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아프리카 모가디쉬 전투에서 미군 18명이 전사하고 8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당시 미국의 클린턴과 우리나라 김영삼은 북한 영변 핵 근거지 폭격을 두고 고민했지만, 김영삼의 반대로 영변 공격은 포기했다. 이로써 북한이 핵 무장을 하는 계기가 마련됐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 핵시설 폭격을 명령해서 이란의 핵 프로그램은 치명타를 입은 것으로 보인다. 이를 두고 한편에선 위험한 도박이라고 비난하고, 또 한편에서는 김영삼 대통령이 영변 핵시설 폭격을 반대하지 않았다면 북한이 핵폭탄을 갖게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1993년 초, 미국과 한국에서 의미있는 정권 교체가 있었다. 미국은 전후(戰後) 부머 세대인 클린턴이 대통령에 취임했고 우리나라에선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화려하게 문을 열었다. 냉전을 끝내고 걸프 전쟁을 승리로 이끈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은 1992년 여름이 지나면서 민주당 후보 클린턴에게 밀리기 시작했고 TV 토론을 거치면서 만회할 기회를 잃어버렸다. 부시 대통령이 그렇게 무기력해진 것을 두고 ‘승리의 피로감’(Victory Fatigue)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 1989년 취임 직후부터 중국 베이징에서 일어난 천안문 사태, 동유럽 민주화 운동과 베를린 장벽 붕괴, 그리고 소련의 와해와 동유럽 국가들의 자유화 등 몇 년 전만해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일어났다. 동유럽 문제가 진정되어가던 시점에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점령하자 부시 대통령은 유엔 안보리에 이 문제를 회부하고 '사막의 폭풍(Desert Storm)' 작전으로 쿠웨이트를 해방하고 이라크의 군사력을 와해시켰다.
3년 동안에 많은 일을 해내다 보니 부시와 그의 안보 팀은 피로감에 시달렸고, 특히 부시 대통령은 허탈감마저 느꼈다고 전해진다. 부시 대통령은 국내 문제를 들여다 볼 여유도 없었고 닥쳐오는 92년 대선에 대해서도 그러했다. 부시와 그의 안보 팀은 소련 연방에서 이탈한 우크라이나 등이 서방으로 편입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밝혀서 좌우 양쪽에서 비판을 들었으나 지금 상황을 보면 부시의 판단이 옳았을 수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경제도 좋지 않았고 제3후보 로스 페로가 표를 잠식해서 부시는 그 해 11월 대선에서 고배를 마셨다. 부시가 마지막으로 이룬 업적은 우크라이나의 핵 물질을 미국이 인수해서 미국 원전에서 연료로 사용토록 한 것이었다. 부시 대통령은 공백 상태에 처한 아프가니스탄, 혼돈에 빠진 소말리아, 그리고 북한 핵 문제를 후임자에게 넘겨주었다.
1946년에 태어난 빌 클린턴은 부머 세대였다. 케네디부터 아버지 부시까지, 2차 대전 때 군에 복무했던 ‘위대한 세대’가 끝나고 곧장 부머 세대로 대통령이 넘어 간 것이다. 클린턴은 대선 도중 베트남 전쟁 중 병역을 교묘하게 회피한 이력 때문에 고생이 많았다. 클린턴이 1948년생인 앨 고어 상원의원을 러닝메이트로 내세운 것도 고어가 하버드 졸업생으로선 매우 드물게 사병으로 입대해서(1000명 중 열 명) 1971년에 반년 동안 베트남에서 종군기자로 근무해서 자신의 병역 논란을 불식시킬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클린턴 취임을 앞두고 부시 대통령은 "대통령은 경우에 따라 군사력을 적절하게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했는데, 병역을 기피해서 군대 콤플렉스가 있는 클린턴을 향해서 한 말로 들렸다.
1992년 대선을 즈음해서 워싱턴 관가에는 북한의 영변 시설에 대해 외과적 폭격(surgical bombing)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부시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면 북한을 폭격할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었으나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하지만 부시 대통령은 물론이고 공군 중장 출신인 브렌트 스코크로프트(Brent Scowcroft 1925~2020) 안보보좌관도 그런 결정을 쉽게 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콜린 파월(Colin Powell 1937~2021) 합참의장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해서 북핵 문제는 클린턴 행정부로 넘어갔고 1993년 3월 북한이 비확산조약 탈퇴를 선언하자 클린턴 대통령은 협상을 제안했다.
클린턴 행정부 8년 동안은 미국 경제가 번영을 누린 태평성대로 알고 있지만 클린턴은 취임 초부터 여러 가지 악재에 시달렸다. 최초의 여성 법무장관으로 지명한 조 베어드(Zoe Baird 1952~)가 불법이민자를 가정부로 오랫동안 써왔음이 밝혀져서 물러나는 등 처음부터 흠집이 났다. 2월 26일, 뉴욕 세계무역센터 주차장에서 대폭발이 일어나서 하마터면 건물이 무너질 뻔 했다. FBI는 범인을 체포하고 배후에 알카에다라는 테러조직이 있음을 밝혀냈으나 클린턴은 그 심각성을 체감하지 못했다. 2월 28일에는 텍사스 웨이코에 있는 신흥종교집단을 검색하려던 연방요원들이 총격을 당해서 여러 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FBI 등 연방기관 요원들이 50일 동안 그 집단을 포위한 후 진압에 들어갔으나 그 과정에서 총격전과 화재가 발생해서 어린이들을 포함해 74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클린턴 정부의 위기관리 능력이 그대로 폭로된 셈이었다.
