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담론>의 허구 21 – ‘상품과 자본’을 비난하면서 사회주의 모순과 처참에는 침묵

수도시민경제 승인 2024.06.28 12:08 | 최종 수정 2024.06.28 12:25 의견 0

신영복의 <담론>은 뒤로 갈수록 자유시장경제(좌파는 굳이 자본주의라고 주장)에 대한 적개심을 더욱 강력하게 드러냅니다. 자신이 마음의 양식으로 삼은 <자본론>의 시각으로 세상을 봅니다. 마르크스가 쓴 <자본론>은 1867년에 나옵니다. 서구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경제가 한창 발전하던 시기였으며, 한국과 중국과 일본 등 아시아권은 시장경제가 무엇인지도 모를 때였습니다. 19세기에 책상에서 쓰인 <자본론>의 내용은 당시에도 현실성이 매우 떨어졌고, 당연히 21세기 현대 세계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신영복은 무려 150여 년 전의 19세기 낡아빠진 사회주의 이념으로 21세기 대한민국과 세계를 해석합니다. 고루(固陋)하기 그지없는 사람을 ‘양심 있는 지식인’으로 존경한다는 사람들(문재인과 좌파 지식인, 좌파 이념의 민주당 사람들)의 머리가 참으로 의심스럽습니다. 신영복을 존경한다는 사람들이 대한민국을 이끌고 정책(소득주도성장, 과도한 최저임금 인상, 반(反)기업 입법 등)을 펼쳤으니 그 결과가 좋았을 리가 없었고, 지금 대한민국은 경기 부진, 자영업자 몰락과 사회 분열 등 극심할 정도로 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신영복의 <담론> 가운데 ‘상품과 자본’이라는 글이 있는데, 좌파 사회주의 신영복과 반(反)대한민국 신영복의 민낯을 볼 수 있는 글의 연속입니다.

“상품 사회에서는 인간의 정체성이 소멸됩니다. 등가물(等價物)로서의 구두가 나중에 일반적 등가물이 됩니다. 조개 껍질, 면포, 금, 은이 그 지위를 이어받습니다. ‘제너럴 이퀴벌런츠(general equivalents)’입니다. 일반적인 등가물이 곧 화폐입니다. 상품의 가치 표현 형태는 등가물 → 일반 등가물 → 화폐라는 과정을 거쳐 왔습니다. 구두가 화폐의 지위에 오르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좌우항의 권력이 역전됩니다. 제너럴(general)이란 장군(將軍)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권력이 됩니다. 화폐가 출현하면 상품구조로부터 화폐 구조로 전환됩니다. 화폐는 상품의 아들이었지만 이제는 상품으로부터 독립하여 그것을 지배하는 상품의 주인으로 군림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건은 상품이 지배하고, 상품은 화폐가 지배합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상품 사회이고 상품의 최고형태가 화폐입니다. 화폐가 최고의 상품입니다. 모든 상품은 화폐로 교환되기를 원합니다. 화폐로 교환되지 못하는 상품은 가치가 없습니다. 화폐로 교환되지 못한다는 것은 팔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팔리지 않는 물건은 가치가 없습니다. 그 물건을 생산하는 노동도 가치가 없습니다. 그것의 생산과 관련된 기술이나 학문도 가치가 없습니다. 한마디로 ‘화폐 권력’입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일입니다. 공장이 도산하는 것은 물론이고 학과가 폐지되고 교수가 해직됩니다. 모든 것은 화폐 가치로 일원화됩니다.”

