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의 노천명과 모윤숙. 두 사람은 이화여전 선후배였지만, 친일 행적에도 불구하고 광복 후 이승만 대통령 배려로 처벌을 면했다. 6.25 전쟁당시에 노천명은 모윤숙을 인민군에게 밀고하는 등 부역자로 재판을 받아 20년 형을 받았지만, 6개월만에 특별 사면으로 풀려났다.
모윤숙(毛允淑, 1910~1990)은 함경도 출신으로 개성에서 공부하고 이화여전 영문과를 졸업했다. 교사로 있으면서 시인으로 등단했고 1937년에 ’렌의 애가(哀歌)‘를 내서 유명해졌다. 그러나 1940년 들어서는 일본의 전쟁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일본군 지원 입대를 촉구하고 찬양하는 노골적인 친일활동을 벌였다. 친일 행위 중에서도 가장 고약한 ’총후(銃後) 활동‘(총 들고 싸우는 군인을 후방에서 성원한다는 의미)을 했다. 같은 이화여전 출신인 김활란과 노천명도 마찬가지였고, 이로 인해 이들은 당연히 친일인사로 분류됐다.
해방 후 모윤숙, 김활란 등은 이승만 부부와 가까워지며, 모윤숙은 유엔 한국위원회 대표인 인도인 메논과 가까이 지내게 된다. 모윤숙은 자기가 메논을 이승만 쪽으로 기울게 했다고 말하는데, 상당 부분 진실에 근접한 이야기이다. 모윤숙과 김활란은 연전에 논란이 됐던 미군장교 사교클럽을 주도했고 파리에서 열린 3차 유엔총회에 대표단 일원으로 참여했다. 이런 모윤숙은 6.25 남침 사흘째인 27일 저녁에 KBS에 나가서 선무방송을 했다. 모윤숙은 이렇게 회고했다.
“6월 27일 저녁에 나는 정동에 있던 KBS에서 정훈국 보도과장 김현수 대령과 함께 방송을 하고 있었어요. 김 대령은 맥아더사령부가 내일(28일) 서울에 설치되니 시민은 동요치 말고 안심하라는 식의 방송을 했고 나는 <국군은 잘 싸우라>는 애국시를 낭독했지요. 그때 이 방송을 믿고 숱한 서울 시민들이 정세 판단을 그르쳐 피난도 가지 못하고 무진 고생들을 한 거지요,” (모윤숙, ‘공산치하의 3개월’ 민족의 증언, 1970년 중앙일보사).
그 후 모윤숙은 지옥과 같은 90일 겪게 된다. 공산군의 숙청대상으로 한강을 건너지 못한 사람들도 큰 고생을 했지만 모윤숙이 겪은 일은 실로 드라마틱 할 뿐 더러 본인이 그 이야기를 자주 했다. 또한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라는 시(詩)를 발표해서 모윤숙은 6.25를 겪은 ‘반공(反共) 명사’의 대표격이 되었다. 모윤숙이 90일 동안 겪은 일은 대략 다음과 같다. 모윤숙은 좌익에 의해 암살 당할 뻔해서 이승만 대통령이 지프차와 운전사를 붙여 주었다. 27일 저녁에 KBS에서 나온 모윤숙은 회현동 집에 들러 딸을 데리고 피난길에 올랐는데, 이화여전 후배인 시인 노천명(盧天命, 1911~1957) 집으로 먹을 것과 옷을 얻기 위해 운전사를 보냈더니 그 사이에 노천명이 공산군에게 밀고를 해서 간신히 도망쳤다. 운전수마저 배신해서 딸과 헤어지고 허름한 옷을 입고 산간 지역으로 피해서 경기도 광주에 이르렀다. 간신히 어느 노인네 집에서 하인처럼 일을 하면서 밥을 빌어먹고 도피하는 생활을 하다가 또 공산군에게 잡힐 지경에 이르자 김현수 대령이 준 독약을 먹고 자살하려 했는데, 독약이 빗물에 젖어서 약효가 떨어져서 정신을 잃는데 그쳤다. 그러다가 국군에 의해 구조됐는데 완전히 거지 꼴이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모윤숙은 이 같은 드라마틱한 도피 생활을 50~60년대에 여러 차례에 걸쳐 언론에 소개했다. 모윤숙의 체험은 무엇보다 생생한 반공 교육이었기 때문이다. 1968년에 나온 모윤숙의 회고록 <회상의 창가에서>의 358~383쪽에 90일간의 도피 생활이 정리되어 있으며 말년에 뇌졸중으로 반신을 쓰지 못하면서 구술로 남긴 상세한 회고문 ‘모윤숙의 6.25 증언‘이 국방부가 발간하는 <호국> 잡지 1986년 6월 1일자 36~44쪽에도 실려있다. 이 같은 모윤숙의 체험기는 서로 간에 충돌하는 곳도 있고 의아한 구석도 적지 않은데, 기억에 의존해서 기록한 탓도 있겠으나 자신을 과장하기 위해 부풀린 측면도 있어 보인다. 모윤숙의 행적을 비판적으로 보는 논문도 2000년대 들어서 발표되었는데, 주로 기억에 의존한 서사(敍事)가 과연 합당하느냐, 반공 이념을 전파하기 위해 서사를 한 것이 아니냐 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도 모윤숙의 기록은 의아한 부분도 있고 시간 대가 맞지 않는 곳이 있다. 모윤숙은 신성모 국방장관으로부터 전화를 받고 방송을 나갔다고 하기도 했고, 국방장관 비서로부터 방송에 나가라는 이 대통령의 지시를 받았다고도 했다. 그런데 26~27일에 신성모 장관이나 이승만 대통령이 모윤숙한테 KBS에 나가 방송을 하라고 연락을 했을까 하는 의문이 있다. 26일 들어 전황이 심상치 않자 그날 밤 자정 넘어서 27일로 넘어 가는 시각에 이승만 대통령은 이철원 공보처장 등과 함께 경무대를 빠져 나왔는데, 그런 상황에서 모윤숙한데 방송을 하라고 지시했을 것 같지는 않다.
