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년 전인 1905년 11월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당하는 을사늑약 체결 당시 을사오적

엊그제가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 120년 되는 날이었다. 을사년에 강제로 맺어진 조약이란 의미에서 ‘을사늑약’이 공식적으로 쓰이고 있으나 문맥에 따라선 곤란한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됐다”고 쓴다면 ‘서울역전(驛前) 앞’ 같은 표현이 되고 만다. 실제로 이런 표현은 자주 발견되곤 한다.

60년 전인 1965년 을사년은 한일협정과 월남(남베트남)파병으로 정국이 혼란스러웠다. 당시 야당이던 신민당은 한일협정을 ’제2의 을사조약‘이라고 부르면서 극렬하게 반대했다. ‘민족적 민주주의’를 내걸고 쿠데타를 일으킨 세력이 일본과 ’관계 정상화’를 추구했으니 야당의 질타를 받을 만도 했다. 대학가와 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체결된 1965년 한일협정은 문화 측면에서도 변화를 가져왔다. 일본어를 가르치는 학원이 늘어났고, 거리에 ‘일식집’ 간판이 나붙기 시작한 것으로 나는 기억한다. 그 전까지는 ‘화식(和食)’이라고 부르는 고급 식당이 있었을 뿐인데, 중국음식을 뜻하는 ‘화식(華食)’과 발음이 같고 일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아서 통상적으로 ‘왜식(倭食)’이라고 불렀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는 서울 중심가에 있던 호텔의 화식(和食) 식당이 메뉴를 일본어로 병기(倂記)했다가 경찰의 조사를 받은 적도 있었던 것으로 나는 기억한다. (요즘은 주로 ‘일식’이란 표현을 쓰는데, 그 한자가 ‘일식(日式)’이어야 맞을 것 같다.)

전쟁이 끝나면 ‘평화협정’이란 조약이 체결되는데, 패전국의 입장에선 완전히 비(非)자발적이고 굴욕적인 조약일 뿐이다. 그래서 패전국은 이런 조약을 언급하는 자체를 회피한다. 전쟁 후에 맺어진 조약에 영토 할양 조항이 들어가 있으면 특히 그러하다. 1848년 2월, 미국과의 전쟁에서 완패한 멕시코는 치욕적인 조약에 서명하고 텍사스 독립과 오늘날의 네바다, 유타, 콜로라도, 애리조나, 뉴멕시코, 그리고 캘리포니아에 대한 미국의 지배를 인정해야만 했다. 멕시코는 그 전쟁이 너무 치욕적이라서, 그리고 미국은 그 전쟁이 너무 성공적이라서 언급을 하지 않는다. 멕시코의 입장에선 그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이 남북전쟁이란 비극을 당한 데서 위안을 삼았을 것이다.

미국-멕시코 전쟁을 통해 남부 영역이 늘어난 것이 남북전쟁을 야기한 한 원인이기도 하다. 이에 비하면, 을사늑약은 전쟁은커녕 전투도 한번 치르지 않고 백기를 든 ‘조약’이니 국력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가를 잘 보여주었다고나 할까. 늑약은 제5조에서 왕족의 신분과 안녕을 보호한다는 조항을 두어서 ‘제국’이라는 나라는 망해도 그 왕족과 지배계층은 번영했으니 그것은 또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상돈, 전 중앙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