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곡 고희동의 <춘하추동 8폭 병풍>

오늘(10월 22일)은 나의 외조부 고희동(高羲東 1886~1965)이 돌아가신 지 60년 되는 날이다. 1965년에 나는 경기중학교 2학년이었다. 1962년 초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외조부는 상심이 크셨고, 그래서인지 장면(張勉 1899~1966) 박사가 대부가 되셔서 천주교에 귀의하시고 ‘루가’라는 세례명을 얻으셨다. 외조부는 평소에 혈압이 많이 높으셨으나 당시는 특별한 혈압약이 없었고, 단지 구기자 차를 오랫동안 숭늉처럼 마셔오셨다.

그러다가 1965년 3월 결국 쓰러지셨다. 막내딸인 나의 어머니는 급히 제기동 외가로 가셨고 다시 못 뵐 수 있으니까 다녀가라고 해서 나도 학교가 끝나고 외가로 향했다. 서울대 병원장을 지내신 김동익 박사가 다녀가셔서 다시 일어나셨으나 표정이 전과 같지 않으셨다. 외조부에게 문안을 드리고 앉아 있는데, 장면 박사가 문병을 오셨다. 외조부는 장 박사에게 외손자라고 나를 소개시켜 주셨다. 두 분은 30분 정도 한일협정 등 이런저런 말씀을 나누셨다. 그날 그 순간은 내 일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은 장면이었다.

외조부는 의식이 곧 나빠지셨으나 의외로 오래 끄시고 가을에 돌아가셨다. 자택에 마련된 빈소에 손님이 많았고 조화가 골목길을 메우고 큰길까지 넘쳤다. 다음 날(10월 23일) 동아일보에 실린 이경성(李慶成) 선생의 추모사는 “한국의 살아있는 근대미술사이신 춘곡(春谷) 고희동 선생이 오랜 신병 끝에 10월 22일 낮 12시 40분에 운명하셨다. 살아서 고전이 되고 죽어서 역사가 된 선생의 예술적 생애는 그것 자체가 한국 미술 60년이었던 것이다”고 시작해서, “오직 한 분 뿐이었던 최후의 예술원 종신회원이고 이 나라 근대 문화의 거성(巨星)이신 춘곡 고희동이 가시니 갑자기 허전함을 느끼는 것은 비단 나만은 아닐 것이다”고 끝을 맺었다. 이렇게 해서 ‘살아서 고전, 죽어서 역사’라는 유명한 구절이 남게 됐다.

10월 26일 아침에 명동성당에서 영결미사가 있었고 시민회관 앞 공터(지금 세종문화회관 자리)에서 예총(藝總)이 주관한 영결식이 있었다. 하늘이 유난히 푸르렀고 조화에서 나오는 국화향기가 진했다. 많은 점잖은 분들이 영결식장을 꽉 메웠는데, 나는 맨 앞에 침통한 표정으로 앉아 계시는 장면 박사와 백낙준 박사만 알아볼 수 있었다. (두 분은 2공화국 총리와 참의원 의장이었다.) 예총 회장인 서예가 손재향 선생의 인사말에 이어서 소설가인 월탄(月灘) 박종화(朴鍾和 1901~1981) 예술원 회장이 조사(弔辭)를 읽었는데, 감정에 북받쳐서 너무너무 힘들게 읽어나가는 모습을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예술원 초대 회장은 외조부였는데, 한번 임기를 마치고 회장 자리를 사양해서 당신이 좋아하신 월탄이 뒤를 이어서 10년째 예술원 회장을 하셨고, 6.25 때는 두 분이 국방부 부탁으로 KBS에서 선무방송까지 해서 공산군에게 납치되거나 살해될 절체절명의 위기를 겪으셨으니 그럴 만도 했을 것이다.

