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선 경기주택도시공사 사장 대행


우리나라는 1960년대 이후 IMF, 세계은행, 아시아개발은행 등으로부터 장기 저리의 공공차관을 도입하여 사회간접자본(SOC) 건설과 경제개발 계획에 활용하였다. 이후 1980년대부터는 주로 민간 금융기관이나 해외 은행으로부터 상업차관을 들여와 기업의 해외 투자와 단기 자금 조달에 사용하게 되었다.

1960~1970년대의 공공차관이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추진의 핵심 자원이었다. 1980~1990년대에는 상업차관의 비중이 급격히 증가하였고, 금융 자유화 정책과 종합금융회사의 확대는 외채 구조를 복잡하게 만들었고, 이는 결국 1997년 외환위기의 배경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1960~70년대 개발주의 국가전략 아래에서 국가 개입주의를 통해 경제발전을 추진하면서, 대외 차관 도입으로 인한 금융 수탈로부터 라틴아메리카나 동남아시아 국가들보다 상대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었다.

이는 유치산업 보호를 위한 보호무역주의와 수출주도형 성장 전략을 적절히 결합한 결과였다. 예를 들어, 1970년대 정부는 자동차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수입을 전면 금지하고, 국산 고유모델 개발을 강제함으로써 ‘포니’의 탄생과 함께 국내 자동차 산업의 성장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는 태국에서 시작되었다. 투기적 부동산 시장의 붕괴와 바트화의 평가절하가 발단이었으며, 이는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을 거쳐 홍콩, 대만, 싱가포르, 한국으로 확산되었다. 동아시아 발전주의 국가들이 추진했던 ‘동아시아적 축적체제’는 1997~1998년 위기 속에서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그 사회적 여파는 참담했다.

위기가 진행됨에 따라 실업률은 급증하고 GDP는 급락했으며, 은행들이 연쇄적으로 파산했다. 한국의 실업률은 약 4배 상승했고, 도시 빈곤층은 거의 3배 증가했으며, 전체 인구의 약 4분의 1이 빈곤선 아래로 떨어졌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남성 노동자의 약 15%가 실직했고, 특히 자바섬 도시 지역에서 경제적 황폐화가 심각했다.

IMF와 미국 재무부는 위기의 원인으로 과도한 국가 개입과 정경유착을 지적하며, 해법으로는 한층 강화된 신자유주의화를 요구했다. 이들은 자본시장 개방을 강력히 권고했고, 그 결과는 재앙적이었다. 반면, 자본시장을 자유화하지 않았던 싱가포르, 대만, 중국은 상대적으로 적은 영향을 받았으며, 말레이시아는 IMF의 처방을 거부하고 자본 통제를 강화함으로써 오히려 더 빠르게 회복했다. 한국 또한 IMF의 권고를 부분적으로 수용하지 않음으로써 비교적 빠른 회복을 보였다.

IMF는 단기 자본 유입을 유도하기 위해 각국에 시장 개방을 강요했고, 이는 대규모 자본의 급속한 유입과 유출로 이어졌다. 이어서 금리 인상과 재정 긴축정책이 도입되었고, 자산 가격은 폭락했다. IMF는 헐값에 자산을 처분할 것을 요구했고, 이는 위기를 초래한 외국 금융기관들에 의해 조종되었으며, 그들은 막대한 중개 수수료를 챙겼다.

한국은 자국 통화를 방어하기 위해 IMF 권유에 따라 금리를 인상했으나, 그 결과 경제는 더욱 심각한 불황에 빠졌고, 높은 부채비율을 지닌 기업들은 줄줄이 파산했다. 재벌들의 도산과 실업의 급증, 임금 하락은 위기 이후의 일상이 되었다.

여기서 두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첫째, 한국은 금융적 파산 상황에서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둘째, 미국은 이제 그 이해관계를 전적으로 월스트리트와 금융자본의 입장에서 정의한다.

