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예술대학의 구로다 세이키 기념관. 동경미술학교 초창기 건물로, 일본에 서양화를 도입한 쿠로다 세이키 교수를 기념하기 위한 박물관이다.

고희동은 자식들과 지인들한테 을사조약이 강제로 맺어지던 날 밤의 ‘궁중무사’(宮中無事) 에피소드를 말하곤 했다. 고희동의 처조카인 조용만(趙容萬)은 1988년에 나온 자신의 책 <30년대의 문화예술인들>에 1905년 11월 17일 자정을 넘겨 18일 새벽까지 고희동의 행적에 관해서 자기가 들은 바를 기록으로 남겼다. (조용만, 30년대의 문화예술인들 (1988, 범양사), 56~57쪽)

11월 17일 밤 고희동은 정리해야 할 문서가 많아서 밤을 새우다시피 하고 새벽이 되어서야 퇴근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날 밤 자정을 넘긴 18일 오전 1시 수옥헌(漱玉軒, 지금은 중명전)에서 외부대신 박제순이 참정대신 한규설을 대신해서 대한제국이 일본제국의 보호국이 된다는 조약에 관인을 찍었고,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권중현도 조약문에 서명했다. 그날 밤에 이런 소동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한 고희동은 침통한 기분으로 대안문(大安門, 지금은 대한문)으로 향하던 중 내직실(內直室)을 지나게 되어서 안으로 들어가 보았더니 숙직 직원들은 모두 잠들어 있었고 ‘궁중일기’에는 늘 쓰는대로 ‘궁중무사(宮中無事)’라고 쓰여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공사, 하세가와(長谷川) 조선주재군 사령관, 그리고 일본 헌병 대위가 이끄는 부대가 덕수궁을 휘젓고 다녀서 대한제국의 황궁은 공포 분위기였음에도 일직(日直)주사는 ‘궁중무사’라고 일지에 기록하고 잠들었다는 것이다.

집에 도착한 고희동은 며칠 동안 궁내부 출근을 하지 않고 집에 들어박혀 있었다. 궁내부에서 일하던 외국인 자문관들로부터 자기들은 곧 본국으로 돌아가고 고희동처럼 외국어 통·번역을 하는 관리들은 할 일이 없어질 것이라는 이야기를 귀에 박히도록 들은 고희동은 이런 현실을 무겁게 생각했다. 얼마 후 일본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되고 외국 공사관들은 하나씩 본국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고희동은 금방 사표를 내지는 않았고 궁내부에 계속 나왔다.

1907년 7월 24일 ‘정미(丁未) 7조약’이라고 불리는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이 체결됐다. 고희동의 중부(仲父, 둘째 큰아버지) 고영희(高永喜 1849~1916)는 탁지부대신으로 참정대신 이완용과 함께 조약에 서명했다. 1907년 12월 5일, 고희경은 황태자로 책봉되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는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을 동궁대부(東宮大夫)로서 배종(陪從)했고 고희동의 작은 형인 고희중은 고희경을 따라갔다. 고희경의 동생인 고희성은 고희경이 남긴 자리를 이어서 궁내부 예식관이 되었다. 고희경은 동경 한복판에 큰 저택을 마련해서 영친왕을 관리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1908년 3월 4일, 고희동은 장례원(掌禮院) 예식관(禮式官)이 되었다. 장례원은 궁중 의례를 관장하면서 도화(圖畵) 업무도 관리하는 기관이었으나 업무가 축소되어 많은 인원이 장례원을 떠난 상태였고, 고희동도 명예관으로 임명을 받았다. 즉, 자리는 있되 급여가 나오지 않은 직위가 된 것이다. 고희동은 낮에는 관청을 나가고 저녁에는 1907년에 문을 연 장훈학교(長薰學校) 야학 속성과에서 일본어를 배웠다. 당시 대표적인 서화가였던 조석진은 1906년 8월에 영춘(永春) 군수직에서 해임됐으며, 안중식은 1907년 7월에 양천(陽川) 군수직에서 해임됐다. 두 사람은 한성으로 올라와서 화가로 돌아왔으며, 고희동은 두 사람으로부터 서화를 배웠다.

고희동은 자신이 유명해진 1950년대에 언론에 이런 이야기를 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보호국으로 만든 지 2년이 지나 국가의 체모는 말할 수 없이 되었고 무엇이고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게 되면서 이것저것 심중에 있는 것을 다 청산하여 버리고 그림의 세계와 주국(酒國)으로 갈 길을 정하려 심전 안중식과 소림 조석진 두 분 선생의 문하에 나갔”고(신천지, 1954년 2월호), “나라 없는 민족의 비애가 국민들의 가슴 속에 사무치기 시작해서 죽을 수도 살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러 비분강개하다가 그때 문득 생각 키우는 것은 그림이나 그리고 술이나 먹고 살자는 것”이었다.(서울신문, 1958년 12월 3일) 그러면 도무지 어떤 계기로 고희동이 서양화에 관심을 가졌나 하는 문제가 있다.

