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3년 9월 2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보빙사(報聘使) 사절의 사진. 아래 왼쪽부터 부사 홍영식(洪英植 1855~1884), 정사 민영익(閔泳翊 1860~1914), 종사관 서광범(徐光範 1859~1897), 미국인 고문 퍼시벌 로웰(Percival Lowell), 뒤쪽 왼쪽부터 무관 현홍택, 최경석, 수원(隨員) 유길준(兪吉濬 1856~1914), 고영철(高永喆 1853~1911), 변수(邊燧 1861~1892). 한국인 최초의 견미(遣美)사절단이며 미국 땅을 밟은 최초의 한국인들인데, 갑신정변으로 인해 민영익과 홍영식은 운명이 엇갈리게 됨은 잘 알려져 있다.

조선은 철저한 신분사회라서 사대부, 중인(中人), 양민, 천민의 구분이 철저했다. 구한말 개화 바람이 불어서 중인 중에서 신분이 높은 역관(譯官)의 역할이 커져서 이들이 사대부 자제들과 어울리게 됐다. 민영익, 홍영식, 서광범은 모두 조선의 권력층인 노론(老論) 사대부 가문 출신이었다. 수원 세 사람 중 유길준은 노론 사대부 가문 출신인데, 그는 과거를 보지 않고 박규수(朴珪壽 1807~1877) 문하를 드나들면서 김옥균, 박영효 등 노론 엘리트들과 어울렸다.

1870년대 후반기 강위(姜瑋, 1820~1884)가 주동이 되어 청계천 광통교 부근에 사는 역관들이 육교시사(六橋詩社)를 만들어서 시문을 짓고 개화 담론을 가졌다. 육교시사에는 역관 변진환(邊晉桓)과 그의 아들 변수, 역관 고영주(高永周 1839~?), 고영철 형제 등이 참여했다. 변(邊)씨와 고(高)씨는 대대로 중국어 역관을 한 가문으로, 고씨 본가는 지금 종로구청이 있는 수송동에, 변씨 본가는 청계천변에 있었다. 역관들은 중국을 왕래하면서 ‘보따리 무역’을 해서 부(富)를 축적했는데, 특히 변진환은 대저택을 갖고 있어서 그의 서재에서 육교시사 모임을 자주 열었다. 변진환은 개화 지식인 강위를 후원했다. 고영주와 그의 동생 3명은 모두 역관시험에 합격했는데, 고영철이 막내였다. 고영주와 고영철은 당대의 문장가 김경수 및 김석준과 교류하고 함께 문집을 남겼다.

1881년 연말 고종은 김윤식(金允植 1835~1922)을 영선사(領選使)로 임명해서 청나라에 파견했다. 김윤식은 학도 20명 등 60여 명을 이끌고 1882년 1월에 베이징에 도착해서 이홍장과 함께 슈펠트 미 해군 제독을 만나 미국과의 수교(修交) 협상을 진행했다. 영선사 학도와 공인(工人)들은 텐진에 도착해서 여러 기관에서 수련을 했다. 그때 영선사 일원이던 고영철은 영어학교에 입학해서 영어를 배우며 조선 장인(匠人) 18명은 무기 제조법을 배우게 된다.

1882년 봄, 고종은 박정양(朴定陽 1841~1904), 어윤중(魚允中 1848~1896), 홍영식, 김옥균(金玉均 1851~1894) 등을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으로 일본에 파견했다. 이때 유길준은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변수는 김옥균의 수행원으로 따라나섰다. 강위도 일행을 따라 일본에 갔는데, 강위의 여행경비는 변수의 아버지 변진환이 감당했다. 유길준은 일본에 남아서 일어를 배우고 게이오 대학에 입학했다. 1882년 5월, 제물포에서 조미(朝美)수호조약이 체결됐고, 이를 계기로 조선은 서구 열강과 외교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1882년 7월, 임오군란이 발발하자 김윤식은 영선사 일행을 이끌고 귀국하며 청나라 군대는 군란을 진압했다. 고영철도 영어 공부를 중단하고 귀국했다. 고종은 일본에 다시 수신사를 파견했다. 박영효(朴泳孝 1861~1939)가 정사였고, 부사는 김만식, 종사관은 서광범이었으며, 민영익과 김옥균이 별개로 이에 합류했다. 이때 변수는 박영효의 수행원으로 일본을 다시 방문했다. 수신사 일행은 3개월 일정을 마치고 귀국했는데, 유학 중이던 유길준도 이때 함께 귀국했다. 그해 연말 고종은 청나라 정부 조직을 모델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을 만들었고 이듬해 초 유길준, 고영철, 지운영 등 젊은 인재들이 이 기구에 정6품 사과(司果)로 임명됐다.

