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초기 서양화에 영향을 미친 일본 구로다 세이키의 대표작. 프랑스 후기 인상파 화풍과 유사하다. 이종우 화백과 도상봉 화백의 화풍도 역시 비슷하다. 프랑스 화풍이 동경미술학교를 거쳐 우리한테 전해 진 것이다.

1909년 봄 대한제국 공무원으로 유학 명령을 받은 고희동은 동경에 도착했다. 대한제국이라고 하나 나라는 이미 멸망한 것과 다름없었고 고희동은 일본 통감부(統監府)의 결정에 따라 관비 유학을 하게 된 것이다. 통감부의 고미야 미호마츠(小宮三保松) 차관은 곧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할 한국에서 일본의 현대적 서양화 교육을 받은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고희동은 을사늑약 후 3년 동안 자신의 미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미술평론가 조은정은 이를 두고 “일본으로의 ‘미술 연구’가 일본인으로 대체된 궁내부 관리들의 판단에 의한 일본에서의 미술 도입을 위한 포석이었든 고희동 개인의 열망이었든 현재 우리는 추정만 가능할 뿐”이라고 평했다. 하지만 일본 관리들의 판단과 고희동의 열망은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두 가지 목적이 절묘하게 결합되어 일본으로의 미술 유학이 성사됐다고 할 수 있다.

고희동은 해방 후는 물론이고 일제시대에도 자신이 미술을 택한 경위에 대해 여러 차례 인터뷰하고 또 기고를 했다. 하지만 고희동은 동경 유학 시절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고희동은 장성한 자식들에게도 유학생활에 대해선 거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고희동이 드물게 유학생활을 언급한 적이 있다. 유학생활을 묻는 기자에게 “나라가 망했는데, 유학을 와서 웬 미술을 공부하느냐”는 말을 들었다고 회고했던 것이다. 고희동은 일본 정부가 유학을 주선해 주었다는 사실을 구태여 밝히고 싶어하지 않았다. 고희동은 자기가 인문사회학을 공부하더라도 고영희의 조카인 자기는 운신의 폭이 크지 않을 것임을 알고 정치와 무관한 미술을 돌파구로 생각했을 것이다.

고희동의 유학생활은 그 시작이 순탄치 않았다. 동경에 도착한 고희동은 동경미술학교의 문을 두드렸으나 학벌 조건이 미달이고 서양화 기초지식이 없다는 이유로 입학을 거부당했다. 동경미술학교는 고희동에게 1년~2년 동안 사설 학원에서 그림을 공부한 후에 다시 찾아오라고 했다고 한다. 이런 어려운 상황을 타개해 준 사람은 문부성 대신을 지내고 추밀원 고문으로 있던 스에마스 겐조(末松謙澄)였는데, 그는 이토 히로부미의 사위이기도 했다. 일본 정계의 거물인 스에마스가 개입해서 고희동은 한 달 동안 동경미술학교의 한 교수한테 개인지도를 받고 4월 11일에 외국 유학생 특별반인 선과(選科)로 입학할 수 있었다.

훗날 그의 처조카 조용만은 동경에 도착한 고희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춘곡은 일찍이 대한제국 궁내부 주사, 궁내부 예식관을 지낸 고등관이었음으로 준(準)국빈 대우를 받아 대우가 융숭하였다.” 조용만이 말한 바는 스에마스 겐조가 학교측에 연락한 후의 사정을 의미했을 것이다. 그러면 일본 정계의 거물인 스에마스가 동경미술학교에 입김을 넣은 이유는 무엇일까? 동경에 와있는 고희경이 부탁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영어와 일어를 유창하게 하는 고희경을 높이 평가했고 그 덕분에 고영희-고희경 부자는 승승장구했다. 따라서 동경에 와 있는 고희경은 일본 정계 인사를 많이 알았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고희동은 아내와 아이들은 한성의 본가에 맡겨 두고 혼자 도쿄에 도착해서 유학생활을 하게 됐다. 고희동이 과연 학비와 생활비로 얼마나 지출했는지는 알 수 없다. 고희동은 대한제국의 관리라는 직위를 갖고 도쿄에 도착했으나 1910년 8월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고 고희동의 관직도 같이 끝나 버렸다.

동경미술학교는 1887년에 설립돼서 1889년 2월에 수업을 시작했다. 보통과는 2년, 전수과는 3년, 도합 5년이 수업연한이었다. 1896년에 동경미술학교에 서양화과가 설치됐고,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구로다 세이키(黑田淸輝 1866~1924)가 서양화과 교수로 부임했다. 가고시마(鹿兒島)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구로다 세이키는 12살 때부터 일본화를 배웠고 동경외국어학교에서 프랑스어를 배운 후 18세 되는 1884년에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프랑스 고등학교에서 프랑스어를 더 배우고 1887년에 법률학교에 입학했다. 그에게는 화가 친구가 몇이 있었는데, 그들을 통해 자신이 그림에 탁월한 소질이 있음을 알게 됐고, 당시 유명한 화가 라파엘 콜랭(Louis-Joseph-Raphael Collin, 1850~1916)이 운영하는 학원에서 서양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구로다 세이키는 당시 새로운 풍조인 외광파(外光派, Pleinarism)를 배웠다. 정규의 미술교육, 즉 아카데미 미술을 수용한 구로다 세이키는 프랑스 살롱 입상이란 화려한 경력을 갖고 1893년에 귀국했으며 1896년에 동경미술학교에 서양화과가 설립되자 교수로 부임했다.

