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이란 팔레비 정권이 붕괴하고 호메이니의 신정이 시작되면서 이란 강경파 학생들이 테헤란 미국대사관을 점거해 대사관 직원과 가족들을 인질로 잡았다.

이란과 관련한 뉴스가 나오면 나는 미국 유학 첫 학기이기도 했던 1979년 가을을 생각하곤 한다. 당시 내가 공부하던 대학에는 이란 유학생들이 제법 있었다. 이란 사람들은 피부 색깔도 흰 편이어서 아랍 사람들과는 엄연히 달랐다. 1979년 초, 오랫동안 이란을 통치해 온 레자 팔레비 국왕(샤, Shah)이 해외로 망명을 가고 파리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이란에 귀국했다. 친(親)서방 독재정권이 이슬람 혁명으로 무너지고 신정(神政) 체제가 들어선 것이다. 당시 미국에 와 있던 이란 유학생들은 샤 정부 장학생이거나 샤 정권 하에서 서구화된 이란 학생들이었다. 자연히 이들은 자국의 정치적 변혁 때문에 착잡한 분위기였다.

이집트와 모로코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샤는 암 진단을 받고 미국 병원에서 수술을 하고자 했다. 카터 정부가 샤의 미국 입국을 허용해서 샤가 미국에 입국하자 이란에서는 시위대가 미국을 규탄했다. 그러더니 강경파 학생들이 테헤란에 있는 미국 대사관을 점거하고 대사관 직원들을 인질로 잡았다. 외교 관저의 불가침권이 훼손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샤가 미국에 입국한 날이 10월 22일이고 미국 대사관원들이 인질로 잡힌 날이 11월 4일이었다. 그 사이인 10월 26일에 박정희 대통령 유고(有故) 사태가 발생했다. 그런 탓인지 박 대통령 사망은 하루 뉴스거리 밖에 안 되었다. 이란 대사관 인질사태에 항의하는 의미로 미국인들은 성조기를 집 앞에 걸었고, 워싱턴 DC에 있는 워싱턴 모뉴먼트 주변에 인질 숫자만큼의 대형 성조기가 휘날렸다. 자국 외교관과 스태프를 포로로 잡은 이란에 대한 평범한 미국 사람들의 분노는 대단했고 나는 보통 미국인들의 그 같은 분노를 체감했다.

이란 혁명수비대라는 과격한 학생집단은 미국 외교관들을 협박하는 등 거칠게 대했다. 그 중 6명이 캐나다 정부의 협력으로 탈출해서 미국으로 돌아왔고, 얼마 후 이란 정부는 흑인과 여성을 석방했다. 협상이 진전이 없자 카터 대통령은 비밀 군사작전을 승인했다. 이듬해인 1980년 4월 미군 특수부대는 테헤란으로 잠입해서 인질들을 구출하려고 했으나 이란 영토 내 사막에 기착한 미군 수송기가 헬기와 충돌해서 대원 여럿이 참혹하게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카터는 모든 것이 자기 책임이라고 고개를 숙였다. 급변하는 이란 정국 변화에 속수무책이던 카터 대통령은 인질 사태에도 무력했다. 인질로 잡혀 있던 52명은 레이건 대통령이 취임한 1981년 1월에야 석방되어 귀국할 수 있었다.

이란에 미국에 대한 적대적인 정권이 들어선 것은 지정학적으로 큰 문제였다. 미국의 좌절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1979년 12월 25일,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해서 수도 카불을 장악했다. 카터는 또 속수무책이었다. 카터의 대책은 1980년 모스코바 올림픽 보이콧이 전부였다. 12월 들어서 아프간 뉴스가 자주 나오더니 결국 소련의 군사 개입으로 중앙아시아의 세력균형이 깨져 버린 것이다. 이란에는 반미(反美) 신정(神政)정권이 들어섰고, 아프가니스탄에는 소련의 괴뢰정권이 들어섰으니, 그야말로 눈 깜짝하는 순간에 세계의 균형이 자유진영에 불리하게 변한 셈이다. 물론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의 기존 정권에 문제가 많았지만 그것을 방치해서 미국에 적대적 정권이 들어서게 했으니 미국 외교는 허공에 떠 있었던 꼴이었다. 아프가니스탄은 결국에 소련의 베트남이 되고 말았으나 당시 소련 집권자들이 카터를 얼마나 우습게 보았기에 군사력을 동원해서 침공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문제는 그대로 남는다.

