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12월 미국 대통령 닉슨의 둘째딸 줄리와 아이젠하워 전 대통령의 손자 데이비드 아이젠하워의 결혼식 장면. CCR의 리드보컬인 존 포거티는 이 결혼식 장면을 보고 가진자들이 베트남전 참전 등 군에 가지 않고 화려한 결혼식을 올리는 데 분개해 'Fortunate Son'을 만들었다.
존 포거티(John Fogerty)가 ‘Fortunate Son'을 작곡 작사한 시기는 1968년 말이다. 1945년에 태어난 포거티는 겨우 23살이었고 운 좋게 베트남을 가지 않고 군 복무를 끝낸 후였다. 포거티가 작곡 작사한 많은 히트 곡 중에도 ‘Fortunate Son'은 가장 짧은 시간 내에 만들어낸 노래로 알려져 있다. 심지어 20분 만에 곡을 만들고 가사를 붙였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아무리 작곡 작사에 천부적 소질이 있던 포거티리고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가능한지는 모르겠다. 그러면 도무지 어떤 계기로 포거티는 벼락 같이 이 유명한 노래를 만들었나 ? 오랜 세월이 지난 2015년 포거티는 자기가 ‘Fortunate Son'를 만든 계기는 닉슨 대통령의 작은 딸 결혼식이었다고 지난 날을 되돌아 보았다.
1968년 11월 대선에서 승리한 리차드 닉슨(1913~1994)은 부인 패트 여사(1912~1993)와 사이에 딸 둘을 두었다. 큰 딸이 트리샤(Tricia 1943~)이고 작은 딸이 줄리(Julie 1948~)인데, 결혼은 작은 딸 줄리가 먼저했다. 1968년 11월 대선에서 아버지가 승리해서 대통령 당선자이던 그 해 12월 뉴욕 맨해튼의 교회에서 스미스 칼리지 2학년이던 줄리는 앰허스트 대학 2학년이던 데이비드 아이젠하워(1948~)와 결혼했다. 신부와 신랑이 겨우 20세로 대학 2학년생인데 결혼을 한 것이다. 신부가 대통령 당선자 닉슨의 딸인데다 신랑은 전직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의 손자였으니 그 결혼식이 얼마나 대단했을지는 충분히 상상이 갈 것이다. (닉슨의 큰 딸 트리샤는 보스턴 칼리지를 나왔는데, 프린스턴 대학을 나오고 하버드 로스쿨을 다니던 에드워드 콕스(1946~)와 1971년에 백악관에서 화려한 결혼식을 갖아서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1968년은 연초에 공산군의 구정 대공세(Tet Offensive)가 있어서 미군은 치열한 전투를 치러서 전사자가 많이 나왔다. 존슨 대통령은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 중지를 명령하고 평화협상을 제안한 후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그 해 6월에는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되는 등 그야말로 1968년은 혼돈과 격동의 한해였다. 자기는 베트남 파병을 간신히 면했지만 동년배들이 베트남에서 싸우다가 죽는 아픔을 느꼈던 존 포거티는 닉슨의 딸과 아이젠하워의 손자가 화려한 결혼식을 올리는 뉴스를 보고 그만 열이 올라서 기타를 잡고 20분 만에 ‘Fortunate Son’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베트남 전쟁을 상징하는 가장 유명한, 불후(不朽)의 로큰롤이 탄생했다.
2차 대전 중 유럽전선을 지휘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대통령을 지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의 아들 존 아이젠하워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웨스트포인트를 나오고 준장으로 예편을 했다. 존 아이젠하워의 아들이 데이비드 아이젠하워인데, 닉슨의 작은 딸 줄리와 결혼을 해서 할아버지가 대통령을 할 때 부통령을 지낸 닉슨의 사위가 된 것이다.
존 포거티는 자기 같은 빈한한 서민층 아들은 베트남에서 피를 흘리는데, 이른바 상류층(establishment)의 아들 딸인 데이비드와 줄리가 화려한 결혼식을 올리는 구조적 모순에 화가 나서 순간적으로 ‘Fortunate Son’을 만들어 낸 것이다. 하지만,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부모나 닉슨의 부모는 존 포거티의 부모와 마찬가지로 빈한한 블루칼러였다. 아이젠하워와 닉슨은 근면하고 공부를 잘 해서 육사와 대학을 갈 수 있었다. 닉슨의 부인 패트 여사도 닉슨처럼 빈한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대학을 고학(苦學)으로 다녀야 했다. 다만 아이젠하워의 부인 매미 여사는 콜로라도의 큰 부자 가문이어서 아이젠하워가 박봉의 장교 생활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되기는 했다. 닉슨의 사위가 된 데이비드 아이젠하워는 대학을 졸업하고 해군 장교로 임관해서 지중해와 유럽에서 복무를 했고, 그 후 조지워싱턴 대학 로스쿨을 졸업했다. 여러 대학에서 강의하고 저술 활동을 한 그는 할아버지에 대한 책을 써서 퓰리처 상도 받았다. 줄리는 불명예스럽게 백악관을 나온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고 닉슨 재단과 기념관 이사를 맡아오고 있다.
존 F. 케네디와 린든 존슨이 미국을 이끌어갈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1960년 대선에서 닉슨이 낙선한데 대해 크게 상심했다. 닉슨이 1968년 대선에 승리하자 아이젠하워는 매우 기뻐했으나 심장이 나빠서 월터리드 육군병원에 입원 중이라서 닉슨의 취임식에는 참석할 수 없었다. 대통령에 취임한 닉슨이 월터리드 육군병원으로 아이젠하워를 찾아가자 아이젠하워는 매우 기뻐했으나 한 달 후에 사망했다. 2차 대전 중 전쟁을 지휘하면서 하루에 담배를 4~5곽이나 피운 아이젠하워는 그로 인해 몇 차례 심장마비를 겪었다.
이상돈, 전 중앙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