월탄이 힘들게 읽은 조사의 가운데 부분은 이러했다. “선생의 깨끗했던 평생의 지조와 뛰어나신 화풍과 한국 근대미술의 선구자이신 그 공로를 아프게 회상하며 통곡하는 바이올시다. 선생은 망국의 백성이 되어 우리들 모두 다 한을 품었을 때, 초옥(草屋) 냉골에서 ‘아사주의(餓死主義)’와 동사주의(凍死主義)‘를 고창하셨습니다. 조선 총독이 문화정책이라는 가면을 쓰고 선전(鮮展)을 시작했을 때, 선생은 이 가면에 굴하지 아니 하시고 끝끝내 총독부가 추천하는 심사위원을 거부하셨습니다. - - - 해방이 되자 화합했던 민족 전체는 사상으로 양분이 되어 몰지학(沒知學)한 사람들은 공산주의 마수에 걸려서 찬탁운동(贊託運動)을 감행했을 때 선생은 분연히 민족 미술의 대표자로서 반탁의 선두에 서서 모든 청년들 앞에 굳센 의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영결식에 참석하셨던 분들은 조사에 나오는 ’아사주의‘와 ’동사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을 것인데, 이는 중추원 참의를 하라는 총독부의 권유를 뿌리친 일화를 의미했다.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폐간한 후에 조선의 지식인과 문화인들은 살기가 매우 힘들었다. 일본이 진주만 공습을 감행한 후 총독부는 지식인들을 포섭해서 그들에게 우호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려 했는데, 외조부한테는 육당 최남선과 춘원 이광수를 원서동 집으로 보내서 중추원 참의를 권했다. 날씨가 차가운 날 두 사람이 원서동으로 찾아와서 이런 말을 하자 외조부는 “일본은 결코 미국을 이길 수 없소. 나는 차라리 냉골에서 굶겠소”라고 큰 소리를 치셨다. 육당과 춘원이 “춘곡이 그걸 어떻게 아시오? 춘곡은 아사주의요?”라고 하자 외조부는 “그렇소, 나는 아사주의이고 동사주의요”라고 해서 두 사람은 그냥 집을 나섰다는 일화였다. 월탄 박종화도 외조부처럼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일제 말기에는 칩거했다. 두 분과 가까웠던 언론인 김동성(金東成)도 그러했다.

고희동의 <춘하추동 8폭 병풍>이 2005년 세상에 알려지게 됐는데, 이 병풍에 대해선 설명이 필요할 듯하다. 외조부는 사후에 기념전이나 회고전 같은 것을 열지 못했다. 그러다가 40주기인 2005년 서울대 박물관에서 <춘곡 고희동 40주기 전시회>를 크게 열었다. 그때 몇몇 박물관이 갖고 있는 알려진 그림 외에도 후손들이 갖고 있는 그림들이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전시회 팜플렛에 등장한 <삼선암도(三仙巖圖)>, <해옥첨주도(海屋添籌圖)> 외에도 <춘하추동 사계산수 8폭 병풍>과 <금강산 2폭 병풍>이 눈길을 끌었는데, <춘하추동 8폭 병풍>은 이런 유래가 있다.

5.16으로 참의원을 그만 둔 외조부가 제기동 집에서 실의(失意)의 시간을 보내고 계시자 막내딸인 나의 어머니가 꽤 큰 돈을 외조부에게 드리면서 “어느 분이 8폭 병풍을 그려 주십사 하고 돈을 보내왔다”고 해서 외조부가 심기일전(心機一轉)해서 8폭 병풍을 그리신 것이다. 완성된 후 병풍을 가지러 간 나의 어머니가 “사실은 제가 드린 거에요”했더니 “그게 너였니?”하고 웃으셨다는 것이다. 나의 어머니는 이 병풍을 소중하게 갖고 있다가 40주기 전시회에 처음 공개하게 됐다.

나의 어머니는 이 <8폭 병풍>과 <금강산 2폭 병풍>을 어떻게 할까 궁리하셨는데, 서울대 박물관장으로 40주기 전시회를 주관했던 서울대 김영나 교수가 국립중앙박물관장이 되어 살펴보니 박물관에 고희동 그림이 없어서 본인이 갖고 있던 외조부의 그림 2점을 박물관에 기증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고이 간직해오신 <8폭 병풍>과 <금강산 2폭 병풍>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그때가 2013년 가을이었고 어머니는 말기 암 진단을 받은 상태였다. 어머니는 이듬해 가을에 돌아가셨다. 김영나 교수는 초대 국립중앙박물관장 김재원(金載元, 1909~1990)의 딸이며, 외조부는 김재원 박사와도 교류가 있으셨고 이승만 대통령과 두 분이 함께 찍은 사진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상돈, 전 중앙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