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빙사 일행 11명이 모두 나온 사진. 아래 오른쪽이 우리탕(吳禮堂). 우리탕은 유럽에서 스페인 여자와 결혼해서 같이 조선에 와서 인천에 큰 집을 짓고 살았고 부부는 죽어서 인천 외국인 묘지에 같이 묻혔다. 그 역시 파란만장한 삶이었다.
갑신정변으로 보빙사 사절 3명(민영익, 홍영식, 서광범)의 운명은 엇갈리게 된다. 민영익은 홍영식과 박영효가 동원한 일본 사관학교 조선 유학생들이 휘두른 칼에 중상을 입었고, 홍영식은 우세한 청군과 관군에 의해 살해됐다. 서광범은 김옥균 등과 함께 간신히 일본 선박에 올라타고 일본으로 망명했다. 보빙사 수원(隨員) 3명의 운명도 엇갈리기는 마찬가지였다. 미국 현지에서 민영익은 유길준(兪吉濬 1856~1914)이 미국에 남아 대학을 다니도록 해주었다. 학비와 체제비도 민영익이 해결해 주었다.
고영철(高永喆 1853~1911)은 홍영식을 수행해서 1883년 12월 20일에 귀국한 후 원래 직장인 동문학 박문국에 복귀했다. 세 사람 중 가장 젊은 변수(邊燧 1861~1892)는 민영익과 서광범을 수행해서 미 군함 트렌턴 호를 타고 유럽 항구를 거치고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구경하고 스리랑카에서는 소승 불교문화를 구경하고 1884년 6월에 귀국했다. 고영철은 갑신정변이 일어나기 한 달 전에 칭병(稱病) 휴직을 했다.
1881년에 김옥균이 조사시찰단으로 일본을 다녀올 때 변수는 김옥균의 수행원으로 일본을 다녀왔고 1882년에 박영효가 수신사로 일본을 다녀올 때 변수는 박영효의 수행원이었기 때문에 변수는 갑신정변에서 당연히 이들 편에서 거사를 도왔다. 일본어를 하는 변수는 혁명 주도세력과 일본군 사이의 연락을 맡았다. 상황이 실패로 끝나자 변수는 변복을 하고 제물포로 도망가서 일본 선박에 올라탔다. 청나라 군대를 이끌고 이들을 추격해서 제물포 부두까지 온 사람은 묄렌도르프였다. 선박에 올라탄 이들은 본인 목숨은 건졌으나 조선에 남은 이들의 가족은 몰살당했고 재산도 박살이 났다. 고종의 복수는 잔인하고 처절했다.
일본에 도착한 변수는 김옥균을 모시고 있었는데, 우연한 계기로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된다. 갑신정변 후 청나라는 또다시 대원군을 국내로 보내려고 하자 이에 놀란 민씨 세력은 민영익을 청나라에 파견해서 리훙장(李鴻章)을 설득하도록 했다. 이 임무가 실패로 끝나자 민영익은 귀국을 포기하고 인삼을 청나라와 홍콩에 수출하는 독점권을 받아서 인삼무역을 하기 시작했다. 장사가 잘되어 민영익은 큰돈을 벌었는데, 그 과정에서 상하이로 영어 유학을 온 조선 젊은이 두 명을 알게 되어 자기 수행원처럼 두었다. 그런데 1886년 1월, 이 발칙한 두 젊은이는 홍콩 은행에 예치되어 있는 민영익의 돈을 몽땅 인출해서 일본으로 달아났다. 이들은 급한대로 김옥균을 찾아갔는데, 자신은 물론이고 변수도 신변의 위협을 받고 있으며 변수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싶어 함을 알고 있는 김옥균은 이들이 훔쳐 온 돈의 약간은 자기가 갖고 대부분은 이들에게 주어서 변수와 함께 미국으로 가도록 해주었다. 그러니까 이들은 민영익의 돈을 훔쳐서 유학을 떠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세 젊은이는 미국 유학을 떠났다. 당시 미국에는 서광범과 서재필도 머물고 있었으나 이들도 모두 도망자 신세였다. 민영익 돈 절취사건은 외교 문제가 되어 조선은 변수 일행의 신병인도를 요구했으나 미국은 차일피일 미루었고, 그러는 중 변수는 1891년 6월 메릴랜드 농과대학을 졸업해서 한국인 최초로 미국 대학 졸업생이 되었다. 변수는 역관 가문이면서도 일본에서도 농업에 관심을 갖더니 결국 농대를 졸업했다. 변수는 미국 농무성에 촉탁으로 취직했는데 그리고 3개월 후 철도 사고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 31세였다.
