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담론>의 허구25–주자학 이념 후계자들이 신영복과 현 ‘좌파 진보’라는 사람들!

수도시민경제 승인 2024.07.03 06:46 의견 0

좌파(左派)와 우파(右派)는 세상을 바라보고 사회를 바꿔나가는 방식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좌파는 급진적인 해결방식을 선호합니다. ‘확 엎어 버리자!’는 식의 구호를 즐깁니다. 우파는 점진적인 해결방식을 선호합니다. ‘세상은 그렇게 확 바뀌는 게 아니다’고 말합니다.

좌파와 우파는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라 상대적인 기준입니다. 기존 질서나 기득권을 옹호하느냐 아니면 변화를 주장하느냐는 시각에서 볼 때는 좌우 개념이 정확하지 않으므로 ‘진보와 보수’로 나누기도 합니다. 좌파와 진보가 동일하지 않고, 보수와 우파도 같지 않습니다. 좌파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진보(進步)는 발전으로, 보수(保守)는 정체(停滯)라는 패러다임에 가두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세계에서 가장 선진국인 미국이나 서유럽의 경우 경제발전을 이룬 세력은 보수였습니다. 보수(保守) 이념은 경제적 자유주의 정치적 합의를 중시하는데, 바로 이러한 생각을 통해 오늘의 번영을 만들어 냈습니다. 서구에서 좌파 이념은 실용주의(pragmatism) 측면에서 효용성이 거의 없기에 소수 지식인의 영역으로 축소됐습니다. 소련의 몰락 이전까지 나름 이름을 날리던 좌파 지식인들이 지금은 ‘역사의 먼지 낀 유골’ 정도로 취급됩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민족주의(nationalism)입니다. 서구에서는 우파가 강한 민족주의 성향을 보이고, 좌파가 반(反)민족주의 성향을 보입니다. 반면에 대한민국에서는 좌파가 폐쇄적인 민족주의 성향을 보이고, 우파가 개방적인 세계주의(글로벌리즘)를 추구합니다. 대한민국 경제 발전은 이처럼 개방적인 세계주의자들 즉 보수 우파 세력이 이뤄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일단 골수 좌파인 신영복은 <담론>에서 다음처럼 얘기하는데, 매우 편협한 시각을 갖춘데다 근거 없는 억지 추론으로 일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의 건국 과정을 몇 가지 관점에서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고려말의 현실입니다. 두 개의 모순이 거의 극한에까지 치달았습니다. 하나는 사회경제적 모순, 또 하나는 민족적 모순입니다. 조선 건국은 이러한 두 가지 모순을 극복하는 정치 과정이었습니다. ...(중략)

모순 극복에는 사상과 주체가 동시에 등장해야 합니다. 사회 변혁은 사상 투쟁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사상 투쟁은 그 투쟁을 견인해 나갈 주체가 있어야 합니다. 성리학의 개혁 사상을 받아들여집니다. 그리고 그것을 추진한 주체가 여러분이 국사 교과서에서 배운 신진사류(新進士類)입니다....(중략)

사회경제적 모순이 토지 중심의 내부 문제였음에 비하여 민족 모순은 외부와의 충돌입니다. ...(중략) 몽골과의 충돌은 몽골 지배로 이어지고 일본과의 충돌은 일제 식민지로 전락합니다. 일본과의 충돌은 실패였고, 몽골과의 충돌은 조선 건국이라는 형태로 우리가 자체적으로 지양해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략)정도전을 비롯한 조선 건국자들은 열린 사고를 가질 수 있었고, 원명 교체기에 대단히 유연한 국가 경영 방식을 취합니다. 중국이 천하의 중심이 아니라 많은 국가 중의 하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유연한 사고가 조선 건국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몽골과의 충돌은 조선 건국으로 지양되었음에 비하여 일본과의 충돌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러나 최근 보수정권의 등장과 함께 한국현대사학회 중심의 뉴라이트에서는 일본과의 충돌이 성공적이었다고 주장합니다. ‘식민지 근대화론’이 그것입니다. 근대화 논의가 간단하지 않음은 물론입니다. 그러나 양자와의 차이에서 결정적인 것은 몽골과의 충돌은 ‘비(非)A’라는 지양의 과정이었음에 반하여 일본과의 충돌은 비(非)A가 아니라 아예 B나 C로 전락했다는 것입니다. 역사의 단절이라 해야 합니다. 국가가 망하고 언어, 전통, 문화가 단절되는 것이었습니다....(중략)”

신영복은 ‘중국이 천하의 중심이 아니라 많은 국가 중의 하나라는 유연한 사고가 조선 건국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했습니다. 역사에 대한 무지(無知)의 극치입니다. 하나의 사례만 들겠습니다. 이성계가 고려를 뒤엎은 다음 새 나라를 세울 때 국호를 어떻게 정했습니까?

