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늑약에 이르는 조선(또는 자칭 ‘대한제국’)의 망국(亡國) 과정에서 마지막으로 외교가 의미를 가졌던 시기는 러일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이다. 러일전쟁에 앞서 고종은 프랑스어는 물론이고 영어와 러시아어를 했던 현상건(玄尙健 1875~1926)을 밀사로 파견해서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 2세에게 친서를 전달토록 했다. 현상건은 상 페테르스부르그에 도착해서 주러 공사 이범진(李範晋 1852~1910)과 함께 러시아 조정에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는데 성공했다고 전해진다. 종래에는 고종이 러시아에 조선의 중립화를 부탁해서 일본의 지배를 막아보려고 했다고 알려졌으나 최근에 발굴된 자료에 의하면 러일 전쟁이 일어나면 아예 러시아 편을 들겠다면서 러시아의 도움을 청했다고 한다.
현상건은 1903년 8월 20일 제물포에서 러시아 선박 편으로 유럽으로 향했고, 이듬해 1904년 1월 11일 귀국했다. 하지만 고종의 행태를 보면 고종의 관심사는 나라와 백성이 아니라 자신과 왕족의 안위(安危)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러시아에 대한 구애(求愛)는 실패로 돌아갔다. 정확히 말한다면, 애당초 성공할 수가 없었다. 1904년 2월 4일, 일본 해군은 여순항의 러시아 기지(포트 아서)를 공격해서 러일전쟁의 전단(戰端)을 열었다. 일본은 만주에서 러시아 군대를 공격하고 조선에 군대를 상륙시켰다. 러시아 공사와 공사관원들은 철수했으며, 친러파 정객 이용익(李容翊 1854~1907)은 일본군에 체포되어 일본으로 압송되었다. 이때 현상건은 이학균과 함께 인천항에 정박 중인 미국 선박 편으로 상해로 탈출했다.
고종의 밀사로 출발하기 전까지 현상건과 고희경은 정동의 외교가에서 미국, 프랑스, 영국, 러시아 외교관들과 접촉이 많았다. 미국 공사관이 본국으로 보낸 보고서에 두 사람의 이름이 나오는데, 특히 고희경은 자신이 외교가에서 얻은 정보를 일본 공사관에 흘리고 있다고 보고한 내용도 있다. 그 시절 현상건과 고희경은 외국어에 능통한 젊고 유능한 관료였으나 나라가 망가져서 한 사람은 망명의 길을 가야 했고 또 한 사람은 일본의 지배를 대세로 받아드렸으니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상건은 상해 임시정부 수립 당시에도 활동을 하였으나 기본적으로 근왕주의(勤王主義) 성향이 있어서 공화정을 추구하는 다른 임정 인사들과는 같이 하기 어려웠다. 그는 1926년에 상해에서 사망했다. (현상건에 대해선 이화여대 백옥경 교수가 2015년에 발표한 논문이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 현상건은 한성법어학교에서 프랑스어를 배웠고, 대한제국에서의 그의 마지막 직책은 궁내부 광학국장 겸 번역과장이었다. 당시 프랑스와 벨기에가 조선의 광산 사업에 큰 관심을 갖고 있어서 궁내부 광학국(礦學局)에는 프랑스어가 필요했다. 현상건 보다 열한 살 아래인 그의 동서(同壻) 고희동(高羲東 1886~1965)도 한성법어학교에서 공부하고 17세 나이에 광학국에서 관료생활을 처음 시작했다.
현상건이 상해로 망명한 후 고국에 남겨진 가족들은 어려움을 겪었다. 1960년대 말에 공화당 국회의원을 지낸 현정주(玄正柱 1899~1970)가 현상건의 아들이고, 현정주의 아들이 서울공대 현병구 명예교수다. 현병구 교수는 우리나라 광산공학(Mining Engineering)의 선구자라고 할 만한데, 조부인 현상건의 마지막 직책이 궁내부 광학국장 겸 번역과장이었음을 생각하면 참으로 신기한 인연이라고 생각된다. 현정주에게는 이화여대를 나온 딸이 있었는데, 그녀는 한국전쟁 중 취재차 한국에 온 프랑스 기자를 따라서 파리로 건너가서 결혼하고 가정을 꾸렸다. 그녀의 남편은 막스 올리비에 라깡(Max Olivier-LaCamp 1914~1983)인데, 프랑스 최대 일간지 르피가로(Le Figaro)에서 편집장/주필을 지냈다. 1970년에 라깡 부부가 서울을 방문했는데, 우리 신문에 그에 관한 기사와 인터뷰가 나온 적이 있다. 그때 그의 부인, 즉 현상건의 손녀가 인척인 나의 어머니를 만나러 우리 집을 방문해서 나도 본 적이 있는데, 유럽풍(風)의 우아한 여성이었다.
라깡 부부는 딸을 두었는데, 유명한 소설가이자 영화배우이고 성우(聲優)인 이사벨르 라깡(Ysabelle LaCamp 1954~2023)이다. 런던에 있는 대학에서 동양학을 전공한 그녀는 장 폴 벨몽드, 알랑 드롱 등이 주연한 영화와 TV 드라마에 자주 출연했고 책을 20권 출간하는 등 정열적인 삶을 살았으나 재작년에 암으로 사망했다. 아버지가 프랑스의 저명한 언론인이기도 하지만 외국어에 탁월한 소질이 있었던 현상건이 외증조부임을 생각하면 새삼 ‘핏줄(또는 DNA)’을 생각하게 된다.
이상돈, 전 중앙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