신영복은 ‘팔리지 않는 물건은 가치가 없다’며 ‘상품 사회(자본주의 사회)’를 깎아내립니다. 상품 사회가 비정(非情)하다는 겁니다. 과연 그럴까요? 생산을 통해 만들어진 물건은 제품(製品)과 상품으로 구분됩니다. 사회주의 계획경제든 민주주의 시장경제든 물건을 만듭니다. 다만 사회주의는 제품을 만들고, 민주주의는 상품을 만듭니다. 제품은 소비자의 욕구와 관계없이 만들어지고, 상품은 소비자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만들어집니다. 그러다 보니 사회주의 계획경제는 쓸모없는 제품을 마구 만듭니다. 자연스럽게 자원의 낭비가 극심합니다. 민주주의 시장경제는 쓸모있는 제품을 만드니, 자원 이용의 효율성이 높아집니다. 신영복의 뒤틀린 생각은 이상한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계속 읽어보시지요.

“이러한 화폐 구조에서 일반적 등가물을 생산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무 걱정이 없습니다. 자기 생산물을 화폐와 바꿀 필요가 없습니다. 이처럼 자기 생산물이 일반적인 등가물인 경우에 행사하는 권력을 세뇨리지(seigniorage)라고 합니다. 자세한 설명을 드리지 못합니다만 실제로 세뇨리지 권력을 행사하는 나라가 있습니다. 미국입니다. 미국은 달러를 찍어내면 됩니다. 금융위기 이후 계속 찍어내고 있습니다. 양적완화(quantitative easing)이라는 표현 자체가 대단히 기만적입니다. 부도난 카지노를 폐쇄하는 대신 계속해서 칩을 공급하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오바마의 선거 구호가 ‘we can make change’였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이러한 구조는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미국은 UN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라크를 침공했습니다. 이라크 침공의 납득할 만한 이유와 명분은 없습니다. 알카에다의 배후도 아니고 대량살상무기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달러 헤게모니를 방어하기 위한 전쟁이라는 것이 국제정치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입니다. 이란, 베네수엘라, 이라크 등은 이미 외환 보유를 유로로 하고 있습니다. 이라크 후세인 정권이 석유 결제 화폐를 유로로 바꾸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도미노가 되어 산유국의 석유 결제 화폐가 유로로 바뀐다면 달러 가치의 폭락은 불보듯 합니다. EU의 지도국인 독일과 프랑스는 끝까지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반대했습니다. 유로가 결제 화폐이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화폐 구조는 권력이며 그 자체가 허구입니다. 칼 폴라니(Karl Polanyi)가 상품화하지 않아야 하는 세 가지로 자연, 인간, 그리고 화폐를 들었습니다. 자연과 인간은 우리가 생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화폐는 실물이 아니라 시스템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바와 같이 상품 사회는 화폐 권력이 지배하고 화폐 권력은 그 자체가 허구입니다. 상품 사회에서는 단지 인간의 정체성의 소멸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삶의 토대 자체가 공동화(空洞化)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영복은 자본주의를 공격하면서 반미(反美)도 잊지 않습니다. ‘미국은 참 나쁜 나라’라는 주장을 끊임없이 되풀이합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얘기하면서 구소련의 아프카니스탄 침공, 중국의 베트남 침공과 주변국과의 갈등 등은 일절 언급하지 않습니다. 대표적인 ‘선택적 비난’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는 상품 사회를 비난하면서 ‘삶의 토대의 공동화(空洞化)’를 초래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신영복이 주장하는 ‘삶의 공동화’는 민주주의 시장경제가 아니라 사회주의 계획경제에서 벌어졌습니다. 구소련과 동유럽, 중국과 북한, 사회주의 베트남과 쿠바에서 인간의 삶은 정말 비참했습니다. 신영복 같은 좌파 지식인들은 자본주의를 욕하면서도 이러한 사회주의의 처참한 모습은 말하지 않습니다.

신영복은 게다가 ‘화폐는 시스템이고, 화폐 권력은 허구’라고 말합니다. 금융과 실물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것이며, 시장경제 발전의 주요 동인 가운데 하나가 금융 발전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무지의 소산입니다. (윌리엄 번스타인의 <부의 탄생(The Birth of Plenty)이란 책에 잘 나와 있습니다.)

