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호 PD(‘MBC 전 사장’이란 명칭보다는 우리에게 친숙한 ‘PD’라고 지칭하고자 한다.)가 10여 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만든 4대강 사업 ‘추적’을 보고 글을 올린다는 것이 조금 늦었다. ‘수심 6미터’에 대한 내부 고발자가 김원 박사였고, 최근에 낙동강 부근 농지에서 출시한 쌀에 녹조 성분이 검출됐다는 사실이 <추적>으로 처음 확인된 것이 뜻 깊다.
4대강 사업은 2007년 대선을 앞두고 나온 한반도 대운하 공약이 2008년 촛불시위로 불가능해지자 별안간 들고 나온 사업이다. 이명박은 수심 6미터를 유지하라고 했으니까 자기 임기 내에는 못하더라도 다음 대통령은 그것을 이어서 할 것으로 생각했을 수 있다. 이명박은 차기 대통령으로 박근혜를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당시 이명박은 정운찬을 국무총리로 임명했고 또 김태호를 총리로 임명하려다가 좌절된 바 있다. 박근혜는 한반도 대운하나 4대강 사업을 좋아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박근혜는 2007년 대선을 앞둔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이 불공정했다고 믿었다. 이명박은 박근혜가 아닌 자기가 원하는 인물이 다음 대통령이 되어 대운하를 만들기 원했을 수도 있다.
우리나라 선거는 후보자가 15% 득표를 하면 법정 한도 내에서 비용을 국고로부터 보전받는다. 하지만 후보자 경선에는 그런 것이 없다. 2007년 대선을 앞둔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은 역대급으로 치열했다. 그것은 가장 비싸게 치른 경선이었으나 박근혜는 그럴 돈이 없었다. 그러면 이명박은 그런 돈이 어디서 나왔는가? ‘한반도 대운하 마스터 플랜’만 해도 문외한이 적당히 만든 것이 아니다. 상당한 전문가들이 참여해서 만든 것이 틀림없다. 전국 주요 도시를 돌면서 치른 순회 경선에는 동원된 버스가 수십 대씩 와서 북적거렸다. 이명박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모두 자발적으로 돈을 내고 참여했다고 보기는 좀 그렇지 않는가.
2007년에 이명박이 내건 대선 공약은 한반도 대운하, 그리고 방송법 개정과 종편 허가였다. 그 외에 ‘비핵개방 3000’(북한을 개방시켜서 비핵화하고 1인당 3000달러 소득을 만들겠다는 황당한 이야기) 등이 있으나 모두 웃기는 이야기일 뿐이다. 하지만 대운하 사업과 종편은 이권(利權)이 걸려있는 공약이다. 그래서 대운하 사업을 못하게 되자 별안간 강을 살리겠다면서 4대강 사업을 들고 나온 것이 아니겠는가 한다. 종편 사업권을 따낸 신문은 4대강 사업에 찬동하거나 침묵했다. 조중동이라고 부르는 신문 중 한 신문은 아예 침묵했다. 다른 신문은 열렬히 지지했다. 또 다른 신문은 4대강 사업을 비판하는 사람을 비판하는 방식으로 기사를 썼다. 인천공항을 반대했던 누구누구가 4대강 사업을 또 반대하고 도룡룡 핑계로 국책사업을 방해한 사람이 4대강 사업을 반대한다는 식이었다.
한반도 대운하 공약이 나오고 4대강 사업이 추진될 당시 나는 국토부 산하 중앙하천관리위원회 위원이었다. 이 위원회는 하천관리에 대한 최종 심의 의결권이 있는 위원회다. 따라서 그 위원은 수자원 학자들이 가장 하고 싶어 하는 자리이다. 나는 수자원공학 교수가 아닌 학자로 처음으로 그 위원회 위원이 됐다. 나를 그 위원회 위원으로 추천한 기관은 국토부의 전신인 건설교통부와 수자원공사였다. 왜냐하면 당시 국토부와 수자원공사는 강원도, 서울시 등 여러 지자체와 물값 분쟁을 겪고 있었다. 수자원공사는 다목적 댐을 운영해서 지자체에 공급하는 물에 대한 물값을 받아왔는데 지방자치가 실시된 후에 물값을 못 내겠다는 지자체가 우후죽순처럼 나와서 심각한 상황이었다. 관건은 ‘물을 이용할 권리’, 즉 수리권(water right)이었는데, 당시 이런 문제를 공부한 법학교수는 내가 유일했다. 나는 미국의 수자원 개발 역사는 물론이고 댐 개발의 순작용과 부작용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이 있었다.
