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3 비상계엄 당시 국회 모습. 출동한 군인들과 이를 저지하는 시민들이 한데 엉켜있다. 사진은 당시 TV 화면 캡쳐

헌법 수호자가 헌법을 파괴한 역설

2024년 12월 3일 밤 10시 27분, 윤석열은 국회를 "범죄자 집단의 소굴"로 규정하며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헌법 제77조에 따르면 대통령은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 있어서 병력으로써 군사상의 필요에 응하거나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 때" 계엄을 선포할 수 있다. 그러나 윤석열의 계엄 선포는 명백한 헌법 위반이었다. 헌법 수호의 책임을 진 대통령이 오히려 헌법을 파괴하는 계엄령을 선포한 것은 중대한 헌법 질서 위반이자 모순이었다.

한국 현대사 속의 계엄령: 독재의 도구로 변질

계엄령은 본래 전시나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서 헌법 질서를 보호하기 위한 일시적 비상조치다. 그러나 한국 현대사에서 계엄령은 오히려 헌법 질서를 파괴하는 수단으로 악용돼왔다.한국 민주화운동 역사를 통해 계엄령은 다음과 같이 선포되어 왔다.

2•28대구민주화운동과 3•8대전민주의거 당시에는 계엄령이 선포되지 않았으나, 3•15의거와 4•19혁명 과정에서 이승만 정부는 시위 진압을 위해 1960년 4월 19일 서울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그러나 시민들의 저항이 더욱 확산되면서 결국 4월 26일 이승만이 하야하고 계엄령도 해제되었다.

6•3한일회담 반대운동 당시 박정희 정부는 전국적 계엄령 대신 1964년 6월 3일 서울 일원에 위수령을 발령하고 군대를 동원해 시위를 진압했다. 위수령은 계엄보다 제한적이지만 실질적으로 군대가 치안유지에 개입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3선개헌 반대운동 시기에는 계엄령이 선포되지 않았으나, 유신헌법 반대운동 초기인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정권은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며 유신을 선포했다. 이 계엄은 1974년 1월 8일까지 지속되었고, 이후에는 9차례의 긴급조치가 발동되어 사실상 계엄 상태와 유사한 상황이 유지되었다. 부마항쟁 당시 정부는 1979년 10월 18일 부산에, 10월 20일에는 마산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10월 26일 박정희 서거 후에는 전국으로 계엄령이 확대되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직전인 1980년 5월 17일에는 전국적으로 계엄이 확대되었고, 이는 1981년 1월 24일에야 해제되었다. 이 기간 동안 계엄은 신군부의 권력 장악을 위한 도구로 활용되었다.

인천5•3민주항쟁과 6•10항쟁 당시에는 계엄령이 선포되지 않았지만, 대규모 경찰력이 동원되어 시위가 진압되었다.

12.3 민주수호운동에서는 윤석열이 2024년 12월 3일 밤 비상계엄을 선포했으나, 시민들의 즉각적인 저항으로 12월 4일 새벽 철회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패턴을 보면, 한국에서 계엄령은 국가 안보와 질서 회복이라는 명분 아래 오히려 헌법 질서를 파괴하는 수단으로 악용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윤석열의 계엄 선포 역시 과거 독재 권력이 사용한 것과 동일한 논리와 방식을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국가폭력의 진화와 일관된 목표

한국 현대사에서 국가폭력은 그 형태가 진화했으나 목표는 일관되게 '권력의 집중과 유지'였다.

경찰력 중심의 초기 탄압에서 시작된 국가폭력은 4•19혁명과 3•15 의거 당시 주로 경찰력을 동원한 진압으로 나타났다. 이후 군대를 동원한 폭력으로 진화하여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부마항쟁에서는 계엄군, 특히 공수부대를 투입한 대규모 진압이 자행됐다.

유신시대에는 법적•제도적 장치를 통한 일상적 탄압이 특징이었으며, 유신헌법과 긴급조치를 통해 민주주의가 체계적으로 억압됐다. 이어 정보기관을 활용한 사찰과 고문이 자행되면서 중앙정보부, 안기부 등이 민주화 세력을 탄압하는 주체로 등장했다.

윤석열 계엄 시도는 이러한 국가폭력 형태의 현대적 융합을 보여준다. 방첩사령부와 HID 특수부대 등 정보기관과 군사력을 결합한 고도화된 국가폭력 형태가 등장한 것이다.

