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법어학교 개교시 에밀 마르텔과 학생들, 갑오개혁으로 상투를 자르는 단발령이 1895년 11월에 내려지기 전이라서 학생들은 상투머리를 하고 있다. 단발령을 밀어부친 사람은 유길준 내무대신이었다. 그리고 불과 몇 달 후 아관파천이 발생해서 유길준은 또 다시 일본으로 피신해야 했다.
양화진 외국인 묘지는 그곳에 안장된 에밀 마르텔(Emil Martel 1874~1949)을 “약관의 나이에 한국에 와 55년 동안 살면서, 한국을 조국같이, 한국인을 동포처럼 사랑한 교육자”라고 소개한다.
1874년 프랑스에서 프랑스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마르텔은 청나라와 일본에 나와서 사업을 하던 아버지를 따라서 청나라와 일본에서 소년기를 보냈다. 일본어와 중국어를 할 줄 아는 마르텔은 텐진(天津)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고 프랑스로 돌아가서 생 에띠엔느 광산학교 예과를 졸업했다.
그런 후 상해(上海) 해관(海關)에서 일하다가 1894년 7월 새로운 기회를 찾아 조선에 와서 제물포에서 무역업에 종사하던 중 1895년 초 한성법어학교 교사로 초빙되어 1911년에 법어학교가 폐지될 때까지 16년 동안 조선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고 고종의 궁내부에서 외국인 고빙(雇聘)으로 여러 가지 일을 했다. 1905년 2월 마르텔은 자신처럼 조선에서 활동하던 독일인 음악가 프란츠 에케르트(Franz Eckert 1852~1916)의 장녀 아말리에(Amalie)와 결혼했다.
독일 해군군악대장으로 일하던 에케르트는 일본 정부로부터 외국인 고문으로 초청되어 1879년 3월 일본에 도착해서 일본 국가(기미가요)를 작곡해서 1880년 11월 메이지 천황 생일에 처음으로 공연했다. 에케르트는 20년 동안 일본에 있으면서 여러 음악활동을 했으며, 일본 여자와 결혼했다. 그는 1899년에 독일로 돌아갔는데, 얼마 후 대한제국의 초청을 받고 이듬해인 1900년 조선에 도착했다.
에케르트는 시위연대 군악대장으로 궁정군악대를 훈련시키고 ‘대한제국 애국가’를 작곡했다. 그는 매주 목요일 파고다 공원에서 군악대 연주를 해서 서양음악을 한국민에 알리는 데 기여했다. 1916년 사망한 그는 양화진 묘지에 안장됐다. 한일합병 후 총독부는 그가 작곡한 ‘대한제국 애국가’를 금지하고 기미가요를 한국민에게 강요했는데, 기미가요 역시 에케르트가 작곡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에밀 마르텔은 어머니가 일본 여자였으며 독일 아버지와 일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여자와 결혼했으니 혈연으로 본다면 일본과 깊은 관련이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마르텔은 모국 프랑스로 돌아가서 참전하고 전쟁이 끝난 후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다. 마르텔은 광업을 공부하고 무역애 종사했기 때문에 교육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으나 그는 한성법어학교에서 열의를 갖고 프랑스어 교육에 임했다.
1886년 조불(朝佛)수호조약에 체결된 후 프랑스는 조선에 자신들의 영향력을 증대하고 광산 등에서의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프랑스 공사로 부임한 르페브르(G. Lefevre)는 프랑스어를 가르칠 학교를 한성에 설립할 것을 주장해서 1895년에 한성법어학교가 설립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조선의 광업과 해관(海關)에서 프랑스가 많은 역할을 하기를 원한 르페브르 공사는 광업과 해관에 경험이 있는 프랑스 사람을 조선 조정에 고문관으로 천거하고자 했는데, 조선에 들어와서 바로 그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에밀 마르텔이 적임자임을 알게 됐다. 이렇게 해서 마르텔은 르페브로 공사의 천거로 대한제국의 프랑스 고문으로 일을 시작했고, 한성법어학교가 개교하자 역시 르페브르의 추천으로 프랑스어 교사로 부임했다.
마르텔은 교육에 관한 경험과 소양은 없었으나 기꺼이 교사로 부임해서 학생들에게 프랑스어를 열심히 가르쳤다. 그는 학습 도구와 운영비가 부족하면 직접 자신이 프랑스에 연락해서 지원을 얻어오는 등 교사 이상의 역할을 했다. 이렇게 해서 한성법어학교가 매우 좋은 평가를 받았다. 더구나 당시는 프랑스가 광산 등 여러 분야에서 조선에 진출하려는 의욕이 넘쳐서 프랑스어에 대한 수요가 많았다.
이처럼 마르텔은 한성법어학교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면서 동시에 외국인 고빙으로 궁내부에서 일했는데, 고종은 마르텔을 신임했다. 대외적으로 중립화 정책을 내세운 고종은 처음에는 미국에 기대했으나 미국이 관심을 보이지 않자 프랑스에게 의존하고자 했다. 고종은 중국어와 일본어를 하는 에밀 마르텔을 불러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으며, 박문원(博文院) 찬의(贊議)로 임용했다.
박문원은 국내외 신문 잡지를 보관할 목적으로 1902년에 설치된 기관인데, 현상건(玄尙健 1875~1926)이 부장을 맡았다. 고종은 한성법어학교에서 프랑스어를 배우고 영어와 러시아어도 할 줄 현상건을 신임했다. 이처럼 고종은 프랑스를 통해서 일본과 청나라의 영향을 배제하려고 했으며, 마르텔은 일본의 영향력을 배제하고자 하는 고종의 신임을 얻어 민감한 외교 문제에도 간여했다. 1899년 청나라에서 의화단(義和團) 사건이 발생하자 고종은 마르텔을 텐진에 보내서 사정을 파악하고 보고하도록 했다.
