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 전인 6월 25일, 부산 국제신문은 6.25 75주년을 맞아 ‘박물관에서 꺼낸 바다’ 시리즈 기사 43번째로 <붓끝에 남은 피란의 바다, 고희동 필 ‘부산영도해안’>를 게재했다. 부제는 ‘복잡하게 얽힌 선박, 먹빛 하늘…부산이 감당한 피란 현실 압축’이라고 했으며, 필자는 국립해양박물관 학술연구팀 김현주 연구원이다. 부산에 있는 국랍해양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춘곡 고희동의 ‘부산 영도해안’, (1952년, 종이에 수묵담채)를 소개한 글이다.

박물관에서 꺼낸 바다 <43> <붓끝에 남은 피란의 바다, 고희동 필 ‘부산영도해안’>

복잡하게 얽힌 선박, 먹빛 하늘…부산이 감당한 피란 현실 압축

어제(25일)는 한국전쟁 발발 75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1950년 6월 25일, 수백 만의 삶을 뒤흔든 전쟁이 시작되었고, 남쪽 끝 부산은 그 전쟁의 마지막 보루이자 가장 많은 피란민이 몰린 임시수도가 되었다. 바닷가 언덕과 항만 일대에는 비조차 막지 못하는 움막과 판잣집이 빽빽하게 들어섰다. 그러나 이처럼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멈추지 않은 것이 있었으니, 바로 예술이다.

당시 부산에는 전국 각지에서 피란 온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 김환기 장욱진 이응노 박고석 등 한국 근현대 미술의 주요 작가들이 이곳에 머물며 작업을 이어갔다. 화판과 물감을 구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전시회가 열리고, 미술 단체들도 꾸준히 활동했다. 예술은 이들에게 삶을 지탱하는 정신적 버팀목이자, 눈앞의 현실을 기록하고 해석하는 수단이었다.

춘곡 고희동(1886~1965) 역시 이 시기 부산에서 활동을 이어간 화가 중 한 사람이다. 그는 흔히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로 알려져 있으나, 일본 도쿄미술학교에서 유화를 전공한 뒤 귀국해 한국화로 전향했고 이후 동서양의 표현법을 절충한 독자적인 화풍을 완성해 갔다. 국립해양박물관이 소장한 ‘부산영도해안’은 그가 전쟁기 부산의 풍경을 자신만의 시선으로 포착한 작품이다.

화제(畵題)에 따르면 이 작품은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봄, 영도 앞바다의 정박지를 그린 것이다. 가로로 긴 화면 속에는 줄지어 늘어선 선박들이 항구를 가득 메우고 있고, 원근법을 활용한 구성은 화면에 깊이를 부여한다. 수평선 가까이 밀집된 배들과, 숲처럼 빼곡하게 얽힌 돛대와 밧줄은 항만이 감당했던 피란 현실의 물리적 밀도를 시각화한 듯하다. 선박 위에는 짐과 사람들로 가득한 모습이 간략하게 묘사되어 있어, 전쟁기 항구의 혼잡한 분위기를 전한다. 실제로 당시 부산항은 유엔군 군수물자가 집중적으로 유입되던 보급기지였고, 해상과 육상의 수송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수면 아래로 드리운 선박의 반영은 짙은 먹으로 표현되었고, 잔잔하지만 불안정하게 일렁이는 수면은 긴장감을 자아낸다. 하늘 위에 얇게 번진 먹빛 구름은 시대의 어둠을 암시하듯 퍼져있고, 거칠고 불규칙한 붓질에는 긴박한 공기가 서려 있는 듯하다. 이처럼 화면 어디에도 전쟁은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지만, 복잡하게 얽힌 선박, 무겁게 내려앉은 수면, 먹빛으로 흐린 하늘은 오히려 당시 정서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전통적으로 산수화는 관념적 이상향을 그리는 데 주력해 왔다. 그러나 이 작품은 전쟁기 부산이라는 구체적 현실을 정면으로 담아낸다. 전쟁은 이상을 밀어냈고, 예술은 눈앞 풍경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피란수도의 항구에서 고희동이 그린 바다는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시대를 압축한 장면이자 붓으로 기록한 역사이다.

다시 6월이다. 전쟁 발발 75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이 그림 앞에 다시 선다. 피란지 부산에서도 붓을 놓지 않았던 화가는, 고요한 수면 아래 시대의 슬픔과 긴장을 담아냈다. 그 바다는 지금도 잔잔히 출렁이며, 조용히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고희동의 '부산영도해안'

이 그림은 금강산 외에는 실제 경치를 거의 그리지 않은 외조부가 피난지 부산 영도에서 현장을 보고 자신의 심경을 더해서 그렸기 때문에 가치가 크다. 국립해양박물관이 구입하기 전에는 미술 평론가 황정수 선생이 갖고 계셨던 그림인데, 그림에 어울리는 박물관에서 보전하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귀한 그림을 발견해서 보전해 주신 황 선생님께도 감사드린다.

