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이야기]두 얼굴의 이기주의 ...나는 어떤 얼굴일까?

수도시민경제 승인 2024.10.12 07:09 의견 0


인간의 이기주의는 사실 두 방향으로 작용한다. ‘기회의 평등’일 때는 최대한 많이 소유하려는 ‘욕심’(=Output/Input)으로, 그리고 ‘결과의 평등’일 때는 최대한으로 적게 수고하려는 ‘게으름’(=Output/Input)으로다.

하나는 시장경제, 하나는 계획경제이고 하나는 자본주의, 하나는 사회주의...

자기 사업을 하는 이들은 더 큰 돈을 벌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바쁘게 움직이고 때로는 무리하기까지 한다. 노력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고 그 결과는 모두 자신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

급여가 일정하고 정년까지 잘릴 일이 없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노력을 줄인다. 노력을 더 한다고 더 많이 주는 것도 아니고, 노력의 결과가 100% 모두 자신에게 귀속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체제가 위기를 겪는 것은 바로 앞의 ‘욕심’의 과도함 때문이고, 사회주의가 망한 것은 바로 뒤의 ‘게으름’의 지나침 때문이다. 그리고 ‘욕심’과 ‘게으름’은 이기주의의 각자 다른 두 얼굴이다. ‘욕심’과 ‘게으름’은 법 테두리만 벗어나지 않으면 악은 아니다. 혹시 법(또는 규정) 테두리 내인데도 ‘욕심’과 ‘게으름’이 사회적으로(또는 조직적으로) 문제를 일으킨다면 기본적으로 그것은 법(또는 규정)의 적정성 문제이지 ‘욕심’과 ‘게으름’의 문제가 아니다. ‘욕심’과 ‘게으름’은 그냥 인간의 자연스런 속성인 이기주의, 좀 더 객관적으로 표현하자면 합리주의일 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결과의 평등’ 즉, 사회주의와 같은 환경에서만 노력을 줄이지 않는다. ‘기회의 평등’인 노력한 만큼 자기 것으로 돌아오는 자본주의 환경에서도 노력을 줄일 때가 있다. 아니 줄일 때가 있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일반적이다. 사회주의적 환경에서 노력을 줄이는 것은 ‘이성적·합리적 게으름’이다. 그렇지만 이 경우는 ‘비이성적·불합리한 게으름’으로, 이성에 반한다. 타인에게 이익을 양보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그냥 자기 스스로 자기의 이익을 외면해 스스로에게 손해를 끼치는 경우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유 없는 게으름이다.

학생 때 공부를 열심히 하면 자신이 원하는 기회를 좀 더 많이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은 소수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업무능력을 좀 더 탄탄히 갖추면 더 많은 능력 발휘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업무능력 향상에 힘쓰는 직장인 역시 소수다. 꾸준한 운동이 장수의 지름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매일같이 운동하는 실버세대 역시 많지 않다. 공부나 일, 운동에 있어서만 이유 없는 ‘비이성적·불합리한 게으름’이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돈 버는 일, 좀 더 지혜로울 수 있도록 자신의 이성을 갈고 닦는 일 등 인간의 다른 영역에 있어서도 그런 ‘게으름의, 게으름에 의한, 게으름을 위한’ 게으름은 존재한다.

성경에서는 ‘게으른 자는 수저가 있어도 뜨지를 않는다’(잠언19:9)고 말하고, 이슬람의 코란에서는 기부 행위인 자카트에 대해 ‘인색해서도 안 되지만 너무 퍼줘서도 안 된다’(밤 여행의 장-29)라고 경고한다. A. 스미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버나드 맨더빌은 ‘가난을 덜어주는 것은 속 깊은 일이지만 가난을 없애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맹자는 ‘스스로를 해치는 자와는 함께 대화할 수 없고, 스스로를 버리는 자는 함께 일할 수가 없다’(自暴者 不可與有言也 自棄者 不可與有爲也)라고 했다. ‘게으름을 위한 게으름’으로 자기 스스로를 안 좋은 상황으로 몰아가면 주위에서도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다는 이야기다. 뒤집어 말하면,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이야기다.

‘욕심’, 나아가 ‘탐욕’에 대해서는 만 가지 주장들이 다투어 소리를 높이지만, 같은 이기주의의 다른 측면일 뿐인 ‘합리적 게으름’, 더 나아가 ‘불합리한 게으름’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관심을 별로 두지 않기에 더해 보는 말이다.

코라시아, 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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