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빙사 일행. 뒷줄 오른쪽 두 번째가 고영철 .사진=위키백과

조선은 신분사회라서 아무리 학식이 풍부하고 재산이 많아도 중인(中人)은 중인이었다. 하지만 조선 말기 19세기 후반기에 들어서 조선이 개항(開港)을 하게 되자 중인인 역관(譯官)들의 활동반경에 넓어졌다. 나의 외가인 제주 고(高)씨, 외할머니 쪽인 조(趙)씨, 그리고 조씨와 인척 관계인 현(玄)씨는 모두 역관 가문이었다. 일제 시기에 매일신보 학예부장을 지내고 문학서클 ‘9인회’를 이끌었던 영문학자 조용만(趙容萬 1909~1995)은 고희동의 처조카인데, 그의 부친과 조부도 모두 역관이었고, 특히 조부는 관철동/관수동에 있는 큰 저택에 살았다고 한다. 조용만은 조부의 사랑채에서 현상건 등 친러파 인사들이 러일전쟁을 앞두고 비밀 모임을 빈번하게 가졌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고희동의 손위 동서인 현상건(玄尙健 1875~1926)의 현(玄)씨도 역관을 많이 배출한 가문으로, 소설가 현진건(玄鎭健 1900~1943)도 그 현씨 집안이다.

역관은 역관 시험을 보아야 하는데, 청나라와 왕래하면서 ‘보따리 무역’으로 부(富)를 축적한 역관들은 자기 자식들을 역관으로 만들기 위해 과외공부를 시켰다는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다. 중국에 가는 사대부 사신(使臣)을 수행하는 역관들은 중국어도 못하고 한시(漢詩)로 필담도 하지 못하는 사대부 대신 중국어로 이야기하고 즉시 시(詩)를 지어서 청나라 관리들과 교류했다고 한다. (21세기 대한민국은 역관 같은 중인들이 잘 나가는 세상이라고 하겠다. 외교관, 의사, 변호사, 회계사, 무역인, 기술자 등 자기 능력으로 살아가는 직업은 모두 과거의 중인인 셈이다. 자신들이 차별을 당한다고 생각했던 19세기의 중인들이 21세기 대한민국을 본다면 자신들이 꿈꾸었던 세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역관 고진풍(高鎭豊)은 아들 넷을 모두 역관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는데, 이들이 고영주(高永周 1839~1915년?, 1859년 한학 합격), 고영희 (高永喜 1849~1916, 1867년 왜학 합격), 高永善(?~?, 1870년 한학 합격), 고영철(高永喆 1853~1911, 1876년 한학 합격)이다. 한학(漢學)은 중국어이고 왜학(倭學)은 일본어를 의미하는데, 이처럼 둘째 아들인 고영희만 일본어 역관이 됐다. 3남인 고영선은 다른 고씨에게 양자로 출계해서 상세한 기록을 알 수 없고 역관 시험 합격 연도 기록만 남아 있다. 4형제 중 고영주와 고영철이 특히 가까워서 육교시사(六橋詩社)에 함께 나가서 당대의 문필가들과 함께 문집에 글을 남겼다.

고영주는 역관들이 하는 통상적인 관직을 해오다가 갑오개혁(甲午改革) 직후인 1895년 봄에 개성부 관찰사로 임명됐다. 하지만 고영주는 이듬해 초 관찰사직에서 의원면직됐는데, 그리고 얼마 후에 아관파천(俄館播遷) 사태가 일어났다. 관찰사를 8개월 쯤 지낸 것인데, 여하튼 마지막 직위가 관찰사라서 칙임관(勅任官)을 지낸 것으로 기록됐다. 4형제 중 유일하게 일본어 역관이 된 고영희의 관직 이력은 한성판윤(지금의 서울 시장), 주일공사(지금의 주일 대사), 3개 부처 협판(協辦, 차관), 탁지부 대신(재무장관)과 법부대신(법무장관)으로, 어지러울 정도로 화려하지만 그 결말은 ‘친일 매국’이었다.

4남인 고영철은 김윤식(金允植 1835~1922)이 청나라의 동문관(同文館)을 모델로 삼아 만든 동문학(同文學)에서 주사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박문국에서 <한성순보> 창간을 준비하다가 보빙사(報聘使) 수행원으로 미국을 다녀왔으나 갑신정변으로 박문국은 불타버렸다. 갑신정변이 수습된 후 김윤식이 정계 실세가 됐기 때문에 고영철은 김윤식이 동문학을 폐쇄하고 근대교육기관인 육영공원(育英公院)을 1886년에 세우는 과정에 일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후 고영철은 내무부 주사로 8년 동안 신변에 변동이 없다가 1894년에 봉화(奉化) 군수로 임명되었다. 영선사(領選使) 일행으로 청나라를 다녀오고, 보빙사 일원으로 미국을 다녀왔으며 미국을 가고 오는 도중에 요코하마와 도쿄를 구경한 고영철의 견문과 경력에 비해선 초라한 관직 생활을 한 셈이다.

