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중 아아젠하워가 연합군 사령관으로 영국 런던에서 근무했던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아이젠하워의 비서 역할을 했던 케이 서머스비
(1편에 이어서) 1942년 6월 아이젠하워가 연합군 사령관으로 런던에 부임한 후 1945년 12월 육군참모총장이 되어 본국으로 귀국하기까지 3년 반 동안 케이 서머스비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이젠하워의 옆에 있었다. 전쟁 중이었지만 두 사람이 어떤 관계였나를 두고 이런저런 말이 돌았다. 케이 서미스비에 대해 언론 기사가 나와서 고향 집에 머물던 아이젠하워의 부인 매미 여사는 마음고생이 심했으나 애써 모른 체했다. 아이젠하워의 주변에 있었던 참모들은 두 사람 사이에 깊은 관계는 없었다고 이야기 했으나, 두 사람이 포옹을 하고 키스 하는 모습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육군참모총장으로 발령이 난 아이젠하워는 1945년 12월 혼자 귀국했다. 케이 서머스비는 아무런 인사 명령을 받지 못하고 런던에 남겨졌다. 참모총장이 된 아이젠하워는 5성 장군으로 승진했고 후임자인 오마 브래들리에게 참모총장 자리를 넘겨 준 후에 컬럼비아대 총장을 지냈고, 나토가 창설되어 연합군 사령부가 생기자 초대 사령관을 지냈다. 그리고 195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공화당 후보로 영입되어 그해 11월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 애들라이 스티븐스를 여유있게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런 과정에서 케이 서버스비는 잊혀져버렸고, 아이젠하워는 자신이 부통령으로 데리고 있었던 리차드 닉슨이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난 후인 1969년 3월 78세로 눈을 감았다.
아이젠하워가 세상을 뜨자 아이젠하워와 케이 서머스비에 얽힌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조지 마셜은 1959년에, 그리고 아이젠하워는 1969년에 사망했으나 트루먼은 미주리에서 은퇴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때 멀 밀러(Merle Miller)라는 작가가 트루먼을 인터뷰해서 1974년에 <솔직히 말하다(Plain Speaking)>라는 트루먼 구술 회고록을 냈다. 이 책에 의하면, 전쟁이 끝나고 연합군 사령관으로 런던에 머물고 있던 아이젠하워가 자기는 이혼을 하고 케이 서미스비와 결혼해서 영국에 살려고 하니까 미군에서 은퇴하게 해 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조지 마셜 참모총장에게 보냈다는 것이다. 트루먼은 조지 마셜이 “이 자를 육군에서 내보내고 인생을 가련하게 만들거야”(“beat him out of the Army, make his life miserable")라고 자기에게 말했다고 밀러에게 구술 기록을 남겼고, 그 내용은 책에 그대로 나왔다.
1974년에 밀러의 이 책이 나오기 2년 전에 해리 트루먼은 88세로 사망했다. 따라서 조지 마셜, 아이젠하워, 트루먼이 모두 사망했기 때문에 이 세 사람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는 미궁에 빠져버렸다. 그런데 중요한 목격자가 등장했다. 컬럼비아대 역사학 교수이며 퓰리처상을 탄 개릿 매팅리(Garret Mattingly 1900~1962)는 아이젠하워가 컬럼비아대 총장을 지낼 때 역사학과 동료교수들에게 1945년에 자기가 워싱턴에 있는 해군정보국에서 장교로 일하면서 워싱턴과 런던 간의 케이블을 감시하고 있었는데, 조지 마셜이 아이젠하워에게 보낸 케이블에서 그런 일이 있으면 연합군 총사령관직에서 해임하는 수밖에 없다고 답한 케이블을 보았다고 이야기했음이 확인됐다. 매팅리 교수는 이미 사망했으나 그로부터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동료교수들이 이렇게 증언하고 나선 것이다. 따라서 “인생을 가련하게 만들겠다”고 막말을 한 사람은 버지니아 출신인 점잖은 조지 마셜이 아니라 미주리 출신인 ‘촌사람’ 해리 트루먼이었다는 것이다.
