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6년 문을 연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국립교육기관인 육영공원에서 영어교사인 헐버트가 강의를 하는 모습.
고영철(高永喆 1853~1911)은 아들을 넷 두었다. 고희명(高羲明 1873~?), 고희중(高羲中 1881~?), 고희동(高羲東 1886~1965), 고희승(高羲升 1895~1968)이 이들이다. 큰 아들 고희명은 1886년 가을에 문을 연 육영공원(育英公院)에 1기생으로 입학했고, 고희중은 한성한어학교, 고희동은 한성법어학교를 다녔고 뒤늦게 태어난 고희승은 경성고보(경기고의 전신)와 경성전수학교(京城專修學校, 경성법전의 전신)을 졸업했다. 당시 기준으로 보면 4형제가 모두 ‘엘리트 스쿨’을 다닌 셈이다. 고영철의 큰 형인 고영주(高永周 1839~1915 ?)는 후사(後嗣)가 없어서 고희명이 양자로 들어갔으나 고희명도 자식을 두지 못하고 단명해서 대(代)가 끊어졌다. 고영철의 둘째 형 고영희(高永喜 1849~1916)는 두 아들 고희경(高羲敬 1873~1934)과 고희성(高羲誠 1876~?)을 두었다. 고희경은 육영공원 1기생이고, 고희성은 한어학교, 한성영어학교, 그리고 한성덕어학교를 다녀서 일본어 외에도 중국어, 영어, 독일어에 능했다.
1886년 9월, 영어로 가르치는 근대적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이 문을 열었다. 기성 관료반인 좌원(左院)에는 14명이 선발되어 12명이 등록을 했고, 청년반인 우원(右院)은 21명이 선발되어 18명이 등록해서 1기생은 30명이었다. 좌원 학생은 과거를 패스한 20대에서 31세까지의 신진관료들인데, 이들은 직장과 학업을 병행해야 해서 수업에 불성실한 경우가 많았다. 그 중 눈에 띄는 인물은 이완용(李完用 1858~1926)으로, 당시 직급은 부사용(副司勇)으로 29세였다. 나중에 일본,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영국 공사를 지내는 김승규, 이용선, 민철훈, 민영돈이 같이 공부했다.
우원(右院)은 15세에서 20대에 이르는 젊은이들이 추천으로 입학했다. 대개가 장·차관급 자제이거나 추천으로 입학했는데, 특이하게 하급관리인 주사(主事)의 추천으로 입학한 4명이 있었다. 그 네 명 중에 14살이던 고희명과 고희경이 있었다. 고희경은 삼촌인 고영철이 추천해서, 그리고 고희명은 고영철의 친구인 주사 진상언이 추천해서 입학했다. 고희경과 고희명은 당시 14세 소년으로 최연소 학생이었다. 다른 입학생들은 모두 사대부의 자식이었는데 이들은 중인 역관의 자제였다. 따라서 동문학 주사이던 고영철이 육영공원 설립에 간여했기 때문에 이들이 육영공원에 입학했을 것으로 보인다.
근대적 교과를 미국인 교사 3명이 영어로 가르치는 육영공원은 의욕적으로 수업을 진행했다. 좌원 학생들은 출퇴근했으나 직장이 있어서 결석이 잦았다. 우원 학생들은 기숙사에서 머물면서 아침 7시부터 수업을 했다. 학생 숫자가 작아서 좌원과 우원 학생들이 같이 공부했는데, 이에 대해 좌원 학생들이 불만을 표했다고 한다. 하지만 육영공원은 예산 부족으로 교사 봉급을 제대로 주지 못해서 미국인 교사들이 점차 조선을 떠나는 등 솨락하더니 1894년 말에 결국 폐교되었고 영어교육은 이듬해인 1895년 5월에 문을 연 관립한성영어학교가 담당하게 되었다. 한성영어학교 졸업생으로는 해공 신익희(申翼熙 1894~1956), 국어학자 이희승(李熙昇 1896~1989)이 유명하다.
