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춘곡 고희동 자화상(1915년 作)
사람의 인생은 젊었을 시절에 어떤 계기를 맞게 되며 그것이 그의 일생을 좌우하곤 한다. 고희동에게는 한성법어학교를 다녀서 고종의 궁내부에서 이른 나이에 관직 생활을 하고, 이어서 을사늑약을 목격한 후 미술 유학을 하겠다고 결심한 것이 인생의 방향을 결정지은 계기였다. 고희동은 어려서 유생(儒生)한테 한문과 한학을 배웠다. 갑오개혁 때인 1895년, 소학교령(小學校令)이 제정돼서 한성 도심에 소학교가 설치되기 시작했으나 그에 앞선 1894년 가을 고희동은 봉화 현감으로 발령이 난 부친 고영철을 따라서 봉화(奉化)로 내려갔다. 고영철의 큰 아들 고희명은 육영공원을 졸업한 후 관직 생활을 시작한 후였고, 둘째 아들 고희중은 한성한어학교에 입학할 즈음이라서 모두 한성에 머물렀고 막내아들 고희승은 아직 태어나기 전이었다.
이처럼 고희동은 봉화 현감이 된 부친을 따라서 경상도 봉화(奉化)로 내려갔고 부친이 고원(高原) 군수를 지낼 때까지 4년 반을 아버지 옆에 있었다. 따라서 이 기간 동안 고희동은 부친으로부터 높은 수준의 한학을 배웠을 것이다. 고희동에게는 아버지 고영철(高永喆 1853~1911) 보다 더 좋은 한학 스승이 있을 수 없었다. 육교시사(六橋詩社)의 동인(同人)으로 강위(姜瑋 1820~1884), 김석준(金奭準 1831~1915) 등 당대의 문장가들과 교류했던 부친만한 선생은 없었다. 또한 한성 한 복판에서 태어나서 시골과 산간을 구경해 보지 못한 소년 고희동에겐 경상도 오지(奧地)의 험한 산세(山勢)가 신비로웠을 것이다. 집안에서 전해 내려온 이야기에 의하면, 봉화에서 소년 고희동은 화선지에 붓으로 산간 경치를 그렸고, 아버지는 그것을 보고 그림이 되어 간다고 칭찬했다고 한다. 고영철은 상처(喪妻) 후에 다시 결혼해서 얻은 아들 고희동이 아들 중 가장 총명해서 총애했다고 한다.
고영철은 다시 함경도 남부에 있는 고원(高原)군 군수로 발령이 나서 고희동도 아버지를 따라 1년 동안 고원에서 생활했다. 어떻게 해서 경상도 산간 마을에서 또 다시 삼수갑산(三水甲山)으로 귀양가는 길목이라는 함경도 고원으로 발령이 났는지, 이해하기 어렵지만 고영철은 묵묵하게 군수직을 해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다시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날 때 고희동은 고향 한성, 즉 서울로 돌아와서 한성법어학교(漢城法語學校)에 입학했다. 법어학교를 선택한 이유는 아버지의 뜻으로 생각되는데, 큰 아들은 영어를 하고, 둘째 아들은 중국어를 했으니까 셋째 아들은 프랑스어를 시키지 않았나 한다. 그즈음 프랑스가 한성과 의주 사이의 철도(경의선) 부설권을 얻었고 광물자원 개발사업에 적극적이어서 프랑스 사람들이 조선에 드나들었기 때문에 프랑스어가 인기가 있었다. 1892년 프랑스 천주교는 한성 전체를 굽어볼 수 있는 위치에 거대한 종현성당(鍾峴聖堂, 지금의 명동성당)을 짓기 시작했고 1896년에는 정동에 우아하게 높이 솟아 오른 프랑스 공사관이 준공되어서 프랑스의 존재가 크게 느껴질 때였다.
