한복은 풀을 먹여서 다려야 하는데, 전기다리미가 없던 시절이라 숯불 다리미로 다려야 했으니 옷 시중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겨울철 비단 한복은 속옷에 조끼까지 있고 깃은 깨끗하게 빨아서 다리미로 다려야 하니 역시 손이 많이 갈 수밖에 없었다.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한 고희동은 귀국한 후 보성, 중앙, 휘문 등에서 미술 교사로 학생들에게 서양화를 가르쳤다. 그때 가르친 학생 중에는 화가가 되는 도상봉(都相鳳 1902~1977), 이마동(李馬銅 1906~1980), 오지호(吳之湖 1905~1982), 그리고 문화재 수집에 나서는 전형필(全鎣弼 1906~1962)이 있었다. 그리고 수송동 본가가 있는 수송동 일대가 수송국민학교와 경찰 기마대 부지로 수용되자 고희동은 자기 지분을 챙겨서 원서동 16번지로 이사했다. 그곳이 오늘날 북촌의 <고희동 미술관>이다. (원래 가옥은 지금 모습보다 작았고, 널찍한 마당은 고희동의 아들이 가내 수공업으로 사이다를 만들어 팔 때 공장이 있던 가옥의 부지다. 그 사업을 무리하게 늘리다가 부도가 나서 1959년에 그 집을 팔고 고희동은 제기동의 작은 집으로 이사를 해야 했다.)

1920년에 동아일보가 창간되자 고희동은 미술기자를 했다. 고희동은 동아일보 미술기자 자리를 노수현(盧壽鉉 1899~1978)에게 물려 주었다. 그 시절 동아일보 기자는 최고의 직업이었다. 이종우가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자 고희동은 중앙고보 미술교사 자리를 이종우에게 넘겨주었다. 당시 중앙고보 교사는 선망의 직장이었다. 고희동은 선배 서화가들을 모시고 서화협회(書畫協會)를 만들고 그 조직을 이끌었으며, 서화협회전은 총독부가 조선미전(朝鮮美展)을 열게 되는 계기가 됐다. 총독부는 우리가 중앙청이라고 불렀던 석조건물을 짓는 등 도시 건설에 나섰고, 일본인들의 지출로 경성은 소비문화가 발달했다. 지금의 충무로 거리에는 카페가 들어섰고 1930년에는 미스코시 백화점이 문을 열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시작된 공황은 일본, 그리고 조선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즈음 일본에선 위험한 전체주의가 일어섰다. 1936년 2월 26일 일본 육군의 우익 청년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총리대신과 대장(大藏)대신 관저를 습격했다. 이들은 1920년대에 조선총독으로 이른바 문민통치를 이끌고 총리대신을 지낸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를 자택에서 살해했다. 극우파 장교들은 주미 대사관에서 해군 무관을 지낸 사이토를 친미파로 보았다. 일본이 군국주의로 치닫게 되자 조선의 상황은 더 나빠졌다. 1940년 8월 총독부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폐간했다. 암흑기 중에서도 암흑기가 시작된 것이다.

이때부터 8.15 해방까지 고희동은 원서동 자택에서 칩거했다. 고희동과 가까웠던 언론인 김동성(金東成 1890~1969), 소설가 박종화(朴鍾和 1901~1981)도 칩거생활에 들어갔다. 불행하게도 이 기간에 지식인과 문화예술인들의 친일행위가 많이 일어났다. 미술계에선 동양화가 김은호와 김기창이 특히 그러했다. 고희동에게는 자신과 가까웠던 최남선의 ’변절‘이 특히 안타까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8.15 해방이 왔다. 칩거했던 사람들에게 기다리던 시절이 온 것이다. 고희동은 활발한 사회활동을 재개했다. 박종화는 서울신문 사장을 지냈고, 김동성은 초대 공보처장을 지냈다. 하지만 좋은 시절은 잠시였고 6.25라는 미증유(未曾有)의 전란(戰亂)을 겪어야 했다.

(여기서 일단 그칩니다. 저는 저의 외가 고(高)씨를 중심으로 한 시대상을 책으로 엮어 보려고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만, 육교시사에서 5.16까지 거의 한 세기가 되다 보니 쉽지 않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상돈, 전 중앙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