<태조실록>을 보면 태조 이성계는 즉위 후 교서를 통해 '나라 이름은 이전대로 고려(高麗)라 한다'고 밝히고, 명나라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명나라에 새 나라의 개국과 태조의 즉위를 알리는 내용의 사절을 보냅니다. 이때 명은 새 나라의 국호는 무엇으로 고쳤는지를 되묻는데, 조선은 이성계의 고향인 '화령(和寧)'과 고대에 존재하였던 국가명인 '조선(朝鮮)' 중에 하나를 택하여 달라고 청하고, 명이 '조선'을 택함으로써 국호가 확정되었습니다. 중국을 떠받드는 이러한 사상이 현재 친중(親中)하는 민주당 사람들, 그리고 ‘중국은 큰 나라’로 칭한 문재인 전 대통령과 그 추종자들의 머릿속에 뿌리박혀 있습니다.

신영복은 뉴라이트의 ‘식민지 근대화론’을 비판합니다. 그 이론의 옳고 그름은 일단 접어두고, 구한말의 상황을 생각해야 합니다. 구한말 조선을 구하고자 했던 뜻있는 지식인들은 일본을 배우려고 했습니다. 일본이 근대화 측면에서 가장 앞섰기 때문입니다. 독립문을 세운 것도 지긋지긋한 중국의 간섭에서 벗어나 새로운 근대 세계로 가고자 했던 열망이었습니다. (중국의 횡포를 알려면 구한말 위안스카이가 조선에서 벌인 행적을 살펴보면 됩니다) 그런데도 신영복은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신영복은 <담화>에서 이렇게 주장합니다. 그는 조선의 사림을 높이 평가하면서 그들의 반대편에 훈구 보수 세력을 놓습니다. 그리고 훈구 보수 세력이 지금까지 이어졌다고 합니다.

“조광조가 죽고 나서 우리나라 개혁 세력들이 일대 반성을 합니다. 패러다임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중앙에서 지방으로, 둘째 정치 투쟁에서 사상 투쟁으로, 셋째 기동전(起動戰)에서 진지전(陣地戰)으로‘라는 일대 전환입니다....(중략) 이러한 패러다임의 전환 이후 정확히 50년 만에 성리학적 가치가 사회적 아젠다로 확립됩니다. 1568년 선조(宣祖)의 즉위는 아무런 정치적 사변이 없었습니다. 불과 50년 사이에 성리학적 가치, 즉 치자(治者)의 양심 문제가 사회적 정의로 공인됩니다....(중략)

그러나 훈구 척신 세력들은 절대로 만만하지 않습니다. 노회한 권모술수에 개혁 사람들이 백전백패합니다. 이것은 현대 정치에도 예외가 아닙니다. 물론 언론이나 사회의 여러 조직들을 장악하고 외세의 지원을 업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개혁파가 도덕적 정의만으로 승부하려고 하는 것에 반해서 보수 우파들은 동원하지 않는 전략전술이 없습니다. 엄청난 기만과 정보를 동원합니다. 기묘사화 때도 훈구파들이 잎사귀에다 꿀물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 쓰고 벌레가 파먹게 해서 그걸 임금한테 갖다 보이게 했다고 합니다. 개혁 사림의 가치가 사회적 공감대를 만들어 내자 훈구 척신들은 재빨리 개혁 이미지 속으로 피신합니다. 변신에 능합니다. ...(중략)

(훈구 보수 세력은) 민족 투쟁에서는 무력하고 비겁한 반면, 국내의 계급투쟁에서는 예의 그 탁월한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정묘 병자 양란을 초래합니다. 역시 훈구 보수 세력은 무능의 극치를 보입니다. 북벌(北伐)을 기치로 내세우며 지배 구조를 유지하기에 급급합니다. 이 시기에 대해서는 지난번에 이야기했습니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로 노론(老論) 세력들은 지금까지 지배 권력으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조선 후기, 일제 강점기, 그리고 해방 이후 군사정권에 이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막강한 보수 구조를 완성해 놓고 있습니다. 물론 배후에 압도적 지원을 업고 있는 것 역시 그때와 다르지 않습니다. ...(중략)”

신영복의 상상력은 정말 대단합니다. 상상력이 아니라 망상력(妄想力)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하지 않나 싶습니다. 인조반정 이후로 정권을 잡은 노론 세력들이 400년이 지난 21세기까지 대한민국의 지배 권력이라는 겁니다. 조금이라도 역사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거짓 주장입니다. 그런데 대한민국 좌파라는 사람들은 이런 주장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면서 자신들을 반일(反日)했던 사람이란 식으로 자리매김합니다. 혹시라도 이런 주장에 현혹되는 사람은 함재봉 전 연세대 교수의 <한국인의 탄생>을 책이나 유튜브를 통해서 반드시 접해보기를 권합니다.

