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눈 속에 그 가치가 돋보이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추위가 갑작스럽게 찾아온 것처럼 대기업 임원 인사 역시 올해는 과거보다 빨리 진행되고 있어서 기업들이 내년을 준비하는 시계를 빨리 돌리는 분위기다. 대기업 임원 인사는 언제부턴가 승진잔치보다는 퇴직 송별에 무게가 실리기 시작했다. 다분히 어두워진 경기를 반영한데다, 사람을 대신하는 AI(인공지능) 등으로 인해 인력 수요가 줄어드는 추세가 반영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온 연말이 되기 전인 지난 11월 7일 삼성의 2인자 교체 발표가 본격적인 재벌그룹 임원인사의 신호탄을 쐈다고 할 수 있다. 삼성그룹의 핵심인 삼성전자의 사업지원TF는 지난 7일부로 사업지원실로 조직을 바꾸면서 정현호 부회장을 회장 보좌역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 박학교 사장을 앉혔다. 삼성그룹의 2인자가 정현호 부회장에서 박학교 사장으로 바뀐 것이다.
삼성그룹 2인자 자리는 재계에서 상징성이 크다. 업계 1위이기도 하지만 이병철 회장 시절부터 2인자의 권한과 신임이 엄청났기 때문에 재계의 중심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번에 회장 보좌역으로 물러난 정현호 부회장은 2021년 12월 2인자의 자리에 오른 지 딱 4년 만에 물러나게 된 것으로, 과거 2인자들에 비해 재임 기간이 매우 짧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삼성의 현재 상황이 어렵다는 것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겠다.
삼성은 2인자 자리를 쉽게 바꾸지 않는 전통이 있어왔다. 창업자인 이병철 회장 때는 소병해 부회장 한 사람이 구조조정본부를 이끌었다. 다음으로 이학수 부회장은 이건희 회장 시절 11년 반동안 구조본을 맡았고, 최지성 부회장은 이건희 회장, 이재용 회장을 거치면서 5년간 미래전략실을 맡았다.
삼성전자의 이재용 회장은 2022년 10월에 회장에 취임했으니까 올해로 취임 딱 3년 만에 그룹 2인자를 바꾼 것이다. 현재 그룹의 주력인 삼성전자가 대만의 TSMC와의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지는 등 그룹 전체가 긴장하는 분위기라는 것을 이번 2인자 교체에서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삼성의 긴장 분위기는 업계에 그대로 전달되고 있다. 이번 주에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SK그룹의 인사에도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SK하이닉스 이외의 계열사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이어서 그룹 임원인사에 태풍이 몰아칠 것으로 예고돼 있다. 지난달 30일 사장단 인사에서도 50대 초중반 인사들이 약진하면서 계열사 사장 진용이 예전보다 3~4세 젊어졌는데, 이러한 분위기는 그룹 전반으로 세대교체 바람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업계에 따르면 그룹의 콘트롤타워인 수펙스추구협의회는 임원 50%를 감원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고, 유심 해킹 피해로 막대한 손실을 안긴 SK텔레콤 역시 조직을 통폐합하는 쇄신 인사 속에 임원을 대거 정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만성 적자를 보이고 있는 SK네트웍스도 인사태풍이 예고된 상태다.
현대차그룹은 지난달 29일 그룹 광고 계열사 이노션 대표이사 사장에 1973년생 김정아 부사장이 승진·임명된 것을 변화의 신호탄으로 본다. 1959년생 이용우 전 대표보다 무려 열네 살 젊은 여성 대표의 발탁이다. 현대차그룹은 정 회장 취임 직후를 빼면 지난 5년간 세대교체라 할 만한 대규모 인사가 없었다. 특히 올해 현대차는 미국 시장에서 관세가 기존 0%에서 15%로 오르는 대형 악재를 맞았다. 위기 대응 차원에서, 연말 인사 폭이 클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주력인 LG전자부터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LG 그룹 역시 그룹 전체의 실적 부진에 따른 인사태풍 역시 예고돼있다. 구광모 회장이 젊기 때문에 LG 역시 세대교체란 간판을 달고 임원 물갈이를 대대적으로 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임원들이 대대적으로 짐을 싼 롯데그룹은 올해는 비교적 소폭의 인사에 그칠 것으로 보인다.
연말만 되면 초상집 분위기를 치르는 우리나라 기업들에게 활엽수 방식의 구조조정이 아닌 침엽수 방식의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는 지적을 하고 싶다.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접어드는 지금이 활엽수들이 낙엽을 집중적으로 날리는 계절이다. 기업들의 인사철과 맞물려 임직원 목숨이 낙엽 날리듯 한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활엽수의 낙엽이 떨어지는 이유는 겨울철 추위와 수분 부족에 대비해 나무가 잎을 떨어뜨려 손상을 줄이고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해서이다. 일종의 구조조정을 통한 줄기와 가지 살리기다. 추운 겨울이 되면 잎의 증산작용이 멈추고 동상 같은 피해가 생길 수 있어 나무는 잎자루와 가지 사이에 떨켜를 만들어 수분 손실을 막고 영양분 공급을 차단시키면서 이파리가 자연스럽게 떨어지게 해 줄기와 가지를 추위로부터 보호한다.
반면, 침엽수는 1년 내내 이파리를 조금씩 떨어트려 줄기와 가지가 지탱할 수 있는 환경을 유지하고 있다.
매년 겨울을 앞두고 대대적으로 단풍을 만들고 낙엽을 떨구면서 구조조정을 하면서 우리는 단풍을 즐기지만 정작 그들은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이다.
기업의 경우도 매년 연말 사장단 인사부터 임원 인사에 직원 인사까지 한번에 구조조정을 비롯한 인사를 하면서 요란함을 떨지만 그 효과에 대해서는 과연 맞는 지에 의문이 간다. 한바탕 단풍쇼에 그치는 것은 아닌지…
그보다는 침엽수처럼 조직의 관리와 생존 그리고 경쟁력 유지를 위해 상시적으로 구조조정과 인사를 하는 것은 어떨까?
일시에 동절기 단절 모드에 들어가면서 화려한 쇼를 하는 것보다 빛의 속도로 빠르게 변하는 환경에도 유연하게 대처하고 사업의 연속성도 가지면서 경쟁력을 잃지 않는 상시 구조조정과 상시 승진인사를 한다면 초스피드 시대에 눈 깜짝할 틈의 허점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한때 조직운용론에서 아메바조직에 대한 연구가 한창이었던 적이 있었다. 아메바는 모양이 없이 이분법으로 분할했다가 합쳤다를 자유롭게 한다. 조직을 유연하게 이끌기 위해 아메바처럼 조직을 운영해야 한다면서 조직 혁신의 핵심으로 아메바 조직을 연구했었다. 바로 지금이 이 아메바 성질을 담은 인사 시스템이 필요하지 않을까?
인사는 쇼가 아니라 기업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기업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이 사람인데 한꺼번에 녹물 제거하듯 이벤트성으로 인사를 해서는 사람들 스스로 귀함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단풍의 반짝 화려함 보다는 한 겨울에도 푸르름을 잃지 않는 김정희의 세한도가 값진 이유다.
이기영,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