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담론>의 허구27–현실을 잘 모르는 몽상적 언어로 대한민국을 오염시킨 신영복의 민낯

수도시민경제 승인 2024.07.04 08:48 의견 0

신영복은 <담론>의 마지막 장 제목을 ‘희망의 언어 석과불식’으로 잡았습니다. 언뜻 보면 그의 글은 희망과 미래를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글을 자세히 뜯어 보고 그의 좌파 이념을 대입해 생각하면 한마디로 ‘묘한 한자어를 사용하는 꼰대의 언어, 자기편만 챙기는 내로남불의 언어, 좌파 사회주의의 편파적인 언어, 현실에 무지한 몽상적 언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회주의 소련을 만든 레닌은 ‘거짓말의 달인’이었습니다. 레닌은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 한다. 혁명을 위해서는 거짓말해도 괜찮다.”, “거짓말은 혁명을 위한 가장 강력한 수단이며, 거짓말을 백번 하면 참말이 된다.”, “거짓말을 창조하지 못한 자는 위대한 혁명가가 될 수 없다.”, “거짓말은 클수록 좋다.”, “공산혁명이 성공할 때까지 민주화란 단어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라는 어록을 남겼습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사상의 기초로 삼은 신영복에게서는 ‘거짓말의 달인, 레닌의 냄새’가 솔솔 풍깁니다.

신영복은 <담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석과불식(碩果不食)은 “씨 과실을 먹지 않는다”는 뜻입니다...씨 과실은 새봄의 새싹으로 돋아나고, 다시 자라서 나무가 되고, 이윽고 숲이 되는 장구한 세월을 보여줍니다. 한 알의 외로운 석과가 산야를 덮는 거대한 숲으로 나아가는 그림은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찹니다. 역경을 희망으로 바꾸어 내는 지혜이며 교훈입니다. 이제 이 교훈이 우리에게 지시하는 소임을 하나씩 짚어보기로 하겠습니다.

첫 번째로는 엽락(葉落)입니다. 그림에서 보듯이 잎사귀를 떨어뜨려야 합니다. 잎사귀는 한마디로 환상과 거품입니다. 엽락이란 바로 환상과 거품을 청산하는 것입니다. <논어>의 불혹(不惑)과 같은 뜻입니다. 우리는 <논어>의 사십불혹(四十不惑)을 나이 마흔이 되면 의혹이 없어진다는 뜻으로 읽습니다. 올바른 독법이 못 됩니다. 나이 마흔에 모든 의혹이 다 없어질 만큼 현명한 사람은 없습니다. 이 경우 혹(惑)은 의혹(疑惑)이 아니라 미혹(迷惑)이고 환상(幻想)입니다. 가망 없는 환상을 더 이상 갖지 않는 것이 불혹입니다. 그것이 바로 거품을 청산하는 단호함입니다. 한 개인의 삶도 그렇거든 한 사회의 경우는 더욱 그러합니다. 어려움에 직면할수록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하고 환상과 거품을 청산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신영복은 ‘환상과 거품을 청산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환상은 아마 자본주의가 이룩한 도시의 발전, 거품은 물질적 번영에 따른 정신의 피폐 등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담론>에서 줄곧 자본주의를 공격하는 게 그의 민낯이었습니다. 이러한 신영복의 주장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면 그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따른 좌파 사회주의의 이념과 이상, 고대 중국의 고루한 사상’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감옥에서 20년, 그리고 엉터리 강연으로 20년 이상을 보내면서 인생 자체가 ‘환상과 거품’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진짜 엽락(葉落)을 해야 할 사람은 자신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걸 깨닫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것 같습니다.

신영복은 이어서 다음처럼 말합니다.

“다음이 체로(體露)입니다. 그림에서 보듯이 엽락 후의 나무는 나목(裸木)입니다. 잎사귀가 가려져 있던 뼈대가 훤히 드러납니다. <운문록(雲門錄)>의 체로금풍(體露金風)입니다. 칼바람에 뼈대가 드러납니다. 나무를 지탱하는 구조가 드러납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 바로 구조와 뼈대를 직시하는 일입니다. 환상과 거품으로 가려져 있던 우리의 삶과 우리 사회의 근본적 구조를 직시하는 일입니다. 뼈대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정치적 자주성입니다. 둘째 경제적 자립성입니다. 셋째 문화적 자부심입니다. 개인이든 사회든 국가든 뼈대를 튼튼하게 해야 합니다. 뼈대란 우리를 서 있게 하는 것입니다.”

신영복이 말한 ‘정치적 자주성, 경제적 자립성, 문화적 자부심’은 그 자체로는 흠이 없습니다. 그러나 속내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첫째, 좌파의 ‘정치적 자주성’은 반미(反美) 실현, 그리고 사회주의에 기초한 남북통일을 의미한다고 봐야 합니다. 대한민국 좌파 지식인의 대부로 알려진 리영희와 신영복 등의 사고방식이 그렇습니다. 리영희는 ‘대재난’이던 중국의 문화혁명을 ‘인류의 위대한 실험’인양 추켜세웠고, 문화혁명 속의 중국을 ‘배우며 일하고, 일하며 배우는 나라’로 미화했습니다. 북한을 일컬어 ‘친일파를 깡그리 청소한 이상적인 사회’로 치켜세우고, 대한민국의 역사는 ‘친일세력에 의한 오욕의 역사’로 깎아내렸습니다. 한민족을 죽음의 도가니로 몰아넣을 수 있는 북한의 핵개발은 ‘핵에너지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것’으로 두둔했습니다. 리영희, 그리고 신영복 등의 영향으로 이 땅에 진보좌파, 나아가 친북좌파가 독버섯처럼 자라났습니다. 동유럽의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마오쩌둥의 과오가 인정되면서 리영희는 ‘대표적인 허위지식인’으로 판명났습니다.

