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매우 목요일 8년 동안 계속됐던 레이건 대통령과 부시 부통령의 오찬 모습. "레이건이 서거한 후 부시는 자기 인생 중 가장 즐거웠던 추억은 8년 동안 백악관에서 레이건과 같이 했던 오찬이었다고 회고했다. 정장을 한 두 사람이 담소하면서 간단한 점심을 하는 모습에서 이제는 사라져 버린 ‘품위’라는 것을 느낄 수 있지 않은가 한다"
대통령 탄핵심판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개헌을 하자는 논의가 일고 있다. 헌재가 탄핵을 기각한다면 모르거니와 탄핵을 인용하면(즉, 윤석열을 파면하면) 개헌을 할 시간적, 정치적 여유가 없다. 탄핵 논의 중에는 5년 단임 대통령을 4년 중임으로 바꾸자는 주장이 있는데, 나는 그것은 근거가 없다고 본다. 멕시코, 칠레 등 많은 중남미 국가는 단임 대통령이지만 이 나라들이 대통령 중임을 허용한다고 해서 좋아질 이유는 없다.
미국의 경우에도 연임에 성공한 대통령이 두 번째 임기가 처음 임기 보다 더 성공적이었다고 보는 경우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거의 유일하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도 두 번째 임기 중 지지도는 첫 임기 보다 낮았다. 두 번째 임기 중에도 대공황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이 아니었다면 루스벨트가 3선을 할 수 있었을지는 알 수 없다. 반면에 연임에 실패한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은 4년 임기 동안 눈부신 성과를 이룩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스스로 자기가 연임을 하지 않겠다고 했고 그 약속을 지켰으나 임기 중 많은 성과를 이룩했다.
우리나라는 대통령 궐위 시에 60일 내에 대통령 선거를 치르도록 하고 있으며, 새 대통령은 전임 대통령의 잔여임기가 아닌 정규의 5년 임기를 새로 시작하도록 하고 있다. 궐위시 60일 이내 대통령 선출은 87년 개헌 때 그 전의 헌법 조항을 그대로 둔 것이다. 오늘날처럼 정당이 경선을 통해 대선 후보를 결정하고 3주일 간의 대선 운동을 한 후에 선거를 치르자면 60일 이내 대선은 불가능에 가깝다. 다만 탄핵심판이 대략 3개월 걸리기 때문에 그 기간을 이용해서 정당이 후보 경선을 하는 등 준비를 하는 것이다. 유신체제나 전두환의 5공 헌법체제에서 대통령 선출은 체육관에서 하는 간선제였기 때문에 60일 이내 대선이 가능하겠으나 지금과는 도저히 부합하지 않는다.
미국 헌법은 대통령 유고(有故)시에 부통령이 대통령이 되어 잔여임기를 채우도록 되어 있다. 건국 초에 부통령은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에서 2위을 한 사람이었다. 토머스 제퍼슨은 자신의 정적(政敵)이었던 존 애담스 대통령 아래에서 부통령을 지냈다. 제퍼슨은 대통령과 사이가 좋지 않아서 의회가 열리지 않으면 워싱턴에 가지 않고 자신의 저택인 샬러츠빌 몬티첼로에 머물렀다. 제퍼슨이 대통령이 되자 부통령은 뉴욕 출신으로 제퍼슨과 대통령 선거에서 경쟁했던 에아런 버(Aaron Burr)였다. 제퍼슨은 에이런 버를 반역죄로 기소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부통령에 질려버린 제퍼슨은 개헌을 해서 대통령 후보가 부통령 후보를 지명토록 했으니, 이것이 러닝 메이트(running mate)의 기원이다.
미국 부통령의 고유권한은 상원 의장으로 상원 의사를 진행하고 가부 동수일 경우 캐스팅 보트를 행사하는 것이다. 따라서 부통령 공식 집무실은 의회에 있고 별도 집무실을 백악관 건너편 행정건물(Executive Building)에 두곤했다. 대통령이 사망해서 부통령이 대통령이 되면 부통령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만일에 또 다시 대통령에 유고가 발생하면 하원의장이 대통령을 승계한다. 그 다음은 상원 임시의장이고 그 다음이 국무장관이다. 미국 초기의 국무장관은 내정과 외교를 총괄하는 국무총리 같은 직위였다.
원래 미국 헌법은 대통령에 중임 제한을 두지 않았다. 그러다가 1951년 수정 22조에 발효함에 따라 대통령은 두 번만 선출될 수 있게 됐다. 이 조항에 따라 트럼프는 2028년 대선에서 출마할 수 없다. 2016년과 2024년 두 번 선출됐기 때문이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해리 트루먼, 그리고 린든 존슨은 전임자가 사망해서 대통령을 승계했는데, 잔여임기를 채우는 동안에는 부통령이 없었다. 그러다가 1967년에 수정 25조가 발효함에 따라 부통령이 궐위인 경우에 대통령은 부통령 후보를 지명해서 상하원 동의를 얻어서 임명하도록 했다. 1973년 스피로 애그뉴 부통령이 뇌물 사건으로 사임 한 후에 닉슨 대통령은 제럴드 포드 하원의원을 부통령으로 지명해서 의회의 동의를 얻었다. 닉슨이 워터게이트로 사임한 후에 대통령이 된 제럴드 포드는 넬슨 록펠러를 부통령으로 지명해서 의회의 동의를 얻었다.
1987년 개헌 당시 직선과 단임은 개헌 작업 초기부터 합의가 되었고 부통령을 두느냐, 국무총리를 두느냐, 또는 둘을 모두 두느냐를 두고 논의가 있었다. 당시 유력한 후보이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모두가 부통령을 두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부통령을 두지 않기로 하고, 그 대신 대통령에 유고가 생기면 국무총리가 잔여 임기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60일 이내에 대통령 선거를 하도록 했다. 이것이 우리의 현행 제도다.
만일에 우리에게 부통령이 있었다면 아마도 여당은 탄핵위기에 몰린 대통령을 버리고 잔여임기 동안 대통령이 되는 부통령 중심으로 뭉쳤을 것이다. 워터게이트로 위기에 몰린 닉슨을 공화당 지도부가 손절할 수 있었던 것도 그 경우 제럴드 포드 부통령이 대통령이 되어서 공화당 정권이 계속되기 때문이었다.
이런 점에서 대통령제에선 부통령이 필요하다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단임제 대통령제에 부통령을 두게 되면 대통령 임기 초부터 부통령이 차기 권력으로 부상해서 대통령 리더십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그래서 1987년 개헌 때 김대중 김영삼 노태우가 모두 부통령제를 거부했던 것이다.
미국에서 부통령을 국정의 파트너로 삼았던 대통령은 로널드 레이건이 거의 유일했다. 레이건은 부시 부통령을 국가안보위(NSC)에 참여하도록 했고, 특별한 외부일정이 없으면 매주 목요일 점심을 부시와 단 둘이 같이 하면서 대화도 하고 현안에 대해 논의도 했다. 반면에 루스벨트 대통령은 부통령을 아예 만나지도 않아서 해리 트루먼은 루스벨트가 사망하고 별안간 대통령이 된 후에 원자탄 개발이 임박해 있음을 비로소 알았다. 케네디 대통령은 린든 존슨 부통령을 적(敵)으로 생각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닉슨 부통령을 자기 시중을 드는 아이 정도로 생각해서 자기 대신 해외순방 시키고 장례식에나 참석하도록 했다. 닉슨에게 부통령 8년은 대통령을 배우는 정치적 학습기간이었다. 이런 점에서도 나는 로널드 레이건이 훌륭한 대통령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상돈, 전 중앙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