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담론>의 허구16–마르크스의 계급주의적 역사관의 신봉자!!

수도시민경제 승인 2024.06.25 16:04 | 최종 수정 2024.06.25 16:35 의견 0

정치적으로 좌파는 ‘급진적·혁신적 정파’를 뜻하고, 우파는 ‘점진적·보수적’ 정파를 뜻합니다. 좌파는 세상을 급격하게 바꾸려 하고, 우파는 급격하게 바꾸는 건 어려우니 조금씩 바꿔 나가자고 합니다. 그렇다면 세상은 어떻게 변해가는 걸까요?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다’는 말처럼 세상의 변화는 하루 아침에 이뤄지지 않습니다. 서울대 공대의 교수 26명이 쓴 <축적의 시간>이란 책이 있습니다. 한국에 신산업이 부족한 이유는 아이디어의 부족이 아니라 이를 다듬고 확장하는 ‘scale-up’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축적의 시간>의 대표 저자인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는 언론 인터뷰에서 다음처럼 말합니다.

“대한민국은 장단점이 분명합니다. 먼저 단점은, 한국은 기존에 없던 새로운 것을 만들어 혁신을 주도해본 적이 없습니다. 지난 70년 동안 해외에서 선보인 제품이나 이론을 적극적으로 수입하고 해석해서 기능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습니다. 경로 밖의 것을 해본 경험이 거의 없기에 ‘독창성’의 사례를 찾기가 어렵죠.

반면 분명한 장점은, 이렇게 단기간 안에 폭발적인 성장에 성공한 국가는 한국뿐입니다. 1인당 국민소득이 100달러에서 반세기 만에 3만 달러를 달성했지요. 내로라하는 선진국도 400년가량 걸린 과업을 단숨에 해결한 겁니다. 오로지 우리나라의 노하우이자 비결이기에 외국에선 매우 흥미로워해요. 이번에 영국 옥스퍼드를 통해 펴낸 책도 이와 관련된 것입니다.”

좌파는 ‘한국의 경제성장 과정에 대한 자부심’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경제발전의 주역들도 깎아 내리기 바쁩니다. 사회주의(공산주의)적 사상이나 경향을 가진 인물이나 단체들은 ‘경제 발전의 성과물’은 향유하면서도 ‘경제 발전의 모습’에 혐오감을 보입니다.

지난 이야기(15회)에서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신영복은 감옥에서 석방 직후 월간지 <말>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속마음을 털어놓았습니다. “통혁당 가담은 양심의 명령 때문이었다. 난 사상을 바꾼다거나 동지를 배신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신영복은 <담론>에서 반(反)경제발전, 반(反)시장경제, 반(反)자본주의 성향을 여실히 드러냅니다. ‘시안견유시(豕眼見惟豕) 불안견유불(佛眼見惟佛)’ 즉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가 보인다’는 말을 생각하게 합니다. 다음은 <담론>의 글입니다.

“북악산으로 신년 산행을 한 적이 있습니다. 산 정상에서 신년 소회를 이야기하면서 산이 최고의 조망대라는 것을 실감합니다. 우선 발아래로 경복궁, 창덕궁이 보입니다. 조선조 500년의 권부(權府)입니다. 그곳은 국문과 처형, 역모와 주살의 현장입니다. 멀리 빌딩으로 가득 찬 서울 시가지가 보입니다. 서울 땅이 꺼지지 않을까 걱정될 만큼 건물들로 가득합니다. 국가정책까지도 기획하는 토목 건설 자본의 막강 권력입니다. 그리고 빌딩마다 있을 임자들이 보입니다. 부자 권력입니다. 그러나 절반은 은행 대출입니다. 금융자본의 권력입니다.”

신영복은 진짜 이해하기 힘든 시각, 세상을 바로 보지 않고 뒤틀어서 보는 시각을 지녔기에 옛 고전에 나오는 ‘향원(鄕原)’같은 모습입니다.

공자는 <논어(論語)>에서 "향원은 도덕의 적이다(鄕原德之賊也)"라고 말하고, 맹자는 이를 좀 더 구체화했는데 향원이란 말은 사이비 유덕자, 즉 "덕이 있는 사람과 겉으로는 비슷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닌 사람"이란 뜻입니다. 전국시대에 향원이라는 말 자체의 뜻은 ‘무리의 으뜸’이라는 뜻으로 실제로 인문지식도 많고 대중 인지도가 높으며 인기가 많은 사람들을 향원이라 일컬었습니다. (신영복 비슷한 사람입니다) 공자와 맹자는 당대 향원들이 겉으로는 고결한 척하고 뒤에서 더러운 짓을 한다고 공격했습니다.