고희동은 1941년에 ‘조광(朝光)’ 잡지와의 대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불란서 사람 ‘레미옹’이란 사람이었지요.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는 사람인데 뎃상을 주장하는 걸 봤는데 인물 같은 것을 목탄화(木炭畵)로 쓱쓱 그려낸 걸 처음 보니까 여간 완연한 게 아니야. 그래 그 때부터 그와 상종을 하다가 결국은 그에게서 자극을 받아가지고 동경으로 간게지요.” 고희동은 프랑스어 교사인 에밀 마르텔의 초상화를 레오포드 레미옹(Leopold Remion)이 그리는 것을 보고 서양화라는 그림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됐다는 이야기이다. 세브르 지방 출신으로 프랑스의 도자기 회사의 기술자였던 레미옹은 조선 궁정의 초청으로 조선에 공예학교를 세우기 위해 1900년에 조선에 도착했다. 하지만 대한제국의 국력이 급속히 쇠퇴함에 따라 공예학교 설립은 불가능했다.

레미옹이 조선에 오기 전인 1899년 미국인 화가 휴버트 보스(Hubert Vos)가 궁중의 초청으로 조선에 입국해서 고종과 황태자, 그리고 몇몇 고관대작의 초상화를 그린 바 있으나 레미옹은 장기간 체류했음에도 조선에 그림을 남기지 않았다. 레미옹에 대해선 프랑스에도 별다른 기록을 찾을 수 없고 그가 그렸다는 그림의 사진이 남아 있을 뿐이다. 레미옹은 자신의 특기인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는 일을 했을 것 같으며 한성법어학교와 프랑스 공사관을 드나들면서 그림을 그렸던 것 같다. 여하튼 레미옹이 조선에 체류하면서 에밀 마르텔의 초상을 그리는 모습을 고희동이 목격한 덕분에 레미옹은 한국 미술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남게 됐다.

조용만은 고희동이 레미옹의 그림에 영향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레미옹이 고희동에게 미술 유학을 떠나도록 적극적으로 권했다는 증언을 남겼다. 을사늑약이 맺어질 즈음에 레미옹은 이토 히로부미가 한성에 오기만 하면 대한제국은 끝장이 난다면서 “무슈 고, 우리 파리로 갑시다. 유화를 배우려면 아무래도 파리로 가야 해요”라고 고희동을 충동했다는 것이다. 을사늑약이 맺어진 후 궁내부 광학국과 박문과가 폐지돼서 할 일이 없어진 레미옹은 출국을 앞두고 고희동에게 미술을 공부하러 파리로 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레미옹은 작별하는 파티에서 고희동을 붙들고 그림 공부를 하러 파리로 오라고 간곡하게 부탁하였다”는 것이다. 이처럼 레미옹과 고희동이 가까웠다면, 이경성과 윤범모가 추정하듯이 고희동이 1905년에 프랑스 공사관에서 열린 전시회에 습작이나마 서양화를 그려서 출품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프랑스어를 잘하는 고희동은 물론 파리로 가고 싶었다. 고희동은 파리로 돌아간 레미옹의 주소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 유학을 위한 자금을 구할 방법이 없었다. 조용만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고희동은 “여러 가지를 생각한 결과 일본 동경이 나을 것 같아서 동경으로 가기로 결정하였다. 그 때 동경에는 사촌형 되는 고희경이 왕태자 전하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 1909년 2월 15일 고희동은 미술 연구를 위해 일본국 동경으로 출장을 명하는 궁내부 칙명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고희동은 동경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 지금은 동경예술대학)로 유학을 가게 된 것이다. 고희동의 일본 유학을 위해 힘써 준 사람은 궁내부 일본인 차관으로 미술 애호가이던 고미야 미호마츠(小宮三保松)이었다. 대한제국은 아직 망하지 않아서 고희동은 대한제국의 관비 유학생이 됐지만 사실은 일본 당국이 후원한 유학이었다.

동경미술학교 기록에 의하면 조선인 관비 유학생은 고희동만이 아니었다. 고희동에 이어서 입학한 김관호(金觀鎬 1890~1959)와 김찬영(金瓚永 1889~1973)도 관비유학으로 기록이 되어 있다. 두 사람은 모두 평양 부호의 아들이어서 사비유학을 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두 사람도 관비유학이었다고 한다. 그 후에 입학한 이종우(李鍾禹 1899~1979)와 도상봉(都相鳳 1902~1977)은 사비유학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종우는 황해도 부호의 아들이고, 도상봉은 서울 부잣집 아들이었다. 그래서, 미술평론가이며 현대미술관 초대 관장을 지낸 이경성은 나라를 잃어버려 할 일이 없어진 퇴직관료와 망국으로 앞날이 막힌 부잣집 자제들이 자신의 활로를 동경에서의 서양화 공부에서 찾아서 한국 근대미술을 열었다고 평가했다. 또한 이렇게 해서 한국의 서양화단은 동경미술학교를 다닌 ‘아카데미 미술가’들이 열게 됐다. (계속)

이상돈, 전 중앙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