1883년 5월 주한 초대 공사 루시우스 푸트(Lucius Foote 1826~1913)가 서울에 도착해서 미국 공사관을 열었다. 조선 조정은 미국과의 수교에 대한 보답으로 보빙사를 보내기로 하고 민영익, 홍영식, 서광범 외에도 수원(隨員) 유길준, 고영철, 변수, 무관 현홍택, 최경석, 그리고 영어 등 외국어에 능통하며 당시 제물포 해관(海關) 고문이던 중국인 우리탕(吳禮堂)으로 구성된 9명의 사절단을 구성했다. 7월 초 이들은 미국 선박편으로 나가사키를 거쳐 요코하마에 도착해서 동경을 들렀다. 이때 홍영식은 유길준을 데리고 동경에 체류 중이던 김옥균을 몰래 만났다. 그리고 미국 공사관의 소개로 퍼시벌 로웰이 사절단에 합류했고 영어를 잘하는 동경대 학생 미야오케 츠네지로가 통역으로 역시 합류해서 일행은 11명이 됐다. 이들은 9월 2일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서 열차편으로 워싱턴에 도착하고 다시 뉴욕에서 체스터 아서 대통령을 면접하게 된다.

고영철은 유길준, 변수와 아는 사이이나 그 배경은 달랐다. 유길준과 변수는 일본을 다녀왔고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와 가까웠다. 고영철은 당시 한성순보 발간을 준비하던 동문학 박문국의 주사였는데, 동문학은 통리기무아문 협판(協辦, 차관)이던 김윤식의 지휘하에 있었다. 중국어 역관이던 고영철은 김윤식이 영선사로 중국에 체류할 때 그 일행이었다. 김윤식의 추천으로 보빙사 일행이 되었을 고영철은 일본을 방문했던 유길준, 변수와는 성향이 달랐다. 김윤식은 당시 대표적인 친청(親淸) 성향의 온건개화파로 홍영식, 서광범과는 결이 달랐다.

고영철은 텐진에서 영어를 공부했으나 임오군란으로 영선사 일행이 조기 귀국함에 따라 수학기간이 8개월에 불과해서 통역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영어에 능통한 우리탕이 중국어로 통역하고 그러면 고영철이 이를 한국말로 통역하는 2중 통역이 불가피했다. 퍼시벌 로웰과 영어를 잘하는 동경대 학생 츠네지로가 동경에서 일행에 합류해서 태평양을 건너게 됐는데, 그때부터는 일본어를 잘하는 유길준이 츠네지로에게 일어로 이야기하면 츠네지로가 영어로 옮기는 2중 통역으로 소통을 했다.

미국 방문을 마친 보빙사 일행은 두 패로 나뉘어서 귀국 길에 올랐다. 미국 대통령 체스터 아서는 미 군함 트렌튼 호에 이들을 승선해서 유럽을 거쳐 귀국할 수 있게 해주었다. 하지만 홍영식은 이를 사양하고 고영철, 현홍택, 최경석, 그리고 퍼시벌 로웰, 츠네지로, 우리탕과 함께 대륙횡단 열차를 타고 다시 태평양을 건너서 12월 20일에 귀국했다. 유길준은 민영익의 배려로 대학을 가기 위해 미국에 남았다. 민영익, 서광범, 변수는 트렌톤 호를 타고 지구를 반 바퀴 도는 여정에 나서며 일본어를 잘하는 조지 포크(George Foulk) 해군 소위가 동승해서 안내했다. 포크가 일어로 이야기하면 변수가 이를 우리말로 민영익과 서광범에서 전달하는 이중 통역을 했다. 이들은 1884년 6월에 귀국했다.

