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0일 서울 삼성동 깐부치킨 매장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정의선 현대차 회장,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치맥 회동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번 APEC(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은 각국 정상들 간의 정상회담이 주요 뉴스였지만, 그에 못지 않은 화제를 뿌린 것은 시가총액 5조달러로 세계에서 가장 큰 시가총액을 자랑하고 있는 미국 AI반도체 독점기업인 엔비디아 젠슨 황의 등장이다.
젠슨 황 CEO는 15년 만에 한국을 방문했는데, 지난 2010년 한국 방문 때는 당시 게임 강국인 한국에 자신의 그래픽카드(GPU)를 팔기 위해 방문해 용산전자시장 등을 돌면서 마케팅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15년이 지난 지금은 이제 세계 최고 AI반도체 기업의 CEO로서 현재는 웃돈을 주고도 사기 어려운 고사양 GPU를 나눠주겠다면서 방문했다. 현재 엔비디아가 공급하는 최고 사양의 GPU는 블랙웰 시리즈다. 공급가격은 하나에 3~4만달러인데, 그동안 많은 클라우드 기업들이 서로 공급을 받겠다고 선점 경쟁을 하다보니 웃돈이 붙을 정도로 물량이 제한돼있는 상황이다.
우리나라가 그동안 엔비디아로부터 받은 GPU는 총 4만개 정도인데, 물량이 너무 적다보니 우리나라의 AI 산업 발전의 발목을 잡는 원인이 됐다.
이런 와중에 갑자기 젠슨 황이 한국에 나타나 앞으로 GPU 26만개를 공급해주겠다고 선언하면서 우리나라 AI 관련 산업 발전에 속도가 나게 됐다.
공급 대상은 현대자동차, 삼성전자, SK하이닉스에 각각 5만장씩, 네이버에 6만장, 한국 정부에 5만장을 배분했다. 젠슨 황은 용도까지 지정했다. 삼성전자와 SK는 AI팩토리에 사용할 것, 그리고 현대차는 피지컬 AI 모델에, 네이버는 피지컬 AI 인프라에, 정부는 국가 AI센터 구축에 사용해달라는 것이 공급 조건이다.
GPU 물량이 확보되면서 앞으로 우라나라 AI산업 발전에 속도가 붙게 됐지만, 한편으로는 우리나라 AI생태계를 이끌 역량을 지닌 이들 5개 경제주체에 엔비디아의 시스템이 기본 동맥으로 깔릴 가능성이 높아졌다.
현재 우리나라 기업이나 정부의 분위기는 젠슨 황으로부터 엄청난 선물을 받은 만족감에 빠져있다. 여기에 강남 깐부치킨에서의 치맥 이벤트까지 더해지면서 졸지에 젠슨 황은 구세주에 더해 영웅이 됐다. 젠슨 황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차 회장이 함께 치맥을 한 자리는 성지가 됐다. 그 자리는 영원한 명소가 될 것으로 보인다.
경제학에 “공짜 점심은 없다”란 말이 있다. 신고전주의 경제학파인 시카고학파를 연 시카고대학교의 밀턴 프리드먼 교수가 강조한 말이다.
모든 자원은 희소하며 어떤 혜택이든 그에 상응하는 대가나 기회비용이 따르기 때문에 '진짜 공짜'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으로, 자원의 희소성과 선택의 대가에 대한 경제학의 기본 원칙을 표현한 말이다.
과연 젠슨 황은 우리를 깐부(어린 시절 단짝)로 보고 먼저 손을 내민 것일까?
젠슨 황은 철저한 대만 중심의 ‘반도체 제국’을 만들고 있는 제국의 황제다. 대만 태생 미국 이민자인 그에게는 조국인 대만이 젠슨 황 반도체 제국의 심장이다.
지난 5월 젠슨 황은 타이베이에서 열린 아시아 최대 정보통신(IT) 박람회인 ‘컴퓨텍스 2025’에 참석해 ‘반도체 제국’의 심장이 될 신사옥 ‘엔비디아 컨스텔레이션(NVIDIA Constellation, 별자리) 건립 계획을 발표했다. 규모는 미국 실리콘밸리에 있는 본사와 맞먹는 1만5000평 규모다. 제국의 심장에는 AI반도체 설계, 로보틱스, 양자컴퓨팅 등 핵심기술을 개발하는 연구소가 주요 시설로 들어선다.