육영공원 1기생 중 좌원에서는 이완용이 영어를 열심히 배워서 주미 공사관 참찬관과 주미 대리 대사를 지내게 된다. 우원에서는 고희경이 두각을 나타내는데, 고희경은 자기보다 나이가 15세나 많은 이완용과 함께 영어를 배웠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을 체결하는 수옥헌(漱玉軒, 중명전)에서 두 사람이 같이 하게 되는 인연은 이때로 거슬러 올라가니, 이것도 운명인지 알 수가 없다.
고희경(1873~1934)은 육영공원 졸업생에게 주어지는 특혜성 과거인 응제(應製)에 1891년에 합격해서 진사(進士)가 됐다. 1894년에 육영공원은 폐지됐고 그 해에 고희경은 외아문(外衙門, 외교부) 주사로 화려한 관료생활을 시작했다. 1894년 7월에 시작된 갑오개혁(甲午改革, 甲午更張)은 중앙관제를 의정부(議政府)와 궁내부(宮內府)로 구별하고 6조(六曹) 체계를 8아문(八衙門: 내무·외무·탁지·군무·법무·학무·공무·농상)으로 개편하여 의정부 직속으로 두었다. 바로 이 시점에 고희경은 외아문 주사가 된 것이다. 같은 시점에 고희경의 아버지 고영희는 내아문(內衙門, 내무부) 참의가 되었고 이듬해인 1895년 4월에는 학부협판(學部協辦, 교육부 차관)에 임명되고 곧 이어서 일본 주재 공사로 임명됐다. 부자(父子)가 출세길로 들어선 것이다. 고희경은 1899년에는 궁내부 번역과장이 됐고, 1902년에는 궁내부 외사과장이 됐으며 1905년 3월에는 궁내부 예식과장 겸 외사과장이 됐다. 궁내부의 최고 요직을 차지한 것이다.
고영철의 큰 아들 고희명(1873~?)도 육영공원을 졸업한 후 관직생활을 했는데, 정확히 무슨 일을 했는지는 파악되지는 않지만 1902년에 한성우체사(漢城郵遞司) 주사였음은 확인이 된다. 1903년 12월 고희명은 궁내부 박문원(博文院) 주사 판임관 3등으로 발령이 났다. 1904년 2월에는 궁내부 예식원 번역관보(飜譯官補) 판임관으로 임명됐고, 1905년 궁내의 호위와 전기 업무 등을 담당할 주전원(主殿院)이 궁내부에 새로 설치되자 그해 3월 주전원(主殿院) 판임관이 됐다. 따라서 을사늑약이 맺어질 당시에 고희명은 궁내부 주전원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고영철의 둘째 아들 고희중(1881~?)은 1897년에 문을 연 한성한어학교에서 중국어를 공부하고 성균관에서 박사(博士, 정7품 관직으로 오늘날의 연구원)를 지냈다. 고희명 보다 8살 아래이기 때문에 대략 1902~03년경에 성균관에서 일을 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을사늑약 후인 1906년 궁내부 주전원 주사로 발령이 나서 형인 고희명과 같은 부서에 근무했다. 따라서 고희명은 1903년부터, 그리고 고희중은 1906년부터 궁내부에 근무한 것이다.
고희경의 동생 고희성(1876~?)은 한어학교를 나오고 이어서 한성영어학교에서 공부했다. 한성영어학교 교관(敎官, 외국인 교사를 보조하는 직위)을 지내면서 한성덕어(德語)학교에서 독일어도 배웠다. 고희성이 한성영어학교 교관을 할 때에 신익희와 이희승이 학생이었을 것이다. 고희성은 갑오개혁으로 과거제가 없어지기 직전인 1894년에 과거에 합격해서 진사가 됐다. 고희성은 고씨 형제 중에서 어학능력이 가장 뛰어났다. 아니 그 시절 고희성만큼 외국어를 한 조선 사람이 있을 것 같지가 않다. 고희성은 1901년에 궁내부 예식원 참리관이 되었고, 1905년 3월에는 예식원 예식관이 되었다. 을사늑약 당시 고희성은 예식과장인 형 고희경 아래에 있었다.