한성법어학교는 1895년에 정동의 프랑스 공관 앞에 있던 에밀 마르텔의 집에서 개교했는데, 이듬해에 육영공원이 정동에 있다가 옮겨간 북부 박동(礡洞)으로 옮겨서 수업을 했다. 박동은 중동고교와 숙명여고가 강남으로 이전하기 전에 있었던 곳으로 종로구청이 있는 수송동과 붙어 있어서 수송동 본가로 올라온 고희동은 집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학교에서 1899년 9월부터 프랑스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때 고희동의 나이가 13세이니까 매우 어린 나이에 법어학교에 입학한 셈이다. 한성법어학교 초기 졸업생으론 이능화(李能和 1869~1943)가 유명한데, 한어학교와 영어학교를 다니고 법어학교를 또 다닌 그는 중국어, 영어, 불어에 모두 능숙해서 법어학교 교관(외국인 교사를 보조하는 직위, 조교)을 지내고 나중에는 법어학교 교장을 지냈다. 이능화는 불교와 우리 역사에 조예가 깊어서 많은 저술을 남겼으나 말년에는 조선 역사를 왜곡해서 일제 식민통치를 합리화하는 곡학아세(曲學阿世)를 했다.
유력한 역관 집안 출신인 현상건(玄尙健 1875~1926)도 초기에 한성법어학교에서 공부했는데, 졸업은 하지 않고 관직에 취업했다. 고희동은 한성법어학교 재학 중인 1901년에 임천 조(趙)씨와 결혼했는데, 바로 현상건의 부인의 동생이었다. 고희동은 법어학교에서 4년간 공부한 후 17세 나이에 대한제국 궁내부에 주사로 취직했다. 고희동이 이렇게 젊은 나이에 탄탄대로를 갈 수 있었던 데는 궁내부 요직에 있던 사촌형 고희경(高羲敬 1873~1934)과 손위 동서 현상건의 도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현상건은 러시아 편에 서서 상해로 망명하고 고희경은 이토 히로부미의 신임을 얻어 을사조약 체결에 역할을 하게 되니, 고희동으로서도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고희동이 관직을 버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그림의 세계로 나가게 된 데는 아버지 고영철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고영철은 김윤식이 이끄는 영선사 일행으로 청나라에 1년 가까이 머물면서 영어를 배웠는데, 그때 안중식(安中植 1861~1919)과 조석진(趙錫晋 1853~1920)도 함께 텐진에 머물면서 청나라 화도창(畫圖廠)에서 기기(器機)를 그리는 교육을 받았다. 을사늑약 후 관직에 회의를 느낀 고희동이 당시 화단의 두 거두인 안중식과 조석진으로부터 서화를 배우게 되는 데는 이러한 자연스러운 인간적 배경이 있었다. 그 후 일본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고희동은 안중식과 조석진을 모시고 서화협회(書畫協會)를 발족하게 된다.
고희동이 봉화와 고원에서 부친과 함께 있을 때 아버지는 총명한 아들에게 자신이 보았던 청나라, 미국, 그리고 일본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특히 고영철은 미국이란 엄청나게 크고 강력하고 문명된 나라를 보고 받은 충격을 아들에게 소상하게 알려주었을 것이다. 고영철은 미국 방문시 매일매일 일기를 썼고 그것을 고희동에게 넘겨주고 사망했는데, 그 일기는 고희동 사망 후에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고희동이 1949년에 미국을 방문한 후에 월간잡지 <신천지>에 기고한 기행문에 부친의 미국 여행 일기 이야기가 나온다.
고희동이 서양화를 공부하게 되는 데는 한성법어학교 프랑스어 교사 에밀 마르텔(Emil Martel 1874~1949)의 영향이 있었다. 에밀 마르텔은 언더우드 가족을 제외한다면 일제시대에 한국에 가장 오래 머물면서 한국을 사랑했던 외국인일 것이다. 에밀 마르텔은 현상건과 고희동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쳤고 을사늑약 전까지 궁내부 고빙(雇聘)으로 일하고 있었다. 에밀 마르텔은 을사늑약 후 망연자실(茫然自失)에 빠진 고희동에게 서양화를 공부하는 계기를 부여했다. 또한 마르텔은 현상건과 고희동의 처조카이며 나중에 매일신보 학예부장과 고려대 교수를 지내게 되는 조용만(趙容萬 1909~1995)을 경성제국대학 예과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쳤다. 그러면, 에밀 마르텔은 어떤 사람이었나? (계속)
이상돈, 전 중앙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