신영복의 무지(無知)는 블라디미르 레닌의 무지(無知)와 닮은 것 같습니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전체 금융제도는 국가 소유가 되었습니다. 중앙은행과 다양한 특수은행(투자은행, 외국 교역은행, 일반대중을 위한 저축은행 등)이 존재했으나 실제로 이 은행들은 중앙은행의 지시에 의해 통제되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레닌은 “가장 큰 은행, 모든 농촌 지역과 공장 등에 지부를 갖고 있는 단일 국가 은행이 사회주의 기구의 10분의 9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국가 전체 단위의 회계 업무, 국가 전체 단위의 생산과 상품 분배를 관할하는 회계가 될 것이다”라고 예견했습니다. 레닌은 ‘금융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자원의 효율적 배분’이라는 사실을 몰랐고, 그 결과 사회주의 체제의 자원 낭비는 극심했으며 경제가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신영복도 이런 수준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했다고 하겠습니다.

신영복은 다음 글은 정말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좌파 지식인, 김일성의 주체사상에 물들었든 과거 운동권 출신들도 어이가 없어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신영복을 존경한다고 하니 그 모습이 가관입니다.

“소비를 통하여 자기 정체성을 만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인간적 정체성은 소비보다는 생산을 통하여 형성됩니다. 의상으로 인간적 정체성을 만들어 내지는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포장된 것과 정체성을 구별하지 못합니다. 우리들의 정서 자체가 포획되어 있습니다. ...(중략)

우리의 삶은 압도적인 부분이 사람들과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관계야말로 궁극적 존재성입니다. 자신을 개인적 존재로 인식하는 사고야말로 근대성의 가장 어두운 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유롭고 주체적인) 개인의 발견’이 근대사회의 문을 열었는데 그 부분을 무시합니다. 이 부분은 나중에 다시 다룰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중략)

우리가 잘 아는 경제원칙은 ‘최소의 희생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는 것’입니다. 참으로 비인간적인 생각입니다. ‘최대의 희생으로 최소의 효과를 얻는 것’이 훨씬 더 인간적입니다. 고뇌와 방황이 좌절이 인간을 얼마나 성숙하게 하는지에 대하여 경제원칙은 무지합니다. 소비가 미덕이라는 구호도 비인간의 극치입니다. 단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최대의 소비는 전쟁입니다. 전쟁이야말로 미덕이 된다는 역설입니다. 지금 그것이 현실이기는 합니다.

상품이 우리에게 던지는 성찰의 메시지는 한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를 이해하는 키워드로 삼고 있습니다. 소비와 소유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소비와 소유는 자기가 생산한 것에 한해서 인정됩니다. 그리고 소비하지 않는 것에 대한 소유는 인정되지 않습니다. 생산과 점유와 소비는 하나였습니다. 자기가 생산하고 자기가 점유하고 있는 한에 있어서 소비와 소유가 인정됩니다. 나중에 소비하기 위한 저축 행위와 자기가 필요하지 않은 것을 사는 것과 바꾸는 교환 행위도 인류사에서는 훨씬 후기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생산하거나 소비하지 않음은 물론 점유의 주체가 될 수 없는 죽은 사람까지도 소유권을 행사합니다. 상속권입니다. 최고 형태의 소유권입니다.”

‘최대의 희생으로 최소의 효과를 얻는 것’이 인간적이라는 대목이 저를 깜짝 놀라게 합니다. 신영복의 주장처럼 수많은 사람을 희생하면서 인간의 삶을 처참하게 만든 사회가 사회주의 소련, 마오쩌둥의 중국,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의 북한입니다. 신영복은 아마 그런 사회가 좋은 사회였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지금 와서 약간의 아쉬움이 있다면 1970년대 북한이 신영복의 북송(北送)을 원했는데, 신영복의 생애 말년에 그를 북한으로 보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겁니다. 그랬다면 신영복은 죽을 때까지 ‘사회주의 만세!’를 외쳤을까요??

코라시아, 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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