나는 이 점이 납득이 되지 않는, 일종의 ‘미스터리’였는데, 내 나름대로 추론을 해 본다면 이러하다. 첫째 본인이 원래 공부를 좋아하는 선비라서 세속적 출세에 관심이 적었을 수 있고, 둘째 갑신정변이란 유혈극을 보면서 중앙정치에 환멸을 느꼈거나, 셋째 멘토격이던 김윤식이 민씨 세력의 탄핵 상소에 시달리다가 결국 충청도 오지로 유배를 가게 되어서 더 이상 공직에서의 활로가 막혔을 가능성이다. 홍영식 같은 ‘역적’ 무리와 함께 미국을 다녀왔고, 유배를 간 김윤식의 사람이기 때문에 조용한 관리 생활로 만족해야 했을 수도 있다.

고영철은 1894년부터 1903년까지 10년 동안 경상도 봉화 현감, 함경도 고원 군수, 경기도 마전 군수, 그리고 평안도 삼화 감리 및 군수를 지냈다. 봉화 현감은 3년 반 동안 지냈고 그 후론 각각 1년 반에서 1년 동안 군수직을 지냈다. 경상도 오지인 봉화에서 현감(縣監)을 3년 반이나 보낸 것은 당시 지방관 임기가 길어야 1년, 심지어 6개월이던 것에 비한다면 이례적이다. 봉화 현감으로 태백산 사고(史庫)를 지킬 참봉(參奉)에 지급할 급여가 필요하다고 올린 상소문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봉화군 봉성면 봉성리 376-12번지에는 봉화군에서 현감, 군수 등을 지낸 관리들의 선정비(善政碑)를 모신 곳이 있는데, 여기에는 ‘고영철거사비(高永喆去思碑)’가 있다. “전면에는 ‘我侯高公永喆去思碑’라고 새겨져 있는 이 마애비(磨崖碑)는 고영철이 1894년 8월부터 1898년 3월까지 3년 7개월간 봉화현감(奉化縣監) 재임 동안 고을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다가 고원군수(高原郡守)로 영전(榮轉)하니 읍인(邑人)들이 1898년에 바위에 치적을 깊이 새겨 선정을 칭송하여 세운 것이다.”(국가유산청 비지정 유산 해설)

고원 군수와 마전 군수로 있던 시절에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마지막으로 고영철은 평안도 삼화(三和) 감리(監理) 겸 군수를 지냈는데, 대동강이 서해로 흘러가는 항구인 삼화(三和, 지금은 남포)는 조선이 우호통상조약을 맺으면서 개항한 곳으로 항구를 책임지는 감리는 중요한 직책이었다. 그 시절에 근해에서 일본 어부 60여 명이 허가 없이 어로작업을 하면서 단속하는 관헌을 구타하는 일이 발생하자 고영철 감리는 외부(外府, 외교부)의 대응이 필요하다는 상소를 올렸으나 중앙정부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승정원 일기에 남아 있다. 삼화 재판소 소장을 겸직하면서 백전(白錢, 흰색 동전)을 사주(私鑄, 멋대로 만든)한 범인을 처벌했다고 보고한 기록도 남아 있다. 평화로운 봉화와 달리 항구인 삼화는 사건 사고가 잦았던 모양이다. 1903년 여름, 삼화 감리를 끝으로 관직 생활을 마친 고영철은 상경해서 수송동 본가에 머물렀다.

1907년 7월 5일자 <황성신문>에는 군수직을 마친 고영철이 지방관청 운영비용 200원을 미납하고 있었는데, 이를 알게 된 그의 형 고영희 탁지부대신이 자신의 봉급으로 동생이 갚지 못한 200원을 갚았다는 기사가 났다. 당시는 군수 등 지방관은 자기 책임하에 관헌 살림을 해야 했는데, 군수직을 마친 그는 지방관청 운영비용 200원을 미납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 말기는 지방관헌의 가렴주구(苛斂誅求)가 극에 달해서 동학민란(혁명)이 일어나는 원인이 됐는데, 고영철은 지방관 10년 재직 끝에 빚을 안게 되어서 탁지부대신인 고영희가 대납을 하자 일종의 미담으로 언론에 난 것이다. 자신의 직위와 이재에는 욕심이 없었던 고영철이지만 자식 교육에는 관심이 많았다. 그는 자신의 네 아들이 당시로선 최고의 ‘엘리트 교육’을 받도록 했다. (계속)

이상돈, 전 중앙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