미국에서 두 번째로 가난한 주(州)인 아칸소 주지사를 지낸 클린턴은 안보와 외교에 대한 소양과 경험이 부족했다. 병역을 기피한 그는 군사 문제를 결정하는 자체를 싫어했다. 클린턴은 의회에서 군사 전문가로 평가되어온 레스 애스핀(Les Aspin 1938~1995) 하원의원을 국방장관으로 임명했다. 애스핀 장관이 다룬 첫 과제는 동성애자를 군에서 허용하는 문제였다. 애스핀은 또한 군비를 축소하겠다고 공언했다. 아직 임기 중인 콜린 파월 합참의장은 이러한 애스핀 장관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해 6월 6일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50주년이라서 클린턴은 할 수 없이 엄숙한 표정을 지으면서 현지 행사에 참석했다. (10년 전인 40주년 행사 때에는 레이건 대통령이 오마하 비치 언덕 위에서 명연설을 해서 모든 사람의 심금(心琴)을 울렸다.)
이 와중에 유엔평화유지군에 맡겼던 소말리아 사태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소말리아에 주둔해 있던 미군이 소말리아 군벌과 충돌했다. 구호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소규모 미군 병력이 민병대의 공격으로 피해를 보자 클린턴 대통령은 민병대를 섬멸하기 위한 군사작전을 승인했다. 8월 22일, 레인저 부대와 델타 포스를 주축으로 한 441명 규모의 병력이 현지에 도착했고 9월부터 군벌과 전투를 시작했다. 이를 ‘모가디쉬 전투’라고 부르는데, 특히 10월 3일 하루 동안 블랙호크 헬기 두 대가 격추되는 등 미군은 고전(苦戰)했다. (영화 <블랙호크 다운>으로 우리에게 매우 친숙하다.)
모가디쉬 작전은 레스 애스핀 국방장관이 밀어 붙였는데, 콜린 파월 합참의장은 미국의 국익이 중요하게 걸려있지도 않은 소말리아에 충분하지 않은 병력을 보내는데 반대했으나 대통령과 국방장관이 밀어 붙여서 할 수 없이 동의했다. 파월은 애스핀 장관이 탱크와 공중화력지원기가 필요하다는 군의 요청을 거부한 데 대해 격분했다. 예상대로 작전이 잘 풀리지 않자 파월은 임기 만료 한 달을 앞둔 9월 30일에 사표를 제출했다. 파월은 그가 사표를 내고 사흘 후에 ‘블랙호크 다운’ 상황이 벌어질 줄은 몰랐을 것이다. 모가디쉬 전투에서 미군 18명이 전사하고 8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델타포스와 레인저 부대에서 이런 피해가 났으니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모가디쉬 전투가 대참사로 끝나자 의회에선 공화당 의원들을 중심으로 비판이 일었다. 클린턴 대통령 자체가 혼쭐이 났다. 클린턴은 탱크와 공중화력지원기를 보내지 않은 결정에 백악관은 간여하지 않았다고 궁색하게 변명했다. 12월 15일 레스 애스핀 장관은 사태에 책임을 지고 사표를 냈다. 공화당 의원들과 보수 평론가들은 병역기피자를 대통령으로 뽑으면 저 모양이 된다고 비웃었다.
클린턴은 애스핀 장관 후임으로 윌리엄 페리(1927~) 국방차관을 임명했다. 당시 국방부와 합참은 북핵을 제거하는 군사적 방안을 대안으로 강구하고 있었는데, 소말리아 사태로 기가 꺽인 클린턴에 대해 북한은 협상 속개를 제의했다. 1994년 6월, 전직 대통령 지미 카터가 북한을 방문해서 김일성을 만났다. 군사 조치에 자신감을 상실한 클린턴, 그리고 전쟁 위험을 피해야 한다고 생각한 김영삼 정부는 북한과의 협상을 지지했고, 10월 12일 제네바에서 북핵 협정이 체결됐다. 그리고 그 다음은 우리가 모두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영화로 본 <블랙호크 다운>이 한반도에도 영향을 미친 셈이다.
그 해 11월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은 역대급 승리를 거두었다. 공화당 44석, 민주당 56석이던 상원은 공화당 52석, 민주당 48석이 됐고, 공화당 176석, 민주당 258석이던 하원은 공화당 230석, 민주당 204석으로 공화당이 양원을 완전히 장악했다. 주지사 선거에서도 공화당이 10곳을 추가해서 공화당 주지사가 30개 주를 차지했다. 그 때 조지 W. 부시가 텍사스 주지사로 당선됐다. 1992년 대선에서 조지 H.W. 부시가 재선에 성공했더라면 카터가 평양을 방문할 일도 없었고 부시는 강도 높은 압박을 통해서 북핵을 해결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지만, 역사에서 가정은 무의미한 것이다. 1990년 쿠웨이트 사태 때에도 카터는 제멋대로 사담 후세인을 만나려고 했으나 부시 백악관이 카터에 대해 그러면 반역죄로 기소될 수 있다고 통보해서 포기한 적이 있다. 45년 동안 대통령 연금을 타먹은 카터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상돈, 전 중앙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