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그룹 최태원 회장.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이 준비중인 자사주 소각 의무화가 시행될 경우 자사주 비중이 높은 SK가 적대적 M&A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가 나오고 있다. 사진=SK
3%룰을 담고 있는 상법개정안이 지난 2일 국회를 통화한 후 국무회의 심의 및 공포만을 남겨둔 상황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자사주 소각의무 내용을 담은 상법개정안 수정안을 준비 중이어서 자사주 비중이 높은 기업들의 새로운 고민이 시작됐다.
자사주 소각의무 조항은 이재명 대통령의 대선 공약 중 주주가치 제고를 위해 강조했던 만큼 더불어민주당이 서둘러 상법개정안에 추가로 얹는 것을 서둘 기세다.
자사주 매각의무를 이 대통령이 강하게 밀어붙이는 배경에는 지난해 경영권 분쟁으로 시장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했던 고려아연 사태를 들 수 있겠다. 고려아연 최윤범 회장은 고려아연을 영풍그룹에서 떼내 경영권을 확보하기 위해 2022년부터 지분확보를 추진해왔다. 그 과정에서 최 회장은 자사주 109만6444주(약 6%)를 한화, LG화학 등의 자사주와 맞교환 하거나 한국투자증권에 매각해 우호지분을 27.31%까지 끌어올렸다.
자사주는 의결권이 없어 주총 표 대결에서 도움이 되지 못하지만, 제3자에게 소유권이 넘어갈 경우 의결권이 되살아나 그룹 오너들이 경영권 방어를 위해 보유하는 주식으로 자주 사용돼왔다.
현재 민주당이 추진하고 있는 자사주 소각 의무화가 법으로 정해질 경우 국내 재벌그룹 중 SK, 롯데 등 자사주 비중이 높은 기업들의 입장이 난처해질 가능성이 높아, 재계에서는 매우 민감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상황이다.
국내 그룹 순위 2위인 SK의 지주사인 ㈜SK의 자사주 비중은 24.80%로서 최태원 회장 우호지분 총 합계인 25.46%와 비슷한 수준이다. 최 회장 지분은 17.90%에 불과하다. 현재 지분 구조로 볼 때 최 회장이 경영권 다툼에서 행사할 수 있는 최대한의 지분은 우호지분과 자사주를 합한 총 50.07%로 과반을 넘는 안정적인 구조다.
그러나 자사주를 모두 소각할 경우에는 최 회장 우호지분 비중이 25.46%에서 33.85%로 늘어나지만, 자사주 도움이 없어져 경영권 방어를 위한 지분은 전체 지분의 3분의 1 수준으로 뚝 떨어지게 된다. 적대적 M&A 대상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SK의 자사주 비중이 높아진 배경에는 2003년부터 2005년까지 외국계 헤지펀드인 소버린과 경영권 분쟁을 치르면서 자사주를 대량으로 취득한 후 우호세력에게 매각해 의결권을 살리는 방법으로 경영권을 지켜낸 바 있어, 이 경험으로 그 후에도 자사주를 꾸준히 사 모았기 때문이다.
자사주를 회사가 사들일 경우 대주주가 돈을 들이지 않고 경영권을 유지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수단으로 종종 사용돼왔기 때문에 상당수 재벌들이 이 방법을 이용해왔지만, 기본적으로 자사주 취지가 주주환원, 임직원 보상 등을 목적으로 쓰이는 것으로 규정 자체가 까다로워 경영권 방어를 위해 극약처방이 아니면 사용해서는 안 되는 성격을 갖고 있다.
SK는 새로운 상법에 자사주 소각 의무조항이 들어가기 전에 자사주를 우호세력에게 매각해야 경영권 안정을 도모할 수 있는 입장이 됐다.
SK 못지않게 자사주 비중이 높은 그룹 지주사는 롯데지주다. 롯데지주는 신동빈 회장 등 우호세력 지분이 45.45%로 비교적 높아 경영권 방어에 큰 걱정이 없어 보이지만, 신동빈 회장의 지분은 13.04%에 불과하고, 호텔롯데 11.10%, 롯데알미늄 5.06%, 롯데물산 5.00% 등으로 구성돼있다. 그러나 자사주 비중도 높아 32.51%에 달한다.
