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관악캠퍼스 10동 앞에서 50년 전을 생각하면서..... 지금은 10동을 사범대가 쓰고 있으나 그 때는 법대가 사용했다. 검은 벽돌과 시멘트로 지은 똑 같이 생긴 4층 건물이 1동부터 번호를 붙여서 세웠고, 입구에 학과 명칭 간판이 있었다. 동숭동 캠퍼스 건물에 비한다면 똑 같은 건물을 번호로 붙여 세워서 솔제니친의 소설에 나오는 수용소와 비슷하다고 자조(自嘲)했는데, 반세기 세월이 흘러가서 나무가 울창하고 현대식 건물이 빽빽하게 들어선 메가 캠퍼스가 되었다.
가랑비가 내리던 지난 주말 서울대 관악 캠퍼스를 실로 오랜만에 산책할 기회가 있었다. 서울대 박물관을 갔던 때가 20년 전이고 호암관을 마지막으로 들렀던 때도 20년이 훌쩍 넘은 것 같으니 세월이 많이 흘렀다. 돌이켜 보면 금년이 서울대 관악 캠퍼스가 생긴지 50년이 되는 해이다. 1970년에 입학한 나는 1학년 교양과정은 당시 공대가 있던 공릉동에서 공부를 했다. 8.15 광복 후 경성제국대학과 경성법전, 경성의전, 경성공전 등 여러 국립대학을 합쳐서 만든 서울대는 캠퍼스가 여러 곳에 있었다. 그래서 서울대생은 동질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해서 공대가 있던 머나 먼 공릉동 캠퍼스에서 1학년 교양과정을 의예과를 제외한 모든 학과가 같이 다녔다. 그 때부터 서울대 전체가 관악산으로 옮겨간다는 말이 있었고, 실제로 박정희 정부는 그 즈음부터 서울 시내에 흩어져 있던 단과대학을 하나의 거대한 캠퍼스로 옮기는 계획을 밀고 나갔다.
2학년이 되자 동숭동 법대 캠퍼스에서 공부를 하게됐고 비로소 대학가라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대학 본관이 있는 문리대 캠퍼스는 푸근하고 낭만적이었다. 건너편에 학림(學林)다방과 중국음식점 공화춘(共華春)은 그 거리의 명소였다. 1970년대 동숭동 대학가는 시위와 휴교령이 계속되던 시절이었다. 대학원 1학년까지 동숭동 캠퍼스에서 보내고 2학년이던 1975년 봄 학기부터는 머나먼 관악산 캠퍼스로 옮겨가게 됐으니 나는 그 때 1년만 늦게 관악으로 이사를 했으면 얼마나 편했을까 하고 생각했었다. 여하튼 1975년 1학기를 앞두고 동숭동에 있던 문리대, 법대, 미대, 그리고 을지로 등지에 있던 음대, 상대, 사대가 일거에 관악 캠퍼스로 옮겼고 그 후 공대와 농대 등 의대를 제외한 모든 대학이 관악 캠퍼스로 이전했다.
그 넓은 산기슭 땅에 있던 골프장을 내보내고 서울대 캠퍼스를 세웠으니 그런 행정권력은 박정희 정권이니까 가능했다. 그렇게 넓은 부지를 그 시절에 확보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대단한 선견지명(先見之明)이었다. 서울 시내에 있던 서울대 단과대학에서 툭하면 시위를 해서 그 꼴이 보기 싫어서 관악산 구석으로 보내버린 것이라고 우리들은 수군거리기도 했다. 오늘날 서울대 관악 캠퍼스는 건물이 촘촘하게 들어섰고 신림동과 봉천동은 번화가가 되어 있으나 50년 전 그곳은 황량했었다. 나는 대학원 2학년을 관악에서 보냈고 1976년 2월 관악에서 열린 첫 졸업식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지금 관악 캠퍼스는 나무가 울창해서 주변 산과 더불어 국립공원이 부럽지 않을 만하다. 하지만 50년 전에는 골프장이 있던 곳이라서 그냥 잔디밭이고 나무 그늘이 없었다. 대학 본부와 도서관을 제외하곤 모든 건물이 성냥곽 같은 벽돌 시멘트 건물이었고 그것도 1동부터 11동까지 번호가 붙어 있어서 천박해 보였다. 그래서 동숭동에 두고 온 유서 깊은 석조건물과 마로니에가 그리웠다. 법대는 제일 위쪽에 있는 10동을 사용했고 그 옆 11동에는 체육학과가 있었다. 10동 만으로 부족해서 옆 동 건물의 일부를 법대가 사용했으니, 우리는 박정희 대통령이 서울 법대가 얼마나 미웠기에 우리를 이런 구석으로 보냈겠느냐고 말하곤 했다. (5.16 후 최고회의 시절에 박정희는 300명이던 법대 정원을 160명으로 줄였고 그 대신 공대 정원을 늘렸다. 국가 발전에는 공대가 중요하고 법대는 골칫거리들이나 가는 대학으로 보지 않았나 한다.)
