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헌정사상 최초로 국회 탄핵소추
대상이 된 유태흥 전 대법원장
헌법은 법관에게 강력한 신분보장을 부여하는 동시에, 그 권한 남용을 통제할 수 있는 탄핵제도를 마련해놓았다. 그러나 현실에서 법관 탄핵제도가 실효성 있게 작동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이 글에서는 국내외 법관 탄핵 사례를 살펴보고, 우리나라 법관 탄핵제도의 현주소를 진단해보고자 한다.
국내 법관 탄핵 사례: 권한의 남용이 아닌 방기
● 유태흥 전 대법원장 탄핵 사건(1985년)
우리 헌정사상 최초로 국회의 탄핵소추 대상이 된 법관은 유태흥 당시 대법원장이었다. 1985년 10월 18일, 당시 야당이었던 신민당 소속 국회의원 102명이 유태흥 대법원장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발의했다. 주된 소추 사유는 판사 인사권 남용이었다.
당시 인천지법에 재직 중이던 박시환 판사(후일 대법관)는 시위 참가자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는 이유로 춘천지법 영월지원으로 좌천 발령되었다. 이는 정상적인 인사 주기(2년)에 훨씬 못 미치는 시점에 이루어진 이례적인 인사조치였다. 탄핵을 주장한 국회의원들은 "법관이 검찰이나 경찰의 의도를 어겨 무죄 판결을 내린 경우 지방전출이라는 인사 형벌을 일삼아온 것이 유태흥의 작태"라며 탄핵소추를 요구했다.
그러나 12대 국회는 1985년 10월 21일 본회의에서 총 투표수 247표 중 찬성 95표, 반대 146표로 탄핵안을 부결시켰다. 이는 당시 다수 의석을 바탕으로 한 여당의 정치적 결정이었을 뿐, 탄핵의 본질인 헌법수호와 권력남용 통제라는 취지를 살리지 못한 사례였다.
● 신영철 전 대법관 탄핵 사건(2009년)
2009년 11월 6일, 신영철 당시 대법관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발의됐다. 소추 사유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서울중앙지방법원장 시절 촛불집회 관련 사건을 특정 재판부에 몰아주기식으로 배당한 행위, 둘째, 형사단독판사들에게 전자우편을 보내 재판에 노골적으로 개입한 행위, 셋째, 국회 대법관인사청문회에서의 위증이었다.
특히 재판개입 행위는 법관의 독립성과 재판권을 명백히 침해한 위헌적 행위였다. 신영철은 "정치적인 냄새가 나는 사건은 보편적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노력하라", "집중 배당의 취지를 살릴 수 있는 결론 요망" 등의 내용이 담긴 메일을 보내 실질적으로 유죄판결을 종용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그러나 이 탄핵소추안은 국회 본회의에 보고된 후, 국회법 제130조 제2항에 따른 표결 시한(72시간)이 경과하여 자동으로 폐기되었다. 실질적인 심사와 표결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 양승태 사법농단과 임성근 재판개입 사건
2017년 드러난 양승태 대법원 시절의 사법농단 사태는 법관 탄핵의 필요성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다. 법원행정처가 재판거래, 판사 블랙리스트 작성, 학술단체 와해 시도 등 다양한 위헌•위법 행위를 조직적으로 자행했다는 정황이 속속 드러났다.
2018년 11월, 전국법관대표회의는 사법농단 관련 법관들에 대한 탄핵소추를 국회에 요청하는 결의를 했다. 이는 법원 내부에서도 탄핵의 필요성을 인정한 상징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국회는 이러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결국 2021년 2월, 국회는 사법농단 관련 법관 중 임성근 당시 고등법원 부장판사에 대해서만 탄핵소추안을 가결했다. 이는 우리 헌정사상 처음으로 법관 탄핵소추안이 본회의에서 가결된 사례였다. 그러나 임성근 판사는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이 시작되기 전 사임함으로써 심판은 각하되었다. 이는 탄핵절차의 허점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했다.
국제적 관점에서 본 법관 탄핵
● 미국의 법관 탄핵 사례
미국의 탄핵제도는 사법 권력 견제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1787년 제정된 미국 헌법은 탄핵제도를 명문화했으며, 이후 미국 역사에서 20건의 연방 탄핵 사건 중 절반이 법관에 관한 것이었다.
1803년 존 피커링(John Pickering) 연방판사에 대한 탄핵을 시작으로 2010년까지 총 15명의 연방법관이 탄핵 소추되었고, 이 중 8명이 파면되었다. 주목할 점은 법관 탄핵의 경우 상당수가 유죄로 판결되었다는 점이다.
탄핵소추 사유도 다양했다. 재판권 남용, 직무유기, 뇌물수수, 위증, 심지어 파산수탁자 임명과 관련한 편파성, 소득세 탈루, 성폭력 및 허위진술 등이 포함되었다. 이는 탄핵사유를 폭넓게 해석하는 미국 의회의 접근방식을 보여준다.
● 일본의 국민참여형 법관 탄핵제도
일본의 탄핵제도는 법관만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또한 일본은 국민이 직접 법관 탄핵소추를 청구할 수 있는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일본 재판관탄핵법에 따르면, 국민은 법관의 파면을 요구하는 청구를 재판관 탄핵소추위원회에 제출할 수 있다. 소추위원회는 중의원•참의원 의원 각 10명으로 구성되며, 청구된 사안을 조사하여 탄핵 소추 여부를 결정한다.
1948년부터 2018년까지 일본에서는 총 20,675건의 탄핵 소추 요구가 접수되었고, 이 중 48건이 소추위원회에 의해 기소 인용되었으며, 9명의 재판관이 파면되었다. 비록 인용률은 낮지만, 국민의 직접 참여를 보장함으로써 법관에 대한 민주적 통제 장치로 기능하고 있다.
국회의 탄핵권한 방기: 권력통제 실패
지금까지 살펴본 사례들은 우리나라에서 탄핵제도가 법관 통제 수단으로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현재 올해 1월 기준 3,248명의 법관이 재직하고 있는 상황에서, 헌정사 70여 년 동안 탄핵소추 대상이 된 법관은 단 세 명(유태흥, 신영철, 임성근)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임성근 판사의 경우를 제외하면 모두 표결 단계에서 부결되거나 시한 경과로 폐기되었다.
이는 국회가 헌법이 부여한 탄핵소추권을 남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방기해왔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사법부 내부에서조차 "사법농단은 헌법 위반행위"라며 관련 법관들의 탄핵을 요청했음에도, 국회는 이를 외면했다.
법관 탄핵제도는 삼권분립 원리에 따른 견제와 균형의 실현 수단이다. 그러나 우리 국회는 정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이 중요한 헌법적 권한을 제대로 행사하지 않음으로써, 사법부 통제라는 헌법적 소명을 다하지 못했다. 그 결과 법관들의 조직적 일탈이라는 헌법침해 행위가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었다.
법관 탄핵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만 내서는 사법 권력에 대한 국민 통제는 어렵게 된다. 오히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법관 탄핵제도의 실효성을 강화하여,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실질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제도적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독립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