윤석열의 계엄 계획에서 특히 주목할 점은 과거 국가폭력의 모든 요소를 집약했다는 점이다. 방첩사령부를 통한 정치인 체포 계획, 언론인 '수거작전', 국회와 선거관리위원회 장악 시도 등은 과거 독재 정권의 교과서를 그대로 따른 것이다.

5•18과 윤석열 계엄의 유사점

계엄령은 본래 전시나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서 헌법 질서를 보호하기 위한 일시적 비상조치다. 그러나 한국 현대사에서 계엄령은 오히려 헌법 질서를 파괴하는 수단으로 악용됐다.

윤석열 계엄 계획에서 주목할 점은 5•18 당시와 놀랍도록 유사한 패턴을 보인다는 것이다.

군 병력 동원에서 첫 번째 유사성이 드러난다. 5•18 당시에는 공수부대를 투입했고, 윤석열은 방첩사령부와 HID 특수부대를 동원하려 했다. 정치인 체포라는 전략도 그대로 답습했다. 5•18 직전 김대중, 김영삼 등 정치인들이 연행됐던 것처럼, 윤석열은 우원식, 이재명 등 야당 인사들을 체포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언론 통제 역시 동일한 수법이었다. 5•18 당시 언론은 철저히 검열됐고, 윤석열도 MBC 등 비판적 언론사를 장악하려 했다. 궁극적으로 두 사건 모두 체제 전복이 목표였다.

윤석열 계엄의 독특한 위험성: 국가존립의 위기로 이어질 수 있었던 시나리오

윤석열 계엄이 과거 독재정권의 계엄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북한의 핵 보유라는 새로운 변수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시뮬레이션 결과에 따르면, 윤석열 정권은 국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남북 국지전을 유도할 가능성이 컸다.

시뮬레이션 분석에 따르면, 윤석열 계엄은 단순한 국내 정치 위기를 넘어 심각한 안보 위기로 비화될 가능성이 컸다. 국내 정치 위기 극복을 위해 북한과의 군사적 충돌을 의도적으로 유도할 우려가 있었으며, 이는 북한의 핵 위협 고조와 국제사회의 개입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특히 한반도 주변 4강(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의 군사적 개입 가능성이 높았고, 최악의 경우 지역적 충돌이 핵전쟁으로 확대될 위험성마저 존재했다.

이는 과거 독재 정권의 국가폭력과는 차원이 다른 위험이다. 5•18 당시 전두환 정권은 국가폭력으로 민주주의를 억압했지만, 국가 존립 자체를 위협하지는 않았다. 반면 윤석열의 계엄은 최악의 경우 한반도 전체의 멸망으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천만한 도박이었다.

민주주의의 미완성된 과제

윤석열 계엄 시도는 한국 민주주의가 여전히 공고화 과정에 있음을 보여준다. 87년 민주화 이후 형식적 민주주의는 달성했으나, 군과 정보기관에 대한 민간 통제, 권력 집중 방지를 위한 제도적 장치 등 실질적 민주주의를 위한 과제는 남아있다. 계엄 선포 권한에 대한 민주적 통제 강화, 군과 정보기관에 대한 효과적인 민간 감독 체계 구축, 민주주의 위기 시 시민 참여와 저항을 위한 제도적 보장, 독재 회귀 시도에 대한 헌법적 방어 장치 마련 등이 필요하다. 시민들의 12시간 저항으로 윤석열 계엄은 좌절됐지만, 이러한 시도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제도적 개혁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있다.

역사의 교훈과 시민의 승리

윤석열 계엄 시도는 한국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구체적인 계획과 실행까지 진전된

심각한 민주주의 위기였다. 그러나 이를 막아낸 것은 4•19혁명부터 6•10항쟁까지 이어진 민주화운동의 경험과 교훈이었다. 때로는 역사의 진보가 너무 느리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이승만 독재에 맞선 학생들부터 윤석열 계엄에 맞선 시민들까지, 한국 민주주의는 한 걸음씩 전진해왔다. 윤석열 계엄에 대한 승리는 과거 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의 유산이자, 미래 세대에게 물려줄 소중한 민주주의 경험이다. 민주주의는 완성된 제도가 아니라 끊임없이 지켜나가야 할 과정이다. 윤석열 계엄 사태는 이 오래된 격언의 진실을 다시 한번 일깨웠다.

독립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