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전 국민에게 우리돈 300만원을 매달 보장해주는 '기본소득안'에 대해 스위스 국민들 77%가 반대해 부결됐다. 사진=YTN 뉴스 캡쳐
율리아스 카이사르가 쓴 <갈리아원정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봄바람이 불던 기원전 58년, 카이사르에게 급보가 날아들었다. 스위스 지역에 살던 헬베티족 30만 명이 족히 갈리아 서부로 대이주를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이 로마 속주인 갈리아 나르보넨시스를 지나간다면? "절대 허용할 수 없다." 카이사르의 눈이 번뜩였다. 레만 호수 근처에서 헬베티족과 마주한 카이사르는 뛰어난 전략으로 이들을 격파했다."
갈리아원정기에 나오는 고대 켈트족 헬베티족은 기원전 2세기경 현재 스위스 북부에 정착했다. 헬베티족에서 ‘헬베티아’라는 이름이 나오며, 스위스를 가리키는 공식 명칭인 'Confoederatio Helvetica'의 원형이다.
헬베티족은 산악지형인 스위스에서 오랜 기간 참으로 힘들게 살았다. 먹을 게 귀했기에 남자들은 각국의 용병으로 나가 돈을 벌었으며, 그 돈으로 가족을 먹여 살렸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가족에 대한 책임, 자기 사회에 대한 책임'이었다. 나태와 무책임은 죄악으로 보았다. 종교개혁가 캘빈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활동했던 것도 스위스인의 청빈과 근검절약 성품이 그들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16세기 독일의 신성로마제국이 바티칸 교황청을 침공했을 때 교황을 지키던 병사 대부분이 달아났지만 스위스 근위대는 남아서 침략군과 맞서다가 죽었다. 그 후 지금까지 교황청은 오직 스위스인만 교황 근위병으로 선발한다. 프랑스혁명 때도 당시 루이 16세의 경호를 맡았던 스위스 용병 786명이 왕궁을 지키다 목숨을 잃었다. 왕이 탈출하라고 했지만 스위스 용병들은 “경호 계약을 저버리면 우리 후손들 일자리가 사라진다”며 거절했다. 스위스 루체른에 선 ‘빈사(瀕死)의 사자상’이 그때의 희생을 기리고 있다.
스위스 용병을 라이슬로이퍼(Reisläufer)라 한다. ‘전쟁터에 나가는 사람들’이란 뜻이지만 그 속엔 ‘당장의 이득보다 장래의 신용을 소중히 여기는 스위스인’이란 정체성이 담겨 있다.
지도 위에서 스위스는 작다. 인구 900만 명, 면적은 남한의 절반도 안 된다. 하지만 숫자로 본 스위스는 거인이다. 1인당 GDP는 10만 달러(약 1억 4,000만 원)를 넘나든다. 미국의 1.3배, 한국의 3배다. 더 놀라운 건 방어력이다.
전 세계가 인플레이션 공포에 떨 때, 스위스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대를 유지. 실업률은 2% 초반, 사실상 완전 고용 상태다. 게다가 14년 연속 세계 혁신 지수 1위를 놓치지 않는 강소국.
자원 한 톨 나지 않는 내륙 산악 국가가 어떻게 이런 경제 요새를 구축했을까. 노바티스, 로슈, 네슬레 같은 초일류 기업들 덕분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힘은 국민들의 머릿속에 있는 '계산기'다.
그들은 나토(NATO)에 가입하지 않는다. 내 나라 안보를 남에게 '외주' 줄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대신 알프스 산맥 전체를 거대한 지하 벙커로 개조하고 전 국민이 총을 든다.
"우리를 침공할 수는 있다. 하지만 너희도 팔다리 하나는 내놓아야 할 것이다."
이 서늘한 '고슴도치 전략'이 그들의 평화를 지탱하는 기둥이고 이런 자세가 바로 1, 2차 세계대전도 피해 가게 만든 원동력이다.
이 '공짜 안보는 없다'는 처절한 독립심은, 경제 영역으로 넘어오면 '공짜 점심은 없다'는 냉철한 주주(Shareholder) 의식으로 치환된다. 스위스 국민은 안보를 동맹에 구걸하지 않듯, 경제적 풍요를 정부에 구걸하지 않는다.
스위스에는 국민 10만 명이 청원하면 전 국민투표를 강행하는 특이한 법이 존재하고, 그들 정치에도 물론 진보당이 존재한다.
지난 2012년, 스위스에선 '유급 휴가 연장' 안건이 국민투표에 부쳐졌다. 법정 휴가를 4주에서 6주로 늘리자는 법안이었다. 한국이었다면 "저녁이 있는 삶", 같은 감성언어와 "노동권 보장"을 외치며 90% 정도의 찬성으로 통과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스위스는 66% 반대 부결이었다. 이유는 심플했다. "휴가를 늘리면 인건비가 오르고, 기업 경쟁력이 떨어지면, 결국 내 일자리가 사라진다."
2016년엔 더 파격적인 '기본소득' 안건이 올라왔다. 전 국민에게 조건 없이 월 2,500프랑, 당시 환율로 약 300만 원을 주자고 했다.
우리는 25만 원만 뿌려도 "민생 회복"이라며 생색을 내는데, 스위스 국민은 매달 300만 원을 준다는데도 무려 77%가 걷어찼다.
"재원은 세금 폭탄으로 돌아올 것이고, 일하지 않는 자에게 돈을 주면 나라는 빈 껍데기가 된다"는 이유였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공짜 치즈는 쥐덫 위에만 있다'는 사실을.
압권은 올해 치른 투표다. 청년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한 '초부유층 상속세 50% 부과' 안건이 올라왔다. 한국이었다면 '조세 정의'를 외치며 죽창가가 울려 퍼졌을 것이다. 결과는 어땠을까.
78% 반대로 부결됐다. 스위스 국민들은 "부자를 털면 그 돈이 우리에게 오는 게 아니라, 자본과 기업이 세금 싼 나라로 탈출해서 스위스 경제가 망가진다"는 경제학 원론을 꿰뚫고 있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지 않겠다는 집단 지성이었다.
공짜는 양잿물도 마신다는 우리 속담이 부끄럽게 다가오고, 그 공짜마인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대한민국 정치가 참으로 나라를 망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김상민, ‘좌파는 무슨 생각으로 사는가’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