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가 의대 증원을 밀어 붙이면서 내세웠던 황당한 이야기 중의 하나가 그렇게 의사를 늘리면 ‘필수의료’라고 흔히 부르는 과(科)에도 지망자가 몰려들 것이라고 둘러댄 ‘낙수(落水) 효과론’이었다. 그런 수준의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나라 의료 정책을 주물렀다니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의대 증원 파동 후 응급실 위기 문제가 알려지면 이제는 우리의 필수의료가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음이 드디어 알려지게 됐다. 하지만 이런 문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진행되어 왔고, 이제는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든 임계점에 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최소한 2010년부터는 위기에 처한 필수의료 문제를 다루어야 했는데, 정부는 말할 나위 없고 의료계 자체가 이 문제를 사회적 아젠다로 부각시키지 못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전문의료 인력의 공급이 끊기다 시피해서 위기에 처해 있는 분야로는 심장흉부외과, 뇌신경외과, 응급외상(外傷)외과 등이다. 모두 생명이 촌각(寸刻)에 달려 있는 환자를 돌보는 의사들이다. 우리 사회에서 이들은 이제 ‘멸종위기 종자’(‘endangered species')이고, 가장 힘든 직업이면서 사법리스크에 노출되어 있는 가장 위험한 직업(’most dangerous job‘)이다.
반면에 미국에선 이런 분야 의사들은 사회적으로 가장 존경 받는 직업이며, 소중한 사회적 자본으로 보호받고 있다. 미국에서 이런 의사들은 연봉이 10억 원이 훌쩍 넘으며 이들이 혹시 겪을 수 있는 민사책임 문제는 보험회사와 로펌이 알아서 처리해 준다. 사회적 균등주의 정서가 초래한 값싼 의료로 인해 우리나라는 큰 사고를 당하거나 뇌출혈이나 심장마비가 오면 속수무책으로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드려야 하는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다.
외상외과의 허윤정 닥터가 펴낸 <또다시 살리고 싶어서>(2024년 12월 20일 출간)는 이제는 우리 사회에선 사라져 가는 외과의사가 현장에서 직접 겪은 일을 담담하게 써 내려간 에세이집(集)이다. 저자 허윤정은 약대를 나온 약사이면서 의학전문대학원을 거쳐서 남들은 기피하는 외상외과를 택해서 지금은 단국대 병원 권역외상센터의 외상외과 조교수로 있다. 말하자면 우리 사회의 ‘멸종위기 종자’이고, 가장 힘들면서 사법리스크에 노출되어 있는 ‘가장 위험한 직업’에 종사하고 있는 셈이다.
교통사고, 산재(産災) 사고부터 집안에서 발생하는 사고, 폭행 상해 등으로 인해 생명이 위험해서 긴급하게 실려 온 환자를 다루어 온 저자의 생생한 체험이 간결한 문장에 녹아 있다. 현장감이 충만하다 못해 차라리 절규(절규)에 가까운 이 에세이집(集)을 읽고 이런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과연 우리 사회가 허윤정 교수 같은 외과의사가 자신이 선택하고 또 보람을 느끼는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지켜 줄 수 있을까?
책에 나온 구절을 몇 개 소개하기로 한다.
“내가 4년 전에 합류한 이래로 나보다 어린 의사는 추가로 들어오지 않았다. 사실 요즘 누가 외상외과 의사를 하겠는가. 그렇게 남은 우리는 서로의 건강을 염려하며 함께 늙어가고, 지쳐가는 중이다.” (161쪽)
“외상센터를 포함한 한국의 ‘내외산소’(내과, 외과, 산과, 소아과)는 침몰 중이다, 아니, 이미 고꾸라져 대부분이 바다에 처박혔고 끝부분만이 수면 위에 남은 상태라고 보는 게 맞겠다.” (193쪽)
“외상센터에는 원래 전공의가 없다. 센터가 설립된 이래로 한 명의 전공의도 있던 적이 없었다. 늙은 교수들끼리 눈앞에 쏟아지는 환자를 감당하기에도 벅찬 하루하루가 가늘게 이어지는 게 일상이었다.” (197쪽)
“외상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우리나라 의료의 시계는 타임머신을 타고 십 여년 전으로 비가역적으로 회귀를 했다. 껍질뿐인 의료 개혁의 결과물이었다.” (199쪽)
“외상센터 의사로 일하는 모든 순간 동안 나는 교도소 담벼락 위를 걷고 있었다. 자칫 중심을 잃거나 발이 꼬이면 시커먼 담벼락 안쪽으로 영원히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거기서 나를 구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202쪽)
이상돈, 전 중앙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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