1945년에 아이젠하워의 직속 부사령관이었고 아이젠하워가 대선 출마를 결심한 후 군에서 은퇴하고 아이젠하워를 도와서 전당대회 경선과 본선을 치른 루시우스 클레이(Lucius Clay 1898~1978) 장군은 이에 대해 질문을 받자 한숨을 쉬면서 “아이젠하워는 5성 장군이기 때문에 은퇴에 관계없이 봉급을 받게 되어 있었고, 아이젠하워가 영국에 머물러 살 가능성이 있었다”고 시인했다. 실제로 1945년에 아이젠하워는 영국에서 너무 인기가 좋아서 아이젠하워가 영국에 남아서 살아야 한다는 여론도 있었다.
한편, 아이젠하워가 육군참모총장에 취임하기 위해 귀국하면서 버려지다시피 한 케이 서머스비는 1947년에 미 육군에서 전역을 하고 영국을 떠나서 미국에 정착했다. 전역에 앞서 그녀는 동성무공훈장(Bronze Medal) 등 훈장을 여럿 받았다. 미국에서 그녀는 결혼했으나 곧 이혼하는 등 편안한 삶을 살지 못했다. 그녀는 2차 대전 중 아이젠하워와 함께 한 시간에 대해 인터뷰한 책을 냈으나 아이젠하워와의 로맨스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아이젠하워가 사망하고 자신도 암에 걸린 상황인 1975년에 서머스비는 <과거를 잊다>(Past Forgetting)라는 회고록을 냈는데, 아이젠하워와 자기는 서로 사랑을 했으나 깊은 관계는 없었다고 썼다. 죽기 전에 대필 작가가 쓴 이 책을 본 서머스비는 책에 많은 사실이 누락됐다는 말을 남겨서 그녀가 아이젠하워와 깊은 관계였음을 암시했다. 케이 서머스비에게는 런던에서 전쟁을 지휘하던 아이젠하워와 같이 보냈던 3년 반 세월이 그녀 인생의 최고 시절이었다. 그녀는 그 시절을 생각하면서 쓸쓸하게 눈을 감았을 것이다.
여기서 트루먼과 아이젠하워와의 관계를 돌아 볼 필요가 있다. 1948년 대선에서 트루먼 대통령은 공화당 후보 토머스 듀이(Thomas Dewey 1902~1971)와 붙어서 간신히 승리했다. 뉴욕 검사장으로 뉴욕 마피아 거물 럭키 루치아노를 기소해서 유죄판결을 받아냄으로써 유명해 진 토머스 듀이는 뉴욕 주지사로 당선된 후 1944년 대선과 1948년 대선에 공화당 후보로 나와서 루스벨트와 트루먼에게 패배했다.
한국전쟁이 지루하게 지속되고 민주당 정권 20년에 대한 염증이 높아져서 여론은 공화당이 유리해 보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1952년 대선에 다시 출마할 수 있었으나 당선되기는 어려워 보였다. 이미 두 번이나 대선에 출마해서 패배한 토머스 듀이는 불출마를 선언해서 공화당 후보로는 오하이오 출신인 로버트 태프트(Robert A. Taft 1899~1953) 상원의원이 유력했다. 대통령과 대법원장을 지낸 윌리엄 태프트의 아들인 그는 뉴딜 정책과 미국의 대외개입에 반대하는 이른바 ‘Old Right’을 대변했다. 이미 대선 경선에 참여한 적이 있는 태프트는 공산주의에 반대하면서도 한국과 유럽에서 미군을 철수해야 한다는 ’고립주의(Isolation)‘를 반영했다. 따라서 대선을 1년 앞두고 민주당은 후보가 없고, 공화당은 로버트 태프트 밖에 후보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적 영웅인 아이젠하워를 대선 후보로 영입하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아이젠하워에게 민주당 후보가 되어 달라고 했고, 공화당 내에서는 로버트 태프트에 반대하는 토머스 듀이 주지사가 아이젠하워에게 공화당 후보로 나오면 자기가 전폭적으로 지지하겠다고 나섰다. 5성 장군인 아이젠하워는 정치적 배경도 없고 경험도 없어서 선뜻 결심을 하지 못했다. 아이젠하워는 일단 트루먼의 부탁은 고사하기로 했다. 당시 민주당은 한국전쟁 때문에 인기가 없어서 승리할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공화당 후보가 되기 위해선 후보 지명대회에 나가야 하는데 당내 기반이 없는 아이젠하워는 자신이 없어서 결정을 하지 못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아이젠하워에게 민주당 후보가 되지 않아도 되지만 꼭 공화당 후보가 되라고 부탁했다. 트루먼은 만일에 고립주의자인 태프트가 공화당 후보가 되면 할 수 없이 자기가 또 다시 출마해야 한다면서 아이젠하워에게 공화당 후보가 되라고 당부했다. 그야말로 위험한 고립주의자가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트루먼의 충정(衷情)이었다. 태프트가 대통령이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한 토머스 듀이는 당내 경선운동은 자기가 할 테니까 출마하라고 당부하자 아이젠하워는 루시우스 클레이 등 가까운 참모들과 상의한 후 출마를 결심했다. 1952년 여름에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아이젠하워는 로버트 태프트를 근소한 차이로 누르고 승리했다.