이란 사태에 이어 아프가니스탄 사태로 혼란스러운 가운데 우리나라에선 12.12가 발생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10.26에서 12.12에 이르는 한국 상황은 그냥 가려지고 말았다. 5.16이 일어났을 때 케네디 정부가 피그만 침공 실패로 정신이 없었던 것과 같은 형상이었다. 카터의 안보보좌관은 컬럼비아 교수 출신인 즈비그뉴 브레진스키였다. 결과적으로 무능한 대통령에 무능한 안보보좌관이었던 셈이다. 나는 그래서 카터의 안보보좌관이었던 브레진스키의 책을 소개하면서 그를 ‘외교의 대가’라고 치켜세우는 것처럼 우스운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 카터와 브레진스키가 그나마 기여한 바는 자유노조 운동이 일어난 폴란드인데, 사실 폴란드 자유노조에 힘을 실어준 사람은 브레진스키처럼 폴란드 출신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였다. 요한 바오로 2세 덕분에 바웬사가 자유노조 운동을 이끈 것이지, 카터의 인권외교는 기여한 바가 없었다.

1979년은 ‘2차 오일 쇼크’가 발생한 해이기도 했다. 1973년 4차 중동전에 따른 사우디의 석유금수(禁輸)로 인한 1차 쇼크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나 1978년 말부터 이란의 석유생산이 차질을 빚자 원유가격이 폭등했고 미국 내 휘발유 가격이 갤런 당 1달러를 돌파했다. 1979년 여름에 내가 미국에 도착했을 때 휘발유는 갤런 당 1달러 30센트 수준이었다. 이런 휘발유 가격 때문에 연비가 나쁜 오래 된 큼직한 미국 자동차를 타는 사람들은 부담이 컸다. 미국에서 세 번째로 큰 자동차 회사이던 크라이슬러가 파산 위기에 처해서 연방정부에 구제금융을 요청한 시기도 이 때였다. 새로 크라이슬러 사장이 된 리 이아아코카는 자신은 월급을 1달러 받고 일하겠다면서 구제금융을 요청했고 의회는 이듬해 15억 달러 구제금융을 허가했다.

이런 와중에 루이지애나 주지사 선거가 11월에 있었고, 결선투표 방식의 이상한 선거 덕분에 남북전쟁 후 처음으로 공화당원인 데이비드 트린이 당선됐다. 데이비드 트린은 내가 공부하던 튤레인 로스쿨 출신이라서 루이지애나 주립대학(LSU) 출신 민주당원들이 장악해 온 루이지애나 정치지형에 큰 이변이 생긴 셈이다. 유학 첫 학기는 공부에 몰두해야 하는데 이 같은 엄청난 일이 연속해서 일어나서 연일 뉴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되돌아 보면 그 시절에 넓은 세상을 보았던 것이 그 후 나를 형성하는 계기가 됐던 것 같다.

1979년이 지나면서 미국인들은 카터에 완전히 질려버렸다. 그럼에도 1980년 대선을 앞두고 카터는 미국인들이 나이 많은 로널드 레이건을 대통령으로 뽑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으니 한심할 따름이었다. 카터 임기 동안 주택이나 자동차를 사려면 대출 금리가 16%~17%였다. 인플레이션도 두 자리, 금리도 두 자리였다. 에너지 가격이 올라서 겨울에 난방비가 많이 들자 카터는 국민들에게 집안에서 스웨터를 입으라고 했다. 미국인들은 기가 막혀서 할 말을 잊었다. (이렇게 4년 임기를 엉망으로 했으나 퇴임 후 45년을 더 살아서 미국민 세금으로 연금을 가장 많이 타먹은 기록을 세웠다.) 베트남 전쟁에 공연히 개입한 존슨 대통령에 이어 카터 대통령의 이 같은 꼬락서니를 보고 나는 미국 민주당은 더 이상 집권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미국에서 공부하던 이란 학생들은 어떻게 됐는가? 이란 유학생들은 장학금도 떨어지고 부모들이 돈을 보내는 것도 힘들어진데다가 호메이니 정부가 유학생 귀국령을 내렸다. 자연히 이란 학생들은 어수선하고 불안한 분위기였다. 그 때 만나면 인사도 하고 이따금 말도 나누던 이란 여학생이 있었는데, 내가 지나가는 말로 “너희 나라로 돌아갈 수 있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No, they gonna kill us all"라면서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대학의 외국학생 담당부서는 이란 학생들의 비자와 취업 문제를 도와서 이들이 미국 곳곳에서 정착하도록 도와주었다고 들었다. 나는 물론 그 후 그녀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 수 없지만 미국 어디엔가 정착해서 잘 살았고 지금은 70세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 때 나는 공부하고 돌아갈 수 있는 ‘고국’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맙고 대단한 것인가를 절실하게 느꼈다.

이상돈, 전 중앙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