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11월 말, 한국 전방 부대를 방문해서 야전 식사를 하는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

6.25 전쟁이 발발한지도 벌써 75년이 지났다. 해방 후 혼란을 극복하고 총선을 거쳐 정부를 수립한 후 2년도 되지 않아서 전란(戰亂)이 발생했으니 그것을 극복했다는 자체가 기적에 가깝다. 그 기적을 이룩한 1등공신은 해리 트루먼(Harry Truman 1884~1972) 대통령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트루먼은 본능적으로 이것을 그냥 둘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고향 미주리에서 6.25 남침을 보고 받은 트루먼 대통령은 급히 워싱턴으로 복귀했다. 당시 백악관은 수리 중이라서 트루먼은 건너편 블레어 하우스에 묶고 있었다. 딘 애치슨 국무장관은 사색(死色)이 된 장면 주미 대사를 데리고 블레어 하우스로 와서 트루먼 대통령을 만났다. 트루먼은 울먹이면서 말도 제대로 못하는 장면 대사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내가 그 개**들 엉덩이를 걷어차 버릴 테니까 걱정 말라”고 달랬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 유불리(有不利)와 손익(損益)을 따지고 우물쭈물했더라면 우리나라는 공산군 수중에 넘어갔을 것이다

한국전쟁을 끝맺음 한 대통령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 1890~1969)다. 1952년 대선 기간 중 아이젠하워는 한국전쟁을 어떻게 끝내겠다는 약속은 하지 않고 당선되면 한국에 가서 현지 상황을 보겠다고 이야기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그런 아이젠하워가 무책임하다고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대선에서 승리한 아이젠하워는 11월 25일 당선자 신분으로 합참의장 오마 브래들리(Omar Bradley 1893~1981) 장군 등을 대동하고 한국에 도착해서 전방 부대를 시찰하고 이승만 대통령도 잠시 만났다.

이승만 대통령은 물론이고 유엔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Mark Clark 1896~1984) 대장도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아이젠하워에게 말했다. 클라크 장군은 미군을 증파해주면 자기가 북으로 밀고 들어가겠다고 이야기했다. 2차 대전 중 유럽 전쟁을 총지휘했던 아이젠하워는 클라크의 실력을 잘 알았다. 조지 패튼 장군이 시칠리 침공에 성공한 후 사병의 빰을 때려서 지휘관에서 해임된 후 클라크가 이탈리아 본토 작전을 지휘했으나 졸렬하게 작전을 해서 독일 군대를 그대로 철수하게 하는 등 큰 실책을 저질렀으나 클라크는 오랜 친구인 아이젠하워 때문에 지휘관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아이젠하워는 클라크에게 헛된 꿈에서 깨어나라고 했고 자기는 곧 휴전을 성사시키겠다고 확실하게 말했다.

해리 트루먼은 2차 대전을 치른 지휘관들을 존경했다. 트루먼은 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6년 동안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조지 마셜(George Marshall Jr. 1880~1959) 장군을 특히 존경했다. 1차 대전 중 유럽에서 포병장교로 참전한 트루먼은 미국 원정군 군수참모였던 조지 마셜 대령의 능력을 높이 존경했다. 대통령이 된 트루먼은 마셜을 국무장관으로 임명했고 6.25가 발발하자 은퇴한 마셜을 다시 국방장관으로 임명했다. 트루먼은 마셜을 장관으로 모시고 자기가 대통령을 하는 것이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트루먼은 유럽 전쟁을 지휘한 아이젠하워와 오마 브래들리도 높이 평가했다. 아이젠하워가 유럽 전쟁을 끝내고 워싱턴으로 귀국하자 트루먼은 공항으로 마중을 나갔다. 하지만 트루먼과 아이젠하워는 1952년 대선을 계기로 서먹서먹한 관계가 되고 말았는데, 그 배경에는 젊고 매력적인 한 영국 여인이 있었다.