고영철은 보빙사 수원 임무를 마치고 귀국했을 때 이미 30세였다. 갑신정변이 수습되고 난 후 복직한 고영철은 동문학이 문을 닫고 이를 대신할 육영공원(育英公院)이 1886년 9월에 발족하는 과정에서 일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영철은 자신의 큰 아들 고희명과 조카 고희경을 육영공원에 입학시켰다. 고희경은 나중에 탁지부 대신이 되는 고영희의 큰 아들로, 그 후 궁내부 예식과장을 역임하게 된다. 고영철은 그 후 내무부 주사로 계속 근무했는데, 1894년에 경상도 봉화 현감으로 발령이 나기까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했는지는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고영철은 갑신정변과 무관했지만 보빙사로 같이 갔던 민영익과 홍영식이 적(敵)이 되어 서로 죽이고 죽는 관계가 된 것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지는 상상해 보는 수밖에 없다.
고영철이 아들과 조카를 육영공원에 입학시킬 때 그의 멘토이며 외부 독판(督辦, 장관)이던 김윤식(金允植 1835~1922)은 반대파의 모략에 걸려 충청도로 유배를 가게 된다. 김윤식은 1894년에야 유배에서 풀려나서 강화부 유수(留守)를 지내게 되며 동학농민운동 사태가 수습된 후 들어선 김홍집 내각에서 외부대신이 되어 완전히 복권된다. 그러나 을미사변 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고(俄館播遷, 1896년 2월) 친일파 척살 명령을 내림에 따라 김홍집, 정병하, 어윤중은 폭도들에 의해 살해되고 내부대신 유길준과 법부대신 장박은 일본으로 도망가며, 외부대신 김윤식은 제주도로 종신 유배를 가게 된다. 정미7조약(1907년 7월)으로 고종이 퇴위함에 따라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사면된 유길준과 장박은 11년 넘는 망명생활을 뒤로 하고 귀국하며, 김윤식도 유배생활에서 풀려난다.
고영철은 1894년 여름부터 1904년 연말에 은퇴할 때까지 경상도 봉화, 함경도 고원, 경기도 마전, 평안도 삼화에서 현감, 군수, 감리를 지냈다. 동학농민운동(혁명)이 1894년 봄에 일어났으니까 고영철은 바로 그 직후에 봉화 현감으로 부임해서 1898년 초까지 3년 반 동안 재임했다. 따라서 고영철은 동학군의 패배와 청일전쟁에서의 청나라의 패배, 그리고 갑오개혁, 을미사변, 아관파천에 이르는 격동과 혼란을 경상도 봉화에서 지켜보았다. 보빙사 수원으로 기나긴 여행을 같이 했던 유길준과 한성순보를 같이 펴냈던 장박이 대신으로 ‘벼락출세’를 하더니 하루아침에 역적이 되어 일본으로 도망치고, 자신이 모시고 일했던 당대의 석학이자 거인이었던 김윤식이 목숨을 간신히 건지고 제주로 유배를 가는 것을 먼 곳에서 지켜본 고영철의 심정이 어떠했을지는 상상해 보는 수밖에 없지만 아마도 권력무상, 정치무상을 느꼈지 않았을까 한다.
이상돈, 전 중앙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