이명박이 서울 시장으로 있으면서 취수장 이전에 따른 물값을 수자원공사에 못 내겠다고 몽니를 부린 사건은 결국 법원으로 갔다. 1심은 수자원공사가 이겼고 고려대 법대를 나온 판사가 주재한 2심에선 서울시가 승소했다. 대법원이 이 사건을 다룰 때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어 4대강 사업을 밀고 나가고 있었는데, 김지형 대법관이 재판장을 맡은 대법원에서 수자원공사는 100% 승소했다. 이 판결로 인해 수자원공사는 최소한 연간 수백억 원 규모의 물값을 받아서 댐을 운영할 수 있게 됐다. 당시 수자원공사는 조용하게 이 판결을 환영했다. 나는 그때 1심에서 3심에까지 장문의 의견서를 써서 재판부에 제출했다. (그러고 원고료로 100만 원인지 200만 원인지를 매번 받은 것으로 기억된다.)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이런 사정이 있어서 2007년 대선에 앞선 한나라당 경선 때 수자원공사 직원들은 박근혜를 심정적으로 지지했다. 내가 4대강 사업에 반대하면서 소송단을 이끌었으나 이런 사정이 있어서 이제는 대부분 은퇴한 당시 수자원공사 간부들은 나와 특별한 관계였다.
이런 사연 때문에 나는 건설기술연구원의 수자원 박사들과 수자원 교수들을 잘 알았다. 4대강 사업을 할 때 앞장 선 기관은 건설기술연구원이었다. 바로 1년 전에 훼손된 하천을 복원하는 연구를 하던 연구원들이 별안간 보를 건설하면 하천이 좋아진다는 연구를 해야 했다. 하지만 주로 40대이던 이 연구원들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사표를 내고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들도 당시 겪은 트라우마가 심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4대강 사업에 찬성하고 앞장선 교수들에 대해선 일말(一抹)의 동정심이 없다. 왜 대학교수가 정년을 보장받는지(tenured),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소신껏 학문 활동을 하라고 정년을 보장하는 것이 아닌가. 4대강 사업에 앞장선 교수들이야말로 나라를 팔아먹은 구(舊)한말의 매국노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4대강 사업에 반대했던 사람들이 주장한 바는 그렇게 하면 강이 복원되지 않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최승호 PD의 ‘추적’에는 독일의 이자르 강 복원 사례가 나온다. 이자르 강처럼 그나마 복원이 가능한 4대강은 금강이 유일할 것이다. 사실 금강은 무엇 때문에 보를 세웠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금강은 준설도 많이 하지 않았고 강 자체가 한강과 낙동강보다 작아서 보의 수문을 열고 궁극적으로 보를 해체하면 원상 복원에 다가갈 수 있어 보인다. 영산강은 유람선을 띄운다고 수천억 원을 더 들여서 갑문을 건설했으나 배가 다닌 적이 없다. 그게 호남사람들의 숙원이었다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 그 지역은 무안공항, 새만금 간척, 흑산도 공항, 새만금 공항 등 쓸데 없는 사업을 하고 또 원하는지 나는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한강은 어떻고 낙동강은 어떠할까? 한강은 수량이 워낙 풍부해서 한강에 만든 이포보 등은 무해무익한 존재인듯하다. 그러면 낙동강은 어떠할까? 솔직히 낙동강을 복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다. 준설도 많이 하고 보도 많을뿐더러 규모가 크기 때문이다. 4대강 사업에 반대했던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강을 이렇게 건들면 부작용이 심하고 복원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4대강 사업은 직접 예산이 22조 원이고 추가로 들어간 사업비를 합치면 35조 원에 달한다. (35조원으로 공군 전투기를 들여오거나 해군 함정을 들여왔다면 어떠했을까?) 4대강 사업에 반대했던 경제학자 중에 한신대 임석민 교수라는 분이 있었다. 임 교수가 어느 토론회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돈이 필요하면 그냥 가져가라, 그냥 가져가면 되지 왜 강을 망치려는가.” 이처럼 본질을 꿰뚫은 발언은 없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상돈, 전 중앙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