고희동은 1895년 10월에 문을 연 한성법어학교에 1899년 9월에 입학해서 1903년 봄까지 4년 동안 프랑스어를 공부했다. 정식 졸업을 1년 앞두고 그만두었는데, 당시 외국어학교 학생들은 적당한 직장에 생기면 그만두는 경우가 많았다. 고희동은 1904년 12월에 궁내부 광학국(鑛學局) 주사로 발령을 받았다. 따라서 1년 반 정도 공백이 있는데, 실제로는 1903년 말부터 광학국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으나 공식 인사가 늦게 난 것으로 여겨진다. 1903년 말 시점의 광학국장은 궁내부 번역과장을 겸직하고 있는 현상건(玄尙健 1875~1926)으로, 바로 고희동의 손위 동서였다. 한성법어학교를 다녀서 불어는 물론이고 영어와 러시아어를 했던 현상건은 고종의 밀사로 파리와 러시아로 비밀 출장을 가고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상해로 망명했기 때문에 고희동이 현상건과 같이 근무한 기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1905년 3월 고희동은 궁내부 주사로 발령이 나며, 그 지위에서 그해 11월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는 순간을 궁내에서 경험하게 된다. 이처럼, 1905년 11월 궁내부에는 고희경, 고희성 형제와 고희명, 고희동 형제가 함께 근무하고 있었다.
을사늑약 후 2년이 지나서 정미(丁未)7조약이 맺어지고 고종은 퇴위하며, 이토 히로부미는 영친왕 이은(李垠)을 유학 명목으로 일본으로 데려가도록 했다. 1907년 12월, 고희경은 동궁대부(東宮大夫)로 영친왕을 수행(보호 감독)하는 임무를 띠고 영친왕과 함께 동경으로 향했다. 고희성은 형의 뒤를 이어서 궁내부 예식과장이 되었고 한일합병으로 직위가 없어질 때까지 근무했다. 고희경은 동경으로 가면서 그의 4촌 동생인 고희중을 함께 데리고 갔다. 그 후 고희중에 관한 기록은 볼 수 없으며, 고희명의 경우도 그러하다. (두 사람은 단명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을사늑약 후 대한제국은 외교권이 사라져서 특별히 할 일이 없어진 고희동은 장훈학교에서 일본어를 공부하고 부친의 친구이기도 한 안중식(安中植 1861~1919)과 조석진(趙錫晋 1853~1920)에게 서화를 배웠다. 그리고 고희동은 관직을 버리고 미술유학을 하기로 결심한다.
고희경은 한일합병 후에도 이왕직(李王職) 관리로 동경에서 근무했는데, 1920년대에 주식투자로 큰 현금부자가 되었다고 알려졌다. 그는 아버지 고영희가 사망한 후 자작(子爵) 작위를 습작(襲爵)했고 영친왕을 방자(方子) 여사와 결혼을 시킨 공로로 훈장을 받고 백작(伯爵)으로 승급했다. 고영희는 조선 500년 역사에서 중인 출신으로 대신(大臣)이 되어 신분 장벽을 뛰어넘은 기록을 세웠고, 고희경은 귀족 작위를 습작한 친일인사 후손 중에서 승급한 유일한 경우였다. (참으로 씁쓸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고희성은 그 후에 기록을 찾을 수 없는데, 일본에 정착해서 귀화했을 것으로 추측하나 물론 확실한 것은 아니다. 고희경의 후손이 국내에 갖고 있던 부동산은 2007년 친일재산으로 국가에 귀속됐다.
이상돈, 전 중앙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