결과적으로 월스트리트–미국 재무부–IMF의 연합체는 1970년대 중반 뉴욕시(당시 뉴욕시가 금융위기에 빠짐)에 긴축과 구조조정을 강요했던 방식 그대로 한국에 적용하였다. 이후 한국 경제의 회복은 부분적으로 IMF 조언을 거부하고, 비교적 강경한 노동 상황에 힘입어 가능했으며, 가장 먼저 월스트리트의 금고를 채웠다. 동시에 외국 자본은 ‘벌처 캐피털’ 방식의 인수합병을 통해 재벌들을 재편시켰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국내 사회 구조는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소득 불평등과 빈곤이 심화되었으며, 비정규직화와 노동 유연화가 확산되었고, 소수 부유층에게 자본이 집중되는 새로운 계급이 형성되었다.

IMF의 조언을 거부한 여러 국가의 사례는 월스트리트-미국 재무부-IMF 복합체의 권력이 전능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신자유주의적 재구조화는 권력 구조가 약화된 혼돈 상태에서만 성공적으로 적용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 강한 국가, 강한 시장, 법적 제도 없이는 신자유주의의 성공도 어렵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화의 복잡한 역사 속에서도 분명한 사실은, 어느 사회든 신자유주의가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긴축과 사회적 고통의 부담을 하위 계층에 전가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구조는 사회정책으로 일부 완화되기도 했으나, 상위 계층에 부의 집중을 초래했다.

오늘날 자본주의의 상층부에 존재하는 막대한 부와 권력은 1920년대 이래로 유례없는 수준이며, 세계 주요 금융 중심지로의 부의 흐름 역시 경이로울 정도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을 단순한 ‘신자유주의의 부작용’ 또는 ‘불운한 결과’로 치부하는 태도야말로, 신자유주의가 얼마나 오래 지속되어 왔는지를 보여주는 징표다.

신자유주의 이론은 자유, 자율, 선택, 권리, 경쟁 같은 아름다운 단어들로 포장되어 있지만, 실상은 세계 자본주의의 금융 중심지에서 계급 권력의 복원과 구조조정의 무자비한 현실을 숨기고 있다.

한편, 1997년 위기 이후 한국은 동아시아 주요 국가들과 비교해 IMF 조건을 수용하면서도, 국가의 통제력을 유지하며 ‘선별적 개방’을 선택했다. 공적자금 투입, 주요 은행과 기업의 국내 지배구조 유지, 교육과 복지 예산의 상대적 보존 등은 시장 개방과 국가 주도의 조정이 병존하는 혼합경제 체제를 유지할 수 있게 했다.

시민사회와 노동단체들 역시 구조조정, 민영화, 비정규직 확대 등 신자유주의 정책에 저항하며 사회 안전망 구축에 기여했다. ‘금 모으기 운동’과 같은 공동체적 연대는 유교적 전통과 결합해 개인주의와 경쟁 논리를 일부 완화했으며, 금융자본 중심의 신제국주의를 극복하는 데 기여했다.

결론적으로, 한국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이 아니라, 국가·재벌·시민사회가 각자의 방식으로 이를 필터링하고 조정하면서 고유한 발전 경로를 만들어냈고, 이를 통해 건국 이래 최대의 국난을 극복할 수 있었다.

최근 세계 최강국인 미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관세 전쟁을 벌이며 산업을 재편하고 있다. 보호무역이 한때 개발도상국의 유치산업을 위한 수단이었다면, 이제는 산업화된 선진국이 자국 제조업의 부활과 무역적자 해소, 재산업화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한때 신자유주의를 앞세워 세계화에 앞장섰던 미국이 관세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은 보호무역 보다는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를 앞세운 국가우선주의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지금 우리는 제21대 대통령 선거를 눈앞에 두고 있다. 이번 선거에서는 우리 국민을 보호하고 우리나라의 국익을 가장 잘 대변할 수 있는 지도자가 선출되기를 기대한다.

※ 데이비드 하비의 '신자유주의의 간략한 역사(A brief History of Neoliberalism, David Harvey, 2017, 한울)'를 참고로 작성했습니다.

이종선, 경기주택도시공사 사장 대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