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한성의 정문인 숭례문. 국보 1호

서거정의 <필원잡기>에 실린 글 “성석린은 젊어서부터 뜻이 드높아 큰 절개가 있었다....젊은 시절 너덧 명의 동료들과 더불어 정방(政房)에 있었는데 신돈이 뒷짐을 지고 곁에서 보다가 문경(성석린)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끝내 반드시 크게 현달할 것이니, 그 복덕은 제군들이 미칠 바 아니다’고 하였는데 마침내 그 말과 같았으니, 늙은 역적 신돈도 사람을 알아보는 눈을 갖추었다 하겠다.”

성석린은 학식과 덕망으로 고려 말기의 40여년 간 하급 실무직부터 차관급의 고위직까지 다양한 직책을 역임했고, 중앙행정 부서의 업무를 종합적으로 파악하여 처리하는 능력이 있었다.

1395년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한성부로 개편할 때 성석린을 판한성부사로 임명, 초대 서울시장이 되었다.

성석린이 86세로 사망했을 때 세종은 3일 동안 조회를 열지 않았으며, 문경(文景)이란 시호를 내렸는데, 문(文)은 도덕을 널리 알린 것을 의미하며, 경(景)은 의리에 행하여 이루어진 것을 뜻한다.

참고로 <논어>를 보면 子貢問曰, “孔文子何以謂之文也?” 子曰, “敏而好學, 不恥下問, 是以謂之文也.” 란 말이 나오는데, 우리 말로 풀이하면 "자공이 공문자를 어찌하여 문(文)이라고 시호하였습니까?"라고 질문하자, 공자가 말하길 "명민하면서도 배우기를 좋아하였으며 아랫사람에게 묻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문(文)이라 시호한 것이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공문자는 중국 춘추시대 위나라 대부였는데, 위나라 태숙질을 이혼시키고 자신의 딸과 결혼시킨 후 태숙질이 외도를 하자 사위인 태숙질을 죽이려 했고, 공자의 만류로 죽이는 것을 포기하고 딸을 다시 데려왔다가, 후에 태숙질의 자리를 차지한 그의 동생에게 딸을 다시 시집보낸 인물이다.

공자의 제자가 공자에게 그런 사람에게 문(文)이란 시호를 내린 것에 이상히 여겨 질문을 한 것인데, 공자는 “그는 사람됨이 문제가 많았어도 시호를 문이라고 한 것은, 명민하면서도 배우기를 좋아했고 아랫사람에게 질문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조선시대에도 시호를 내릴 때 문(文)이 들어간 것을 가장 영광스럽게 생각했다. 성리학을 도입한 회헌 안향(安珦)은 문헌공(文軒公)이고, 퇴계 이황은 문순공(文純公)이며, 율곡 이이는 문성공(文成公)이다. 문(文)이라는 시호를 붙이려면 천지를 경위하는 자, 도덕이 넓고 두터운 자, 학문에 근면하고 묻는 것을 좋아하는 자, 자혜로우며 백성을 사랑하는 자, 백성에게 직위를 수여하는 자 등에 해당됐다. 민이호학(敏而好學) 불치하문(不恥下問)이야말로 문의 진짜 자세였다

똑똑하면서도 자만하지 않고 배우기를 즐기고, 모르는 것은 아랫사람에게라도 서슴지 않고 질문하는 것이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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