허위지식인 리영희는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고 주장했습니다. ‘진보의 날개로는 안정이 없고, 보수의 날개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며 “좌와 우, 진보와 보수의 균형 잡힌 인식으로만 안정과 발전이 가능하다”는 좌우균형론을 그럴듯하게 펼치면서 진보 좌파 이념이 전혀 해롭지 않은 것처럼 포장했습니다.

그렇지만 ‘좌우 날개’ 주장은 근본적으로 잘못됐습니다. 새가 좌우 날개로 날려면 지향하는 목표가 같아야 합니다. 좌우 두 세력이 모두 대한민국의 정체성인 ‘정치적 자유민주주의와 경제적 자유시장주의’에 다 같이 동의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정치적으로 우파는 자유민주주의인데 좌파는 사회주의이고, 경제에서는 우파가 시장경제인데 좌파는 반(反)시장 통제경제입니다.

그러나 이 땅의 좌우는 기능이 다르고 지향점이 다릅니다. 우파가 가고자 하는 방향은 <시장경제>인데 반해, 좌파가 지향하는 목표는 <반시장적>입니다. 지향점이 다른 좌우익(左右翼)은 기본 명제상 양립할 수 없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이 앞으로 쭉쭉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은 미래로 나아가려는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의 날개’가 좌파의 날개에 의해 뒷덜미가 잡혀있기 때문입니다. 신영복의 ‘정지적 자주성’이라는 주장에는 이러한 음험한 속내가 숨겨져 있다고 읽어야 제대로 된 독법(讀法)입니다. (과거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는 ‘나는 민주주의자 겸 사회주의자’라는 양립 불가능한 거짓 주장을 한 적이 있는데, ‘좌우 날개로 난다’가 바로 그와 비슷합니다.)

둘째, 신영복이 말한 ‘경제적 자립성’은 과거 운동권이 얘기한 ‘자급자족 경제’와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1980년 대에 운동권은 ‘양키 고 홈(Yankee Go home), 양키는 물러가라!’고 외쳤습니다. 당시 그들이 보기에 대한민국은 정경유착의 나라, 매판자본과 재벌이 판치는 나라, 미국에 종속된 나라였습니다. ‘미국, 재벌, 그리고 정치권’은 타도 대상이었습니다. 그들이 물러난 대한민국을 ‘우리끼리 사는 땅, 철저한 자립의 땅’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들의 주장은 그 당시 북한의 속내, 즉 한반도에서 미군 철수를 이뤄 적화통일을 하려는 북한의 전술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당시 운동권은 대한민국의 모델로 ‘버마식 자립경제’를 얘기하기도 했습니다. 버마(현 미얀마)가 군부의 집권 하에 글로벌 흐름과 고립된 경제를 운영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걸 본받으려고 한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북한식 통제 경제’를 지향했는데 직접 표현하기가 어려우니 ‘버마식 모델’을 얘기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경제적 자립성’은 신영복이나 좌파 운동권의 생각처럼 ‘외세배격’을 통해 이뤄지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춰야 진정한 자립이 이뤄집니다. 조그마한 섬 대만이 큰소리치는 것, 대한민국이 세계 경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가 바로 세계 최고의 반도체입니다. 반도체 때문에 글로벌 차원에서 큰소리를 칠 수 있는 것입니다. ‘자립경제’를 외치는 북한, 쿠바, 베네수엘라 등이 국제 사회에서 경시되는 것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산업이 없어서입니다. ‘경제적 자립성’은 신영복이나 운동권처럼 입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를 확고히 실천한 결과로 나타나는 ‘경제발전에 따른 경쟁력 확보’에서 나옵니다.

셋째, 신영복은 문화적 자부심을 얘기하는 데 그건 ‘우리 것은 좋은 것이야’라는 폐쇄적 사고방식의 결과로 보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K팝으로 대표되는 ‘K-컬쳐’로 세계적인 문화강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만약 위정척사(衛正斥邪) 운동의 후예들인 신영복이나 좌파 운동권처럼 외국 문화의 배척만 일삼았다면 ‘진정한 문화적 자부심’은 가질 수 없었을 겁니다.

신영복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분본(糞本)입니다. 분(糞)은 거름입니다. 분본이란 뿌리를 거름하는 것입니다. 그림이 보여줍니다. 낙엽이 뿌리를 따뜻하게 덮고 있습니다. 이 경우 중요한 것은 뿌리가 곧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람입니다. 사람은 그 자체가 최고의 가치입니다.”

신영복을 글에서 어떤 글귀가 생각납니까? 저는 ‘내가 가장 존경하는 사상가는 신영복’이라는 문재인 전 대통령의 책 <사람이 먼저다>가 떠오릅니다. 그들은 사람을 강조하는 데 그 속내는 철저하게 ‘내 사람이 먼저다’입니다. 인사부터 시작해서 심지어 국가적인 어젠다 설정까지 모두 ‘내 사람이 먼저다’를 실천한 게 신영복을 존경한다는 문재인 전 대통령과 민주당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신영복의 ‘사람’ 강조에는 이처럼 시커먼 뒷배경이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신영복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사상 투쟁은 모든 개혁의 시작이고 끝입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그것을 실천적으로 담보해 낼 수 있는 주체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신영복의 말에서 그가 ‘양의 탈을 쓴 붉은 사상범’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영복은 대한민국에 참으로 나쁜 씨앗, 대한민국의 기초를 갉아먹는 부패한 종자를 뿌린 인물입니다. 오늘날 갈등과 분열이 난무하는 대한민국, 21세기에 여전히 이념 싸움이 벌어지는 대한민국을 만든 역사의 죄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코라시아, 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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