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베이지북 표지

지난 밤 발표된 미국 연준(연방준비위원회. FED)의 베이지북에 담긴 내용은 다분히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폭탄 정책의 부작용을 지적하고 있어 향후 트럼프 정책의 변화가 올 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미국의 베이지북은 책의 표지색깔이 베이지색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정식 명칭은 ‘현재 경제상황에 대한 진단 요약(Summary of Commentary on Current Economic Conditions)’다.

이 보고서는 미국 경기의 현주소를 가감 없이 판단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서, 미국 12개의 연방은행에 속해있는 최고의 경제학자들이 현재 미국 경제상황에 대해 구체적인 지표가 아닌 개인적인 진단과 의견을 코멘트 해놓은 경제학자들의 일종의 ‘촉’을 모아놓은 것이다.

연준 FOMC 회의록은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회의록인데 반해 베이지북은 FOMC 개최 두 주 전에 만들어지는 보고서로서 FOMC에 중요한 참고자료라는 측면에서 향후 미국 통화정책의 방향을 알 수 있는 자료다.

이번 베이지북을 근거로 판단할 때 2주일 후인 6월 17~18일에 열릴 FOMC에서 금리는 동결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이 베이지북에서 지적한 내용은 크게 5가지로, ①최근 6주일 간 미국의 경제활동 위축, ②미국의 기업과 소비자 모두 관세충격 우려 속에서 지출 축소, ③완만한 속도로 상승하고 있는 물가, ④관세인상이 비용과 물가에 상승압박으로 작용, ⑤관세폭탄이 3개월 이내에 소비자에게 전가 등이다.

특히 ‘관세’라는 표현이 이전 107회에서 122회로 늘어나 트럼프의 관세폭탄으로 인한 경기침체 우려를 지적하고 있다.

앞의 5가지 지적 내용 중 앞의 2가지는 경기침체 조짐을, 뒤의 3가지는 물가불안을 거론한 것으로, 즉 고용부진 등 침체와 물가상승이 동시에 나타날 수 있는 스태그플레이션 우려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그동안은 물가에 대해 ‘상승 우려’라고 표현했지만 이번 보고서에서 처음 “물가가 완만하지만 서서히 상승하고 있다”고 지적해 관세로 인한 물가불안이 현실화하고 있다는 부분을 밝힌 것이 눈에 띈다.

FOMC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베이지북은 1983년 이전까지는 비밀에 붙여졌다. 2주 뒤에 열리는 연준 통화정책 회의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자료이기 때문에 표지 색깔도 빨간색으로 해서 비밀보고서란 의미의 ‘레드북’으로 불렸다.

그러나 1983년 폴 볼커 연준 의장 시절 엄청난 고금리에 반발한 농민들이 트랙터와 소떼를 몰고 워싱턴 연준 근처로 몰려와 대출을 받아 농기구를 샀는데 이자가 원금보다 많아졌다면서 고금리 이유가 뭐냐고 시위를 벌였다.

이 때 폴 볼커는 “금리는 내가 임의로 올린 것이 아니라 레드북에서 금리를 올려야 한다고 쓰여있어서 올린 것”이라고 밝혔는데, 농민들이 그 레드북을 연준만 보지 말고 우리에게도 공개하라고 요구하면서 그때부터 레드북은 베이지북으로 표지색깔을 바꿔 일반에 공개하게 된 것이다.

폴 볼커가 연준 의장을 하던 1970년대 말부터 83년까지 미국은 극심한 스태그플레이션에 시달리고 있었다. 물가상승률은 14.6%를 기록했고, 실업률은 10%를 넘겼고, 1981년과 1982년 연속으로 마이너스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그러나 당시 레드북에 근거해 폴 볼커가 기준금리를 21.5%까지 올리면서 결국 물가는 1983년 2.36%까지 떨어졌고 경제성장률도 플러스로 돌아섰다. 이 후 폴 볼커의 별명은 ‘인플레 파이터’로 붙여졌다.

지난밤 베이지북으로 인해 앞으로 트럼프의 관세정책에 어떤 변화가 올 지에 관심이 모아지게 됐다. 일단 90일 간의 관세유예 및 협의기한이 7월 9일로 한 달 정도 남긴 시점에, 관세로 인한 물가와 경기침체가 함께 올 것이라는 베이지북의 스태그플레이션 경고가 트럼프의 발목을 강하게 잡을 것으로 보인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나라가 그 혜택을 볼 가능성이 생겼다. 그동안 지도자 공백이 오히려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만일 우리나라에 그동안 대통령이 있었다면 끌려가듯 트럼프와 본격적인 협상을 진행했을 것이고, 트럼프의 온갖 요구를 들어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졌지만 지난 6개월 간의 권력공백이 트럼프 공격을 늦추는 결과가 됐고, 마침 이재명 정부가 들어섬과 동시에 미국 스태그플레이션을 경고하는 베이지북이 나와 트럼프의 발목을 잡는 상황이 전개되면서 트럼프의 관세폭탄 정책이 궤도를 수정할 가능성이 생겼기 때문이다.

베이지북 공개와 함께 지난 밤 미국의 중요한 두가지 지표가 발표됐는데, 고용불안과 물가불안을 동시에 보여줘 스태그플레이션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민간고용지표인 ADP(Auto Data Process)고용보고서에 따르면 신규 채용이 4월 4만6000명에서 5월 3만7000명으로 줄어들어 2023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고, 미국 서비스업 PMI(Purchasing Managers' Index) 중에서 구매관리자들이 자재를 사올 때 지불하는 금액 지수인 투입비용지수는 4월 65.1에서 5월 68.7로 높아졌다. 즉 고용은 악화됐고 물가는 오르는 징조를 보였다는 것이다.

다급한 트럼프가 파월에게 두 사람이 만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금리를 내려달라고 또 재촉했지만, 베이지북으로 인해 파월은 요지부동할 수 밖에 없는 입장이다.

상호관세 관련 세계 각국들과의 협상 시한 한 달을 남긴 시점에 베이지북이 ‘관세’로 인한 스태그플레이션 가능성을 본격적으로 지적하고 나서면서, 앞으로 트럼프가 어떤 행보를 보일 지 예의주시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재명 대통령 입장에서는 굳이 자청해서 서둘 필요가 없어 보인다.

시간은 우리 편일 수 있다.

이기영,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