민주당에서 아이젠하워를 상대로 대선에 나가겠다는 사람이 나오지 않았다. 트루먼 대통령은 일리노이 주지사 애들라이 스티븐슨(Adlai Stevenson 1900~1965)을 설득해서 민주당 대선 후보로 나서게 했다. 일단 대선 본선 국면에 들어가자 트루먼은 스티븐슨의 당선을 위해 힘을 쏟았다. 그러면서 아이젠하워에 대해 툭하면 비판적인 언급을 했다. 아이젠하워는 트루먼이 마치 자기의 약점을 갖고 자기를 견제하는 것 같이 느꼈다. 그 때 아이젠하워는 혹시 트루먼이 자기가 부인과 이혼하고 영국에서 은퇴해 살겠다고 조지 마셜에 쓴 편지를 갖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만일에 트루먼이 이 사실을 폭로하면 아이젠하워는 망신을 당하고 낙선할 판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을 일어나지 않았고, 아이젠하워는 예상대로 압승을 거두었다.
그러면 아이젠하워가 조지 마셜에게 보낸 편지는 어떻게 됐을까? 조지 마셜이 육군참모총장에서 물러나면서 파기했다고 보기도 하지만 이런 이야기도 있다. 대통령 취임식을 마친 아이젠하워는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섰는데, 데스크 서랍에 트루먼이 남기고 간 서류들이 있었다. 그 속에서 아이젠하워는 자기가 조지 마셜에게 보낸 문제의 편지를 발견했고, 손수 그 편지를 불 태워 버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8년 임기 동안 단 한 번도 트루먼을 백악관으로 초대하지 않았고, 트루먼은 이를 매우 고약하게 생각했다. 이렇게 해서 2차 대전 막바지에 돈독한 사이던 두 사람은 멀어진 것이다.
아이젠하워와 함께 전쟁을 치른 주요 지휘관들은 두 사람 사이가 뜨거운 관계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반응을 보였다. 중요한 점은 케이 서머스비에 힘입어 아이젠하워가 스트레스를 이겨내고 노르망디 상륙작전 등 중요한 결정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케이 서머스비는 누구 못지않게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끄는데 기여한 셈이다. 미주리 ‘촌사람’인 해리 트루먼은 진솔하고 솔직한 사람이었다. 대통령인 그는 조지 마셜, 아이젠하워, 딘 애치슨이 런던 등으로 장거리 출장을 갈 때나 출장에서 돌아올 때면 공항으로 배웅을 나가고 마중을 나갔다. (꼴 같지도 않은 대통령이 외국에 나가고 올 때면 장관들이 줄을 서는 우리 모습은 어떠한가?) 돌이켜 보면, “망신을 주어서 군에서 내보내고 말거야” “그 개xx들의 엉덩이를 걷어 차겠어“ 같은 미주리 ‘촌사람’의 솔직 담백함이 아이젠하워의 이혼을 막아서 나중에 대통령이 되게 했고, 또 한국에 미군을 보내서 대한민국을 구하지 않았을까?
이상돈, 전 중앙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