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 게리가 설계한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페인 빌바오의 구겐하임 박물관. 사진=구겐하임 박물관 홈피
지난주에 타계한 건축가 프랭크 게리(Frank O. Gehry 1929~2025)가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타게 된 계기는 스페인 빌바오에 있는 구겐하임 박물관이었다. 상상을 뛰어넘는 곡선미를 살려서 티타늄과 유리를 주로 사용한 이 건축물은 1997년 연말에 준공되고 많은 찬사를 받았다. 어느 기자가 게리에게 어디에서 그 같은 파격적인 곡선에 대한 영감(inspiration)을 받았냐고 물어보았더니 게리는 바다에서 잡은 물고기를 양동이에 넣었더니 물고기들이 퍼덕퍼덕 움직여서 그로부터 영감을 얻었다고 답했다. 말하자면, 재수없이 낚시에 잡힌 큰 물고기들이 앙동이 속에서 마지막으로 몸부림치는 모습이 바로 구겐하임 박물관 형상인 셈이다.
구겐하임 박물관은 빌바오가 위치한 바스크 지방정부가 구겐하임 재단에 제안하고 건축비를 감당했다. 구겐하임 재단은 프랭크 게리를 설계자로 선정하고 완공 후 운영은 재단이 책임지기로 했다. 바스크 지역은 프랑코 총통 시절에 바스크 분리독립을 원하는 지하조직이 테러를 자행해서 이미지가 좋지 않았고, 중공업 지대이던 빌바오는 탈(脫)산업화로 경제도 좋지 않았다.
바스크 분리주의자들은 프랑코가 후계자로 지명한 후계자 블랑코 총리를 폭탄으로 날려버려서 결국 연로한 프랑코가 물러나고 스페인은 민주화의 길을 갔다. 빌바오에서 멀지 않은 곳에 게르니카가 있다. 스페인 내란 때 독일공군이 무차별 폭격해서 많은 민간인이 사망한 작은 도시로, 피카소의 유명한 그림의 소재가 됐다. 그래서 바스크 사람들은 프랑코 체제에 저항했다.
2010년 가을에 마지막 연구학기를 보낼 때 스페인을 여행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빌바오를 가보았다. 구겐하임 박물관은 건물 외관에 비해 내부 공간은 크지 않았고 전시 작품도 크게 볼 것이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관람객들도 작품보다는 건물을 구경하고 사진 찍기에 분주했다. 사실 프랭크 게리, 그리고 동대문 DDP를 설계한 자하 하디드(Zaha Hadid 1950~2016)의 건축물은 실용적 측면에서는 조금은 의심스럽기도 하다.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이명박 정부 시절에 4대강 사업을 추진하면서 구겐하임 박물관을 사례로 들었다. 4대강에 보를 건설해서 물이 풍부해지면 강변에 구겐하임 박물관 같은 건물이 들어서서 지역경제가 살아난다고 기가 막힌 궤변을 내세웠다. 실제로 4대강 사업본부에서 발행한 홍보잡지에 구겐하임 박물관을 크게 소개하기도 했다. 당시 신문에는 이명박의 4대강 사업을 빌바오에 비유해서 찬사를 보낸 칼럼이 나오기도 했다. (한국 신문의 수준이다.) 그런데, 보를 세워서 물을 잠겨 놓은 낙동강에선 녹조가 창궐해서 악취가 나고 있으며, 구겐하임 박물관은커녕 보 근처에 있던 편의점마저 오래전에 문을 닫아버렸다.
프랑크 게리가 구겐하임 박물관 같은 비싼 건물만 설계한 것도 아니다. 게리는 캐나다 태생인데 LA로 이주해서 남가주(USC)대학 건축과를 나오고 샌타모니카에서 살았다. 샌타모니카 대로변에는 ‘샌타모니카 플레이스(Santa Monica Place)’라는 쇼핑센터가 있다. 1980년에 문을 연 이 쇼핑센터의 설계자가 프랭크 게리다. 게리는 이 쇼핑센터를 설계하기 전까지는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1996년 가을학기에 LA에 있을 때 샌타모니카를 가는 길에 잠시 들러본 적이 있는데, 그렇게 특별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으나 게리가 설계한 건물이라서 잠시 들러보았다. 게리가 설계한 쇼핑센터는 2010년에 철거하고 새 건물을 지었는데, 게리의 건축물을 헐어야 하는가 하는 논의가 있었다.
프랭크 게리가 LA에 남긴 비교적 초기 작품이 내가 교환교수로 한 학기 있었던 로욜라 로스쿨이다. 로욜라 로스쿨은 1920년대에 4년제 대학으로 모습을 갖춘 로욜라 대학의 야간 로스쿨로 시작했는데, 본 캠퍼스가 태평양쪽으로 이사한 후에도 시내에서 가까운 자리에 머물렀다. 1930년대에 정규 로스쿨로 인가를 받았고, 1964년에 현재 위치로 이사해서 한 개의 건물로 로스쿨을 운영했다. LA의 부동산 개발업자가 거액을 기증해서 캠퍼스 건물을 추가로 짓게 됐는데, 프랭크 게리가 설계를 해서 1980년부터 공사에 들어갔다. 당시는 게리가 유명해지기 전이고 대학은 수업을 해야 하니까 오랜 시간을 두고 건물을 추가로 들이고 리모델링해서 1994~5년에 공사는 일단락됐다.
내가 교환교수로 있었던 때가 1996년 가을이니까 로스쿨의 ‘게리화(化)’가 완성된 직후였다. 1990년대 들어서 게리가 유명해져서, 교수들도 게리가 자기네 학교를 위해 거의 무료봉사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면서 좋아했다. 가운데 정원인 플라자 한복판에 오크 트리가 있고 로마의 유적을 연상하는 기둥이 여러 곳에 있으며 대강의실을 독립건물로 가운데 두는 등 통상적인 대학 건물과는 너무 달랐다. 건물에 노란색을 과감하게 사용하고 외부계단도 자체가 예술이었다. UCLA 로스쿨 졸업생은 전국 각지로 진출하는 데 비해 로욜라 로스쿨 졸업생은 주로 LA에서 일하기 때문에 LA 법조계에선 동문들이 탄탄한 편이다. 게리 덕분에 로욜라 로스쿨 캠퍼스는 유명하지만 그 위치는 다운타운 도심과 코리아타운 사이에 있어서 주변 치안이 좋지 않다. 그래서 사면으로 막아 놓았고 출입구는 주차장 건물을 통해야만 한다. 주변에는 상가, 식당, 카페 등 아무것도 없고 걸어 다녀서는 안 되었다. 따라서 커피, 점심, 간식 등은 플라자에서 여는 간이매점을 이용해야만 했다. 지하철로 등교하는 학생들을 위해서 다운타운 지하철 역까지 학교가 무료로 셔틀버스를 운영했다. 범죄가 많은 미국 대도시의 어두운 단면이다.
이상돈, 전 중앙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