행사 기간 중 대만 협력기업 대표들과 별도의 저녁 자리를 갖고 “제국의 제후들끼리의 단결을 강조하면서 배신자가 있을 경우 기술 공급을 끊을 것이라는 엄포도 놨다. 젠슨황에게 깐부는 대만의 ‘반도체 제국’ 제후들이다.
저녁자리를 함께 한 깐부들은 TSMC(반도체 파운드리 세계 1위), 미디어텍(반도체 설계 세계 1위), ASE(반도체 패키징 세계 1위), 폭스콘(AI서버제조 세계 1위), 에이스피드(AI서버용 기판관리콘트롤러 세계시장 80% 점유) 등 대표들이다.
이런 젠슨 황이 한국에서 깐부치킨을 찾아 국내 서열 1, 2위 기업 총수들과 치맥을 하면서 그동안 인색했던 GPU 26만장을 갑자기 공급하겠다는 데는 분명 깐부 뒤에 숨겨진 장삿속이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현재 엔비디아는 최고의 정점을 지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그동안 엔비디아로부터 AI반도체를 공급받아온 아마존, 알파벳, 마이크로소프트 등 클라우드 기업들이 AI에 투자한 비용 대비 수익이 나지 않아 이 분야의 투자를 줄이기 시작했다. 엔비디아 입장에서는 고사양의 블랙웰 시리즈에 이어 루빈까지 개발해 공급을 준비하고 있는데 공급 시장이 자칫 줄어들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즉 새로운 수요처가 필요한데, 뒤늦게 AI 시동을 건 한국이 대규모 AI반도체 시장이 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젠슨 황에게는 관심이 가는 시장이 된 것이다.
우리 정부는 지난 9월 ‘국민성장펀드 국민보고대회’에서 AI·반도체 집중투자를 위해 향후 5년간 국민성장펀드 150조원을 조성한다고 발표한 바 있다. 젠슨 황의 마케팅 안테나에 대한민국이 현재 클라우드 기업들의 대안으로 떠올랐을 것이다.
여기에 엔비디아는 GPU 공급시장에서 AMD, 브로드컴, 퀄컴 등의 추격을 강하게 받고 있다. 문제는 그동안 엔비디아가 시장을 선점하면서 깔아놓은 AI 소프트웨어 시스템인 ‘쿠다’ 때문에 엔비디아 GPU가 독점하고 있는데, 점차 이 독점 구조가 깨지고 있는 상황이다.
젠슨 황 입장에서는 이제 AI생태계를 깔기 시작한 대한민국 시장을 선점해 엔비디아 GPU를 통한 AI생태계를 구축해 시장을 장악하겠다는 복안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번 26만장 공급 조건으로 대부분 팩토리, 인프라 등 구축에 사용해달라고 주문한 것은 대한민국 AI인프라 시장을 선점하겠다는 속셈으로 보인다. 일단 엔비디아 AI시스템이 깔리면 AMD를 비롯한 경쟁사의 시스템이 깔리기 어렵기 때문에 젠슨 황 입장에서는 서둘러 한국에 손을 내밀게 된 것이다.
어려서 미국으로 이민 오면서 형편이 어려워 장학금을 받는 조건으로 미국의 깡패들이 다니는 학교를 다니면서 공부를 했고, 1993년 엔비디아를 창업할 때는 사무실에 회의 공간이 없어서 맥도날드보다 싼 햄버거를 파는 웬디스햄버거 매장에서 회의를 하면서 회사를 키운 젠슨 황 CEO의 깐부 이벤트 뒤에 있는 그의 장삿속을 계산할 줄 아는 ‘지혜의 눈’이 필요할 때다.
15년 전 게임용 그래픽카드를 팔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던 것처럼 이번 방문도 GPU를 팔러 온 비즈니스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현실감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기영,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