공자가 노(魯)나라 정공(定公) 때 형법을 책임진 사구(司寇)가 돼 국정에 참여하게 되자 7일 만에 소정묘(少正卯)를 처형했습니다. ‘순자(荀子)’를 비롯한 여러 출전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제자들도 깜짝 놀라 공자에게 물었더니 다음처럼 대답합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그 까닭을 말해주겠다. 사람에게 악한 것이 다섯 가지가 있는데 도둑질(盜竊)은 그중에 포함되지 않는다. 첫째는 마음이 두루 통달해 있으면서도 음험한 것, 둘째는 행실이 편벽되면서도 고집스러운 것, 셋째는 말에 거짓이 있으면서도 그럴싸하게 말을 잘하는 것, 넷째는 알고 있는 것이 추잡스러우면서도 박식한 것, 다섯째는 그릇된 일을 일삼으면서도 겉으로는 그럴싸해 보이는 것이다. 무릇 어떤 사람이 이 다섯 가지 중에 한 가지만 갖고 있어도 군자의 처형을 면할 수 없을 것인데 소정묘는 이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사는 곳에는 따르는 자들이 모여 무리를 이루었고 그의 말은 사악함을 꾸며 여러 사람의 눈을 속일 수 있으며 그의 실력은 올바른 사람을 반대하면서 홀로 설 수 있는 정도였다. 이런 자는 소인들의 걸웅(桀雄)이라 할 수 있으니 처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신영복은 언어도 독자들이 잘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매우 묘하게 비틀어 씁니다. ‘계층’보다는 ‘계급’이란 말을 내세웁니다. 계급은 전근대 용어입니다. 법(예, 신분), 종교, 의례적 절차(인도의 카스트) 등에 의해 정해진 신분이 평생 거의 변하지 않습니다. 조선시대의 양반, 상민, 노비나 인도 카스트(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 불가촉천민 등)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고대 사회의 시민과 노예도 계급입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개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신분 상승이 어렵습니다.

반면에 계층은 근대와 현대의 용어로 대체로 경제력의 차이에 의해 결정됩니다. 부유층, 중산층, 하류층(빈곤층) 등으로 부릅니다. 본인이 노력하면 하류층에서 부유층으로 언제든지 이동할 수 있고, 그런 사례도 많습니다. 대한민국은 불과 50년 전만해도 국민 대다수가 빈곤층이었으나 지금은 대다수가 ‘중산층 혹은 부유층(글로벌 기준)’이 되었습니다. (동남아나 남아시아 근로자가 국내에서 몇 년 일하다가 돈을 모아서 고국으로 돌아가면 중산층 이상으로 신분이 올라갑니다. 그래서 그들은 ‘코리아 드림’을 꿈꾸며 한국으로 옵니다)

신영복은 이러한 사실을 애써 감추고 계급이라는 용어를 즐겨 씁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조선시대 같은 신분사회가 아닌데도 그렇게 말합니다.(현재 민주당이나 조국혁신당 사람들 그리고 좌파 지식인들이 신영복처럼 계급이란 망을 즐겨 사용합니다.) 그러면서 계급 투쟁을 했던 사회주의자(공산주의자)를 높이 평가합니다. 은근히 사회주의자들의 ‘계급 투쟁’을 부추깁니다. 그가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의 정치인과 기업가를 존경한다는 말은 거의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다음은 <담론>에 쓴 글입니다.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한 법입니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적 연대가, 실천적 연대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 더욱 중요합니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입니다.

이 글을 읽은 많은 독자들이 입장을 계급의 의미로 읽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입장은 물론 중요합니다. 그래서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라고 합니다. 그러나 내가 우려하는 것은 입장이 협소한 의미로 읽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계급적 입장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면 안 된다는 얘기를 오늘 하려고 합니다. ...(중략)

내가 입장의 동일함을 계급의 의미로 좁게 읽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계급은 생산에서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을 의미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과 노동의 관계는 결정적입니다. 경제적 계급은 그 위력이 경제적 범주에 국한되지 않고 문화와 인간을 규정할 정도로 위력적인 것이 사실입니다....(중략)

프란츠 파농과 체 게바라는 계급적 입장을 뛰어넘은 사람들입니다. 역사에는 계급적 입장을 뛰어넘은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학생은 자신이 소속한 사회적 계급이 없습니다. 아직 계급에 편입되지 않았습니다. 지식인도 마찬가지로 사회적 계급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식인은 계급을 스스로 선택하는 계급입니다. 그런 점에서 계급을 뛰어넘는 존재입니다. 대학 4년은 계급을 고민하는 시기입니다. 자기가 함께할 계급을 선택하기 위한 공부와 고민을 해야 하는 시기입니다. 졸업 후에는 대체로 아버지의 계급으로 편입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여기부터 다음 문단까지 은근히 계급투쟁을 부추기는 대목입니다)

중국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저우언라이도 귀족 집안 출신입니다. 근공검학(勤工儉學)이기는 하지만 프랑스 유학생입니다. 은래(恩來)라는 이름은 조부가 황제로부터 승진의 은총을 받은 날에 태어난 것을 기념해서 지은 이름입니다. ‘은혜가 왔다’는 뜻입니다. 마우쩌둥과 체 게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오는 장사(長沙) 사범대 출신입니다. 게바라도 의사입니다. 게바라는 1967년 볼리비아에서 처형당했습니다. 그 보도를 접한 친구들이 만들었던 명동 술자리가 기억납니다. 프란츠 파농도 정신과 의사였습니다. 의사로서의 사회적 기득권을 포기하고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에 투신합니다. 그 역시 1961년 우리들의 대학 시절에 병사였습니다.”

신용복의 민낯은 ‘마르크스의 계급주의적 역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얼굴입니다. 그런 신영복을 존경한다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사회주의 이념, 계급주의적 사고’에 물들게 됩니다.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를 사랑하고 지켜나가려는 사람들은 지금이라도 ‘신영복의 감춰진 민낯’을 알고, 그의 이념과 사상이 대한민국을 물들이지 않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코라시아, 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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