관악 캠퍼스가 문을 연 1975년 봄 우리 사회는 어수선하고 암울했다. 1974년 말부터 75년 초까지는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가 있었고 결국 동아 기자들이 해고되는 사태로 발전했다. 1975년 초부터 남베트남과 캄보디아 상황이 심상치 않더니 4월 들어서 캄보디아와 남베트남이 공산군 수중에 떨어졌다. 특히 4월 30일 사이공 함락은 우리나라에서도 큰 충격이었다. 남베트남 공산화가 남의 일 같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인 4월 초에 인혁당 피고인들이 교수형을 당했다. 무슨 명목이었는지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긴급조치가 있었고 이에 항의해서 서울 농대생이 할복하는 비극적 일이 있었다. 한마디로 혼돈 그 자체였으나 그런 중에도 나는 석사 논문을 준비하면서 미국 헌법과 대법원 공부에 빠져 있었다.
4월 30일에 사이공이 함락되자 곳곳에서는 안보 궐기대회가 열렸는데, 서울대도 예외가 아니었다. 5월 중순쯤으로 기억되는데, 서울대 본관 앞 광장에서 교수와 직원 그리고 조교와 대학원생들이 줄을 서서 누군가 연단에서 읽어 내리는 ‘우리의 결의’를 경청하고 국가안보를 굳게 다짐했다. 당시 법대 학장은 김증한 교수님이고 교무학장보는 김철수 교수님이며 학생학장보는 양승규 교수님이었다. 법대는 대학원생 대부분이 절에 들어가서 고시 공부를 하고 있어서 그날 참석한 법대 조교와 대학원생은 나를 포함해서 4~5명밖에 되지 않았다. 나한테는 은사이기도 한 김증한(작고), 김철수(작고), 양승규 교수님은 보직 교수이기 때문에 꼼짝없이 그 궐기대회 대열에 서있었어야 했다.
관악 캠퍼스 초기에는 학내 식당도 변변치 않았다. 법대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골프장 시절의 클럽 하우스가 있었는데 비프가스와 돈가스 정식이 주된 메뉴였다. 통유리창을 통해 관악산 능선을 볼 수 있어서 경치도 좋았으나 특별한 날이나 가는 곳이었다. 그곳에 가는 도중에 허름한 칼국수 식당이 있어서 자주 이용하곤 했다. 이 클럽 하우스는 근래에 철거했다고 들었는데, 어디였는지 도저히 짐작이 되지 않았다.
대학원 졸업 후 군 복무와 유학을 마치고 나니 7년 세월이 훌쩍 지났고, 중앙대에 자리를 잡은 나는 모교에서 1983~84년간 교양과목 법학개론을 강사로 가르쳤고 1990년대 초에 환경법을 가르쳤다. 그 후 나는 모교와는 별다른 교류가 없었다. 법대는 그 후 기금을 모아서 별도 건물과 도서관을 건립했으나 나는 들어가 본 적도 없다. 이번에 캠퍼스를 돌아보니 공과대학 건물이 무척 많이 들어서서 대단하다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현대가 기증한 자동차 연구동 등 각 학과마다 거대한 최신식 건물이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 학생들이 공대를 기피하는 탓에 대학원생이 부족해서 베트남, 중국, 인도 유학생이 그 공백을 메우고 있다고 하니, 정말 이러다간 큰 일이 날 것 같다. 이런 상황을 두고 서울대를 10개 만들자는 이야기가 선거판에 나오니 황당하지 않는가?
이상돈, 전 중앙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