고종은 러시아의 힘을 빌려서 일본을 억제해 보려는 생각을 가졌고 이에 부응해서 친러파이던 이용익(李容翊, 1854~1907)을 필두로 이학균, 현상건 등이 주도하고 마르텔, 볼얀 등 몇몇 외국어학교 교사들이 참여해서 ‘전시 중립화 선언’을 준비했다. 고종의 밀사로 유럽을 방문 중인 현상건은 전 주한 러시아 공사 베베르에게도 고종의 밀서를 전달했고, 뤼순에 들러 알렉시에프(E. I. Alexeev) 극동 총독을 만나고 1904년 1월 11일 러시아 군함 편으로 귀국했다. 그리고 열흘 후인 1월 21일, 중국 즈푸(芝罘)에서 프랑스어로 된 대한제국의 ‘전시중립선언’이 발표됐다. 러일 간의 평화가 결렬될 경우 대한제국은 엄정중립을 지키겠다는 내용이었는데, 이 소식은 각국에 동시 타전되었다. 이 선언이 발표된 데는 에밀 마르텔, 벨기에인 고문 델로비유(Delovigne) 등이 큰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소식을 들은 일본 정부가 경악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마르텔 자신은 러시아에 대해 부정적이었다고 한다. 마르텔은 러시아와 일본이 전쟁을 하면 러시아가 패배할 것으로 예상했다고 전해진다. 2월 8일 일본군은 러시아군이 주둔하고 있는 뤼순항을 공격해서 전쟁이 일어났다. 전황이 불리해지자 러시아 공사와 직원들은 러시아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공관을 폐쇄하고 본국으로 철수했고 일본군은 이용익을 쳬포했으며 현상건과 이학균은 제물포항에 있던 미국 군함 신시나티호로 상해로 망명했다.
마르텔은 1905년에도 상해 또는 즈프로 가서 상해에 나와 있는 러시아 정보국 수장이며 주한 러시아 공사를 지낸 알렉산드르 파블로프를 만나서 고종의 밀서를 전달했다고 한다. 마르텔이 러시아측과 자주 접촉해서 마르텔이 러시아 정보국의 첩보원으로 일했다고 보기도 한다. 당시 일본 정보당국은 영국인 베델이 발간하는 <대한매일신보>의 자금줄이 고종의 비자금과 러시아이며 마르텔이 파블로프의 부탁으로 <대한매일신보>를 막후에서 관리하고 있다고 의심했다.
마르텔은 상해로 망명한 현상건과 함께 고종의 은밀한 부탁을 해결하기도 했는데, 텐진 영사관 부지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텐진의 영사관 부지는 1904년 대한제국 정부가 구입했는데, 표면적인 매입자는 마르텔이었다. 을사조약 후 일본은 해외에 있는 대한제국의 공사관과 영사관을 철수시켰으며 텐진 영사관 부지도 대한제국 소유로 보고 환수를 추진했는데, 그 소유자가 마르텔이라서 환수하지 못했다.
마르텔은 자신은 매입했을 뿐이고 소유자는 프랑스 사람이 운영하는 대풍양행이라는 회사라고 주장해서 일본은 결국 영사관 부지를 환수하지 못했다. 마르텔은 현상건과 함께 작업을 해서 영사관 부지가 대한제국의 돈으로 구입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함으로써 그 부지가 일본 정부로 넘어가지 않도록 했다는 것이다. 또한 영사관 부지는 사실은 고종이 자신의 비자금으로 구입해서 프랑스인 회사 명의로 해 놓은 것이라고 하는데, 그 후에 이 부지가 어떻게 됐는지는 파악이 되지 않는 것 같다. 이처럼 마르텔은 법어학교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면서 프랑스인이라는 이점을 이용해서 일본의 감시를 받아가면서 상해와 텐진을 드나들었으니, 첩보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
1911년에 한성법어학교가 폐교될 때까지 마르텔은 프랑스어를 가르쳤고, 1차 대전이 발발하자 모국 프랑스로 돌아가서 병역을 이행했다. 전후에 다시 조선으로 돌아온 그는 ‘서울 프레스’라는 영문지에서 번역사로 일하였고, 광업에 관련된 일을 했으며 경성제국대학이 설립되자 예과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쳤고, 동성상업학교에선 강사로 역시 프랑스어를 가르쳤다. 또한 벨기에 명예영사, 조선총독부 체신국 촉탁, 일본기독교청년회관 불어동호회 강사 등을 역임하였다.
조선을 또 다른 모국으로 생각했던 마르텔은 언더우드 가문 다음으로 일제강점기 시절에 조선에 오래 머물렀다.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 마르텔은 총독부에 의해 추방돼서 중국 텐진에 머물렀다. 그의 조국 프랑스는 나치의 지배하에 있어서 돌아갈 수 없었다. 전쟁이 끝나고 한국이 해방되자 마르텔은 1947년 2월에 다시 서울로 돌아왔고, 1949년 9월에 사망해서 양화진 묘지에 묻혔다. 그의 둘째 딸 이마쿨라타는 천주교 수녀가 되어 일제하에선 원산에서, 그리고 해방 후에는 대구에서 성직자로 일했다. 아들 샤를 마르텔은 마르텔이 사망했을 때 서울 주재 프랑스 대사관의 부영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이화여대 사학과 백옥경 교수의 2015년 논문을 많이 참조했습니다.)
이상돈, 전 중앙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