1942년 4월, 나치 지배 하에 들어간 유럽 대륙을 탈환하기 위한 영국 정부와의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런던에 도착한 조지 마셜 육군참모총장은 자기의 참모인 아이젠하워 소장에게 런던에 와서 현지 상황을 살펴보라고 지시했다. 5월 25일 아이젠하워는 마크 클라크를 대동하고 런던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소장으로 진급한지가 각각 두 달과 한 달 밖에 안 되었다.) 그 때 젊은 미모의 여성 운전기사가 자동차를 갖고 나와서 아이젠하워 일행을 태우고 영국군 사령부로 향했다. 그 여성은 케이 서머스비(Kay Summersby 1908~1975)로, 영국 전쟁부가 운영하는 기계수송단(Machanized Trnasport Corp., MTC) 소속의 기사였다. MTC는 원래 여성들의 자원봉사기구였으나 전쟁이 본격화하자 영국 전쟁부가 운영했고 급여를 지불했다. 제복을 입은 이 여성들은 전시에 교통수단이 요구되는 곳에 달려가서 봉사하는 것이 임무였다. 미국이 전쟁에 참여함에 따라 미군 고위 장교가 런던을 방문하거나 체류하는 경우가 많아지자 영국 전쟁부는 미모의 교양있는 여성 운전기사를 미군 고위 장교의 기사로 붙여주었는데, 아이젠하워 소장에게 케이 서머스비가 배정된 것이다.

좋은 집안에서 성장한 케이 서머스비는 첫 번째 남편과 이혼했고 두 번째 약혼자는 전사한 상태에서 아이젠하워의 차량을 운전하게 됐다. 그녀는 복잡한 런던 시내를 잘 알았고 아이젠하워에게 런던과 영국에 관해 능숙하게 설명을 하는 등 아이젠하워의 마음에 꼭 들었다. 아이젠하워와 클라크는 열흘 동안 케이 서머스비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다니면서 바쁜 일정을 보냈다. 아이젠하워는 감사의 뜻으로 미국에서 가져온 초콜렛 박스를 케이 서머스비에게 감사의 뜻으로 주고 런던에 다시 오게 되면 만나자고 하고 미국 군용기에 올랐다. 그 해 6월 3일, 아이젠하워는 조지 마셜에게 영국군의 전쟁 준비가 부실하며 미군 중장급 지휘관이 연합군을 지휘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조지 마셜은 아이젠하워를 유럽 전쟁을 지휘할 사령관으로 지명하고 헨리 스팀슨 전쟁장관과 루스벨트 대통령의 승인을 얻었다. 조지 마셜은 1차 대전에 참전한 경력도 없는 아이젠하워를 중장으로 진급시켰다. 조지 패튼 등 선배 장교 66명을 건너 띤 파격적인 승진이었다. 이렇게 해서 아이젠하워는 유럽 전선(戰線)을 지휘할 연합군 사령관이 되어 런던으로 향했다. 런던 근교 공군 기지에 도착한 아이젠하워를 맞은 사람은 케이 서머스비였다.

런던에서 유럽 전쟁을 지휘하게 된 아이젠하워의 임무는 상상을 초월하는 막중한 것이었다. 영국군과의 협의도 쉽지 않았고 처칠 수상과 루스벨트 대통령과도 긴밀하게 의견을 조율해야만 했다. 1943년 2월 대장으로 진급한 아이젠하워는 하루에 담배를 4~5갑을 피워야 할 정도로 스트레스와 긴장의 연속인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런 아이젠하워에게 케이 서머스비는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존재였다. 총명했을 뿐더러 대단한 속기(速記) 능력을 갖고 있는 그녀는 아이젠하워의 비서로 중요한 회의에도 참석하고 한가한 시간이 나면 아이젠하워와 위스키를 즐기기도 했다. 케이 서머스비의 능력에 감탄한 아이젠하워는 그녀를 미국 시민으로 만들고 미군 장교로 임관시켜서 그녀는 미 육군 서머스비 대위가 됐다. 아이젠하워가 북아프리카 전선을 시찰할 때에도 케이 서머스비는 동행을 했고 무더운 북아프리카에서 두 사람이 내의 차림으로 더위를 식히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아이젠하워는 고향에 머무르고 있는 부인 매미 여사에게 “오직 당신만을 사랑한다“는 편지를 꼬박꼬박 써서 보냈다. 유럽에서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아이젠하워는 1945년 말에 귀국해서 조지 마셜의 뒤를 이어서 육군참모총장이 됐다. (계속됩니다.)

이상돈, 전 중앙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