1968년 회고록에서 모윤숙은 27일 저녁에 방송을 마치고 회현동에 있는 집으로 가는 길에 이미 공산군이 시내에 들어왔고 그들이 자기 집을 다녀갔으며, 거리에는 공산군을 환영하는 인파가 있었고, 자기가 방송국을 나오고 30분이 지나서 김현수 대령은 공산군 탱크로부터 총격을 받고 죽었음을 나중에 알게 됐다고 썼다. 1980년 <호국> 잡지 회고문에서도 방송국을 나오니까 광화문에 적 탱크가 와 있었고, 회현동 집에 들어가 보니까 공산군이 자기 집을 한 차례 습격한 후였고 딸이 벌벌 떨고 있었고 복도에 탄피가 우박 쏟아진 듯이 떨어져 있었다고 회고했다.
문제는 이런 일이 6월 27일 저녁에 발생할 수 있나 하는 점이다. 6.25 남침 초기에 서울을 잃어버린 과정은 익히 알려져 있다. 북한군 주력부대는 ’의정부 회랑(回廊)’을 통해 서울로 들어왔다. 국군은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을 상대로 치열하게 싸웠으나 26일 저녁에 의정부 방어선이 무너졌다. 서울을 지키는 마지막 방어선인 미아리는 27일 자정을 넘은 28일 01시경 무너졌고 북한군 탱크는 미아리 고개를 넘었다. 북한군은 28일 아침에 혜화동에 도달했고 11시경 시내에 들어왔다. 시내 곳곳에서 국군이 시가전을 벌였으나 28일 저녁에 서울 전역이 공산군 수중에 들어갔다. 항전했던 국군은 대부분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혀 처형됐다. 따라서 모윤숙이 27일 저녁부터 밤 사이에 겪었다는 일은 28일 늦은 저녁부터나 가능한 이야기다.
모윤숙의 도피 생활 중 가장 극적인 순간은 친구이며 후배였던 시인 노천명의 배신이다. 도피 과정에서 모윤숙은 6.25 직전까지 내무장관을 지낸 김효석이 공산군을 지지하는 녹음 연설을 들었다고 기록했다. 김효석뿐 아니라 노천명도 공산군과 김일성을 지지하는 연설을 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들은 모윤숙 같은 반역자들은 자수해서 광명을 찾으라고 마이크를 잡았다. 유엔군과 국군이 서울을 수복하게 되자 공산군은 많은 사람들을 납치해서 북으로 데리고 갔다. 정인보, 현상윤, 이광수는 물론이고 괜찮을 줄 알고 남아 있던 서울지방법원 판사들도 북으로 잡혀가서 죽었다. 6.25 직전까지 1년 넘게 내무장관을 지낸 김효석은 공산군을 따라서 북으로 넘어가서 북한에서 통일인지 뭔지 하는 자리를 하다가 죽었다. 남한에 남아 있으면 부역자로 처벌받을 것이 두려워서 북으로 올라갔는지, 원래 좌익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노천명은 국군에 체포되어 부역자로 군사재판에 회부됐다. 국회가 소급입법으로 제정한 부역자처벌법은 엄격했다. 공산군에 편들어 마이크를 잡았고 밀고를 했으면 사형감이었다. 군 검찰은 노천명에게 사형을 구형했고 재판부는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비상계엄하의 단심 재판이었다. 노천명이 이름난 시인, 특히 여성 시인이 아니었다면 사형선고를 받고 집행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노천명은 6개월 후에 풀려났다. 이승만 대통령의 공보비서이던 시인 김광섭이 공보처 차장 이헌구, 공보국장 이건혁과 함께 탄원서를 써서 노천명은 석방된 것이다. 시인 김광섭은 1930년대에 노천명과 같이 활동했던 인연이 있고, 이헌구는 노천명과 함께 1935년부터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를 지냈으며 이건혁도 그 시기에 조선일보 기자였다.
노천명이 6개월 만에 풀려난 일은 말이 많았다. 약 150명이 부역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됐고 재판을 거치지 않고 부역을 했다는 혐의로 처형된 사람도 많았기 때문인데, 특히 비운의 젊은 영문학자 이인수(1916~1950)와 비교가 됐다. 실력있는 영문학자 이인수는 공산군에 잡혀서 공산군을 지지하는 연설을 하고 영어 번역을 했다. 유엔군이 서울에 진입하자 이인수는 공산군 대열에서 탈출해서 미 해병대에 귀순했다. 그는 국군에 인계됐고 부역활동을 감시해 온 특무대에 의해 그대로 총살됐다. 이인수는 자기가 공산군에 잡혀서 할 수 없이 공산군을 도왔으니까 괜찮을 줄 알았던 것이다. 노천명은 자유의 몸이 됐으나 ‘부역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불우하게 살다가 45세로 빨리 사망했다. 모윤숙은 그 후 PEN 한국지부장과 공화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지내는 등 화려한 생을 보내고 80세에 사망했다.
이상돈, 전 중앙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