나의 외조부 고희동(高羲東)은 1951년 1.4 후퇴 시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을 와서 영도에 거처를 잡고 휴전이 성립할 때까지 2년 반을 살았다. 특별히 할 일이 없었던 외조부는 그림 재료를 구해서 몇몇 작품을 남겼다. 이 그림은 1952년 작품인데, 이보다 앞서 1951년 신묘년에 그리신 화조도(花鳥圖)가 나한테 있다. 1951년 신묘년이면 바로 내가 태어난 해이다. (나는 51년 12월 피난지 영주동에서 태어났다.)

1.4 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을 갔던 서울 사람들은 누구나 절절한 사연을 갖고 있을 것이다. 나의 외조부도 그러했다. 해방 정국에서 우파 문화예술계(당시는 ‘민족진영’이라고 불렀다)를 이끌고 인촌 김성수와 장면(張勉)은 물론이고 이승만 대통령과도 가까웠던 외조부는 6.25 남침이 있자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막내딸 집으로 피했으나 그것을 알고 들이닥친 인민군에 의해 하마터면 끌려가서 죽임을 당할 뻔했다. 간신히 도봉산 암자로 피한 외조부는 90일 동안 숨어지내면서 9.28 서울 수복을 맞았다. 인민군이 서울을 장악하자 살판이 난 어느 좌익 화가가 “김일성 수령께서 남조선의 미술가 중에서 고희동과 장발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고 하셨다"고 여기저기에서 연설을 했다. (장발(張渤)은 2공화국 총리 장면의 동생으로 서울대 미대학장을 지내게 된다.)

9.28 수복 후 원서동 집으로 돌아오신 외조부는 경기고 1학년이던 손자(고중벽)가 인민군으로 끌려가서 소식이 없음을 알고 비탄에 잠겼다. “그놈들이 나를 못 잡더니 어린 손자를 대신 잡아갔다”고 한탄하셨다. 같이 끌려갔던 동네 친구가 낙동강에서 미군 폭격으로 공산군 전선이 무너지자 둘이서 달아났으나 고중벽은 더 이상 못가겠다고 뒤쳐져서 자기만 간신히 빠져나왔다고 원서동 집으로 찾아와서 소식을 전했다. 또 다른 기가 막힌 소식은 서울대 수학 교수이던 둘째 사위가 가족을 남겨두고 북으로 후퇴하는 인민군을 따라 월북한 것이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일본 도호구(東北)제국대학을 졸업한 둘째 사위는 보성고 동창인 성유경과 친구 사이였다. 성유경은 김정일의 아내인 성혜림의 아버지로, 6.25로 인민군이 서울을 장악하자 교도소에서 풀려났고 미군과 국군이 서울을 수복하기 전에 북으로 넘어갔다. 외조부의 둘째 사위, 즉 나의 둘째 이모부는 그 후 김일성대학 교수를 지내다가 지방으로 좌천되어 1970년대에 사망했다고 한다. (이런 내용이 1996년 파리로 망명한 성혜림의 언니 성혜랑이 펴낸 책 <소식을 전합니다>에 나온다.)

외조부의 큰 사위 이건혁은 6.25 당시 공보처 공보국장이었는데, 한강다리가 끊어지기 직전에 혼자 남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경성법전을 나온 그는 해방 후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지내면서 ‘우익 강골(强骨)’로 불렸다고 하는데, 휴전 협정이 맺어진 후 정부를 나와서 한국일보 편집국장을 지냈다. 그러니까 큰 사위는 우익 언론인이었고 둘째 사위는 좌익 교수였던 셈이다.

부산의 명물 40 계단 위 영주동에서 피난 생활을 한 나의 친가에도 불행이 있었다. 나한테는 첫돌이 지난 누나가 있었는데, 당시 창궐했던 천연두에 걸려 죽은 것이다. 1951년은 우리나라에서 천연두가 크게 유행해서 4만 명이 걸리고 1만 명이 죽었다고 하나 전쟁 중이라서 그 숫자는 더 많을 수 있고, 피난민으로 인구 밀도가 높았던 부산에선 어린이들이 특히 많이 죽었다. 다행히 죽지 않은 어린이는 얼굴에 온통 흉터가 남는 불행을 감당해야만 했다. 나의 누나는 전쟁 중이라서 호적에도 올리지 못하고 짧은 생을 살다 갔으니 이 세상에 왔다 갔다는 기록도 없어서 더욱 슬프다. 1951년 겨울이 오자 천연두 유행도 수그러들었고 그때 내가 태어났다. 외조부는 내가 태어나서 부산 피난 생활 중 가장 기뻤다고 자주 말씀하셨다. 금년 10월이면 외조부가 돌아가신 지도 60년이 되니, 세월이 많이 흘렀다.

이상돈, 전 중앙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