함재봉 교수는 1910년 조선이 일본에 합병된 이후 9년 후인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누구도 조선 왕정의 부활을 주장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그러면서 조선이 망하면서 '조선사람'과 구분된 한국인이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함 교수는 다섯 가지 부류를 제시하는데, ‘친중 위정척사파, 친일 개화파, 친미 기독교파, 친소 공산주의파, 인종적 민족주의’라는 5개 부류입니다. 역사 속 그리고 현재의 한국인들은 하나의 종류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둘 이상에 해당한다고 보는 겁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발전을 이끈 세력은 누구일까요? 이승만(친미 기독교파)과 박정희(친일 개화파) 등이 주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한미동맹을 통해 대한민국 안보를 만들고, 대일 수교를 통해 차관을 들여와 경제 기적을 만들어갑니다. 함재봉 교수는 한 인터뷰에서 “(친미 기독교파를 보면) 개신교가 조선에서 근대적 인간이 등장하는 데 어떻게 일조했는지 분석했다. 칼뱅주의 영향 속에서 개신교를 수용한 사회는 자유주의 정치와 시장경제로 나아가게 마련이다. 네덜란드와 영국, 미국이 대표적 사례다. 19세기 말 형성된 조선의 친미 기독교파도 마찬가지다. 일제강점기를 지나 대한민국 건국까지 이 땅에 근대성이 뿌리내리는 데 기여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들이 대한민국의 보수 우파의 주류를 이루는데, 신영복의 주장과 달리 이들은 결코 훈구 보수 세력의 후예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좌파 진보의 뿌리는 어디일까요? 바로 친중 위정척사파, 친소 공산주의파, 그리고 인종적 민족주의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그들입니다. (물론 우파도 당연히 민족주의 성향을 지닙니다. 대한민국을 응원하는 데 좌우가 없는 셈이지요.) 함재봉 교수는 <주간 동아> 인터뷰에서 “586세대는 1980년대 민주화를 울부짖었다. 상당수는 NL(민족해방)이니 PD(민중민주)니 하는 이념 투쟁에만 골몰했다. 심지어 북한을 신봉하는 주체사상에 빠지기도 했다. 586세대 정치인들이 그런 이념을 버렸어도 젊은 시절 익힌 편협한 세계관의 영향은 무시할 수 없다. 조선 말 친중 위정척사파의 협애한 가치관과 닮은꼴이다. 여기에 인종적 민족주의까지 결합했다. 미국·일본에 대한 반감, 중국·북한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그것이다. 지금 남북한이 하나라고 볼 근거는 이른바 ‘피(血)’밖에 없다. 이념과 사고방식이 전혀 다르다. 북한은 지금도 한국을 핵폭탄으로 말살하겠다고 벼른다. 그럼에도 어떤 이는 통일을 낭만적으로만 바라보고 북한 정권에게 뭔가 베풀고 싶어 한다. 인종적 민족주의의 폐해다. 중국에 굴종적 태도를 보이는 것도 친중 위정척사파와 같은 현실 오판이다.”라고 말합니다.

신영복의 사고방식을 보면 세상을 전혀 몰랐던 위정척사파의 전형적인 후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정척사파의 시조(始祖)라 할 수 있는 화서 이항로는 인욕(人慾) 중에서 가장 폐단이 많은 것을 통화(通貨)와 통색(通色, 자유연애)라고 했습니다. 그는 통화에 의한 이익추구를 철저하게 반대했으며, 상품매매는 매매자 한편의 일방적인 이익만 추구한다며 부정적으로 보았습니다. 이항로는 “중국의 도(道, 공자의 도)가 없어지면 이적(夷狄)과 금수(禽獸)가 밀려오는 것이다. 북쪽 오랑캐는 이적인지라 오히려 말할 수 있지만 서양은 금수인지라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신영복이 <담론>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자본주의는 화폐 권력이다’ ‘화폐 권력은 허상이다’라는 주장을 하는데, 화서 이항로의 생각과 비슷합니다. 그의 엉터리 역사 인식, 비뚤어진 세상 인식의 수준이 이 정도라는 사실을 대한민국 국민이 잘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코라시아, 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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