고종에게 복명(服命, 귀국 보고)한 홍영식은 곧장 미국 공사관으로 푸트 공사를 만나서 자신의 개혁 혁명 구상을 말하고 도움을 요청했으나 푸트 공사는 일에는 순서가 있다고 만류하고 이를 본국 정부에 보고했다. 고영철은 동문학(同文學) 박문국에 복귀해서 <한성순보> 편집 발간 일을 했다. 고영철은 동문학 책임자이며 김윤식의 사촌인 김만식(金晩植, 1834~1900)과 협판이던 김윤식에게 미국 방문에 대해 보고했을 것이다. 1884년 6월 민영익이 귀국한 후에 김옥균, 홍영식 등은 서광범과 변수로부터 민영익은 개화에 뜻이 없음을 확인하고 민영익을 제거하기로 결정했을 것이다. 김옥균과 홍영식은 미국 공사 푸트와 공사관 해군 무관이 된 조지 포크 소위를 수 차례 만나서 그들의 구상을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했으나 푸트 공사는 그렇게 성급하면 안 된다고 만류했다. 김옥균과 홍영식은 일본 공사관을 드나들면서 거사를 모의했을 것이다. 이들의 계획은 정동(貞洞)의 외교가에는 알려져 있었을 것이나 고종과 민영익 등 민씨 세력은 전혀 몰랐던 것 같다.

그리고 12월 4일, 우정청 낙성식 날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김옥균, 홍영식 등과 서재필 등 일본 사관학교 유학생들은 일본 공사가 동원한 일본군의 지원하에 수구파 세력 제거에 나섰고 고종이 보는 앞에서 수구파 대신 세 명을 살해하고 민영익에게 중상을 입혔다. 하지만 곧 출동한 청군(淸軍)에 압도된 일본군이 후퇴하자 홍영식 등은 관군과 청군에 의해 살해되며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변수, 서재필 등은 일본 공사관에 피신했고 공사관이 위협을 받자 제물포로 도망가서 일본 선박에 간신히 올라타고 일본으로 도피했다. 소문을 듣고 뛰쳐나온 군중은 일본 공사관을 불태우고 <한성순보>를 발간하던 박문국도 불살라 버렸다. 홍영식, 김옥균, 서광범, 변수 등 주동자들의 가족은 전원 자결하거나 처형되었다. 멸문지화(滅門之禍)를 입은 것이다.

고영철은 갑신정변 한 달 전에 병가(病暇)를 내고 박문국에 출근을 하지 않았다. 고영철은 갑신정변이 완전히 수습되고 김윤식이 독판(督辦)이 되어 다시 신문 발간을 준비할 때까지 6개월 동안 휴직한 후에 동문학에 복직했다. 이 사실은 기록에 남아 있다. 하지만 갑신정변 한 달 전에 별안간 칭병(稱病)하고 휴직했다는 것이 우연이라고 보여지지는 않는다. 당시 정동 외교가에 쿠데타 소문이 무성했으니까 이를 모를 리가 없는 김윤식이 고영철을 보호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쉬라고 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갑신정변 소식을 들은 유길준은 공부를 중단하고 유럽을 거쳐 귀국했으나 체포령이 떨어져서 죽을 뻔했으나 한규설(韓圭卨 1848~1930) 덕분에 연금생활을 할 수 있었고, 그러면서 <서유견문록>을 펴냈다. 유길준은 갑오개혁을 추진한 김홍집 내각에서 협판과 대신을 잠시 지냈으나 아관파천(俄館播遷) 후 사형명령이 떨어져서 일본 공사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도피해서 10여 년간 망명과 유배생활을 해야만 했다. 고영철은 그 후에도 내무부 주사로 근무했고 1894년부터 10년간 지방 군수를 지내고 은퇴했다. 유길준의 생명을 구한 한규설은 을사늑약 당시 참정대신(參政大臣)으로 조약체결에 반대했다. 변수는 그 후 우여곡절 끝에 미국에 가서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농무부 공무원이 됐으나 기차 사고로 요절했다. 이들은 격동의 시절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으나 나라는 결국 망하고 말았다. (을사늑약 120주년이 다음 달이네요.)

이상돈, 전 중앙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