물론 자사주를 모두 소각한 후에도 우호지분 비중이 소각 전 77.96%에서 소각 후 67.34%로 다소 낮아지지만 경영권 방어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신 회장 지분 13.04% 기준으로 보면 45.55%에서 19.30%로 크게 낮아진다.
형인 신동주 전 롯데홀딩스 부회장과의 경영권 다툼이 이어지는 가운데, 어떤 돌발 변수가 경영권 분쟁의 불씨가 될 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그 외 대부분 재벌기업들의 경우 자사주 소각에 따른 경영권 변화 우려는 없어 보인다. 삼성그룹의 지주사 격인 삼성물산은 이재용 회장 등 우호지분이 36.33%인데 반해 자사주는 4.59%로 재벌기업 중에서는 비교적 높은 편이다. 이재용 회장의 지분은 19.93%다.
현대차 그룹의 현대모비스는 기아 등 우호지분이 32.32%인데 반해 자사주는 2.73%에 불과하다. 문제는 정몽구 명예회장이 7.38%, 정의선 회장이 0.33% 등 오너가의 지분이 취약한 상황이고, 그것에 비해서는 자사주 비중이 높은 편이다.
LG그룹의 ㈜LG는 구광모 회장 등 우호지분이 41.72%인데 반해 자사주는 없어, 자사주 소각에 해당되지 않는다.
GS그룹 ㈜GS도 허창수 회장 등 우호지분 비중이 51.80%인데 반해 자사주는 0.02%에 불과해 미미한 형편이다.
한화그룹의 ㈜한화의 경우는 이미 김승연 회장의 3형제 중심으로 지분구조가 재편됐다. 한화에너지 등 우호지분 비중이 55.85%인데, 한화는 3형제가 100% 지분을 가지고 있는 한화에너지가 22.16%, 김 회장이 11.32%, 삼형제가 20.53%를 가지고 있어, 지주사의 우호지분 모두를 김 회장 부자가 직접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자사주 비중은 비교적 높은 7.45%다.
호반그룹과의 경영권 분쟁이 예고돼있는 한진그룹의 경우 지주사인 한진칼은 조원태 회장 등 우호지분이 19.96%이고 호반건설 등 호반그룹 우호지분이 18.46%로 비슷한 수준이다. 현재까지 조원태 회장의 우호세력인 델타항공이 14.09%를 가지고 있고, 한국산업은행이 10.58%를 가지고 있어 향후 경영권을 둘러싼 전쟁이 예고된 상태다. 자사주는 없다.
최근 그룹 회장을 김남호에서 전문경영인인 이수광으로 교체한 DB그룹의 지주사인 DBinc는 김남호 전 회장 등 우호지분이 43.85%로 안정적인 지분을 확보하고 있다. 김남호 전 회장이 16.83%, 김준기 창업회장이 15.91%, 김준기 창업회장의 딸 김주원 부회장이 9.87%를 가지고 있다. 김준기 창업회장의 지분이 아들과 딸 중 어디로 가느냐에 따라 그룹 지배권이 갈린다.
자사주는 5.04%로 소각시킬 경우에도 경영권 위협요소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재명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주가지수 5000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진행하는 주주환원 등 주주가치 제고 프로그램이 하나하나 얼굴을 드러내면서 기업들이 긴장을 하고 있는 상황이 됐다. 그 배경에는 그동안 기업들이 대주주 중심으로만 의사결정을 하고 일반 주주들의 이해관계는 등한시 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편법을 동원해 기업 쪼개기, 뗐다 붙이기, 느닷없는 대규모 유상증자 등으로 투자자들을 우롱했던 기업들이 당장은 어려움을 겪겠지만, 미국이나 유럽 등 선진 시장에서 적용하고 있는 글로벌스탠다드인만큼 하나하나 적응해나가면서 시장을 건전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이기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