고희동이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했을 때 교장은 나가하라 고우타로(長原孝太郞)였으며 서양화를 가르치는 교수는 여럿이 있었고, 구로다 세이키가 선임 교수이자 학과 책임자였다. 구로다 세이키와 그의 동료 구메 게이치로(久米柱一郞)에 의해 일본에 소개된 인상주의 화풍은 일본화의 특성과 결합해서 일상적인 소재나 밝고 경쾌한 색채를 위주로 외광에 드러난 형태의 묘사에 치중하는 데 관심을 두었다. 이처럼 프랑스에서 유행하던 외광파(外光派) 화풍을 이루어낸 구로다 세이키는 고희동이 동경미술학교에서 공부할 시기에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런 구로다 세이키가 고희동을 특별하게 대우하고 가르쳤으니 고희동은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고 보아야 하겠다.

고희동은 도쿄의 어디에서 기거하면서 학교를 다녔는지에 대해 말한 적이 없다. 여기서 생각해 볼 수 있는 단서는 그의 사촌형인 고희경이 어린 영친왕 이은을 돌보기 위해 도쿄 시내에 있는 큰 저택에 살았다는 사실이다. 고희동의 작은 형 고희중도 고희경을 따라서 도쿄에 와 있었다. 두 사람은 조선총독부의 정식 관료로서 도쿄에서 영친왕 이은을 돌보고 또 감시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고희동이 고희경, 고희중과 함께 영친왕 이은을 돌보기 위해 일본 정부가 마련해 준 동경 아자부(麻布區) 도리이자카(鳥居坂)에 있는 대저택에서 같이 생활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식사, 빨래 등 번잡한 일상사를 스스로 해 본 적이 없었을 고희동은 고희경의 큰 저택에 방을 얻어 머물렀기에 일상사에 신경을 쓰지 않고 미술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희동은 조선 대중이 고영희와 고희경을 어떻게 보는지를 잘 알았고, 그래서 구태여 유학 시절 생활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난 2014년 김란기 선생이 동경예술대학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대학측은 구로다 세이키 교수의 소장품으로, 고희동이 1922년에 동경에 와서 은사인 구로다 세이키에게 보낸 편지를 보여주었다. 그 편지의 발신주소는 ‘아자부(麻布) 고(高) 백작(伯爵) 저(邸)’이었다. 고 백작은 다름 아닌 고희경이었다. 고희경은 1916년에 부친 고영희가 사망하자 부친의 자작(子爵) 작위(爵位)를 계승(습작, 襲爵)했고 1920년에 영친왕을 일본 황족 방자(方子)와 혼인시킨 공로로 승작(陞爵)해서 백작이 되어 있었다. 아마도 고희동은 구로다 세이키가 건강이 나쁘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을 방문해서 스승을 만났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동경에 체류할 때에 고희경의 저택에 머물렀던 것이다. 구로다 세이키는 1924년 7월에 58세로 사망했다.

동경미술학교 재학 중 고희동은 방학이면 현해탄을 건너 부산에 와서 열차편으로 경성에 도착해서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러면서도 안중식과 조석진을 만나 동경에서의 미술 공부에 대해 담소하고 또 그림을 익혔다고 전해 진다. 고희동은 1911년 6월부터 1년 동안 유급을 했다. 당시 학적 기록은 고희동이 낙제를 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경성에 체류하면서 학교에 가지 않았기 때문에 낙제로 처리된 것으로 여겨진다. 고희동이 휴학을 하고 본가에 와 있던 기간 중 부친 고영철이 타계한 것으로 생각된다. 고영철은 관직 은퇴 후 사망해서 사망시점에 관한 공식 기록은 없으나 이 시기에 사망했을 것이다. 고희동에게 아버지 고영철은 단순한 아버지가 아니었다. 고영철은 육교시사(六橋詩社), 영선사(領選使), 그리고 박문국(博文局) 활동으로 이룩한 자신의 인맥을 아들에게 물려 주었으니 심전 안중식(安中植 1861~1919), 소림 조석진(趙錫晋 1853~1920), 그리고 위창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이 그러하다. 고희동은 안중식, 조석진의 문하생인 관재 이도영(李道榮 1884~1933)과 우정을 이어가며 이 인맥으로 서화협회(書畫協會)가 탄생하게 된다.

고희동이 동경에서 공부할 시절에 동경에는 한국 유학생이 70~80명 정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보다 일찍 동경에서 공부한 육당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이 동경에서 고희동을 만났는지는 알 수 없으나 1914년에 최남선이 창간한 잡지 <청춘>의 그 유명한 표지를 고희동이 그렸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건대 두 사람은 그때 이미 교류가 깊었다. 고희동이 동경에서 공부할 때 인촌 김성수(金性洙 1891~1955)와 고하 송진우(宋鎭禹 1890~1945)는 와세다대학과 메이지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고희동이 중앙고보에서 미술을 가르치고 동아일보 미술기자를 지내며 해방 후에 한민당 활동을 하게 되는 관계는 이때 시작됐을 것이다. 김성수와 송진우가 탁지부대신을 지낸 고영희 자작의 조카인 고희동이 미술 유학을 하는 데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상상해 보는 수밖에 없다.

고희동은 1915년 3월 29일에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했다. 경성에서 발간되는 <매일신보>는 3월 11일자 머리기사 ‘서양화가의 효시(嚆矢)’에서 고희동의 동경미술학교 졸업을 크게 보도했다. 고희동으로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자신이 유명해져 있었던 것이다. 조선총독부가 발행하는 <매일신보>의 일본인 경영진은 고희동의 동경미술학교 졸업을 식민정책의 성공사례로 생각했을 것이다. 반면에 기사를 쓴 한국인 기자는 암울한 시절에 조선인도 무엇인가를 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쨌든 간에 이렇게 해서 한국의 '근대 미술 역사’가 시작됐다. (마지막 글로 이어집니다.)

이상돈, 전 중앙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