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3일 비상계엄을 선포하는 장면. TV화면 캡쳐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와 이에 맞선 시민 저항인 '12.3 민주수호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조명하는 특별 기획 시리즈를 마련했다. 이 시리즈는 2•28대구민주화운동부터 6•10항쟁까지 한국 민주화운동 60년의 맥락 속에서 12.3 민주수호운동을 분석하고, 민주주의가 불과 12시간 만에 지켜질 수 있었던 배경을 탐구한다. 총 4부작으로 구성된 이번 기획은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교훈, 계엄과 국가폭력의 법적•정치적 분석, 그리고 12시간의 시민 저항 타임라인을 다룬다. 이를 통해 우리는 60년 민주화투쟁의 결과로 한국 민주주의가 어떻게 성숙해왔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과제가 남아있는지 성찰하고자 한다.
12시간의 기적, 60년 민주화투쟁의 결실
2024년 12월 3일 밤 10시 27분, 윤석열이 비상계엄을 선포했을 때, 대한민국은 87년 민주화 이후 최대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불과 12시간 만에 시민들의 저항으로 계엄이 철회되는 전례 없는 승리가 이루어졌다. 이 '12시간의 승리'는 2•28대구민주화운동부터 시작된 한국 민주화운동 60년의 경험과 교훈이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법은 민주화운동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권위주의적 통치에 항거하여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회복•신장시킨 활동"으로 정의한다. 이 정의에 따라 현재 한국에서는 11개의 민주화운동이 공식 지정되어 있으며, 각각의 운동은 서로 다른 시기와 상황에서 민주주의를 위한 국민적 저항의 역사를 보여준다.
12.3 민주수호운동은 이러한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발생한 가장 최근의 사건으로, 과거 민주화운동의 경험과 교훈이 지금의 한국 민주주의를 어떻게 지켜내는지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다.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발전과 12.3 민주수호운동
초기 민주화운동: 독재에 대한 첫 저항
● 2•28대구민주화운동(1960년)은 한국 최초의 자발적 민주화운동으로,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와 독재에 항거해 대구의 고등학생들이 주도했다. 이 운동은 직접적인 사망자는 없었지만,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 3•8대전민주의거(1960년)는 2•28운동에 이어 대전 지역 학생들이 "우리는 자유의 횃불을 밝혀 이 어둠을 헤치고 나가자"라는 구호 아래 일으킨 시위였다. 이 역시 직접적인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민주화운동의 전국적 확산에 기여했다.
● 3•15의거(1960년)는 마산에서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에 항의한 시위로, 경찰의 발포로 약 8명이 사망하고 60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다. 특히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면서 국민적 분노를 촉발했다.
● 4•19혁명(1960년)은 약 184명의 사망자와 6,000명 이상의 부상자를 낳은 대규모 민주화운동으로, 결국 이승만의 하야를 이끌어냈다. 이는 한국 역사상 최초로 시민의 힘으로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사건이었다.
중기 민주화운동: 저항의 확산과 심화
● 6•3한일회담 반대운동(1964년)은 박정희 정부의 대일 외교 정책에 반대한 운동으로, 이 과정에서 정부는 서울 일원에 위수령을 발령하고 약 1,200명을 연행했다. 이 운동은 박정희 정권의 권위주의적 통치에 대한 최초의 대규모 저항이었다.
● 3선개헌 반대운동(1969년)은 박정희의 장기집권을 위한 헌법 개정에 반대한 운동으로, 약 1,200명이 연행되고 100명이 구속되었다. 비록 3선개헌을 막지는 못했지만, 독재에 대한 저항 의식을 고취시켰다.
● 유신헌법 반대운동(1972-1979년)은 박정희의 유신체제에 맞서 7년간 지속된 저항운동으로, 이 기간 약 30-40명이 사망하고 10,000명 이상이 연행되었다. 유신체제 기간 동안 총 9차례의 긴급조치가 발동되어 기본권이 크게 제한되었다.
● 부마항쟁(1979년)은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난 대규모 시위로, 이 과정에서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했다. 공식적인 사망자는 없으나 약 500명 이상이 부상을 입고 1,500명 이상이 연행되었다. 이 항쟁은 10•26 사태의 직접적 계기가 되어 유신체제 붕괴에 기여했다.
후기 민주화운동: 대중적 항쟁과 성과
● 5•18 광주민주화운동(1980년)은 신군부의 권력 장악과 전국 계엄 확대에 반대한 항쟁으로, 계엄군의 잔혹한 진압으로 약 165명이 사망하고 3,00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다. 이는 한국 민주화운동 역사에서 가장 큰 인명 피해를 낸 사건으로, 이후 민주화운동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다.
● 인천5•3민주항쟁(1986년)은 개헌과 민주화를 요구한 항쟁으로, 약 5만 명이 참여해 독재타도, 호헌철폐 등의 구호를 외쳤다. 약 300명 이상이 부상을 입고 2,000명 이상이 연행되었으며, 이 항쟁은 6월 항쟁의 중요한 촉매제 역할을 했다.
● 6•10항쟁(1987년)은 전국적으로 전개된 대규모 민주화운동으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이한열 열사의 최루탄 피격이 도화선이 되었다. 이 항쟁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졌으며, 이는 형식적 민주주의 체제의 출발점이 되었다.
민주화운동 방식의 역사적 진화
민주화운동의 방식 역시 시대에 따라 진화해왔다. 이러한 발전이 궁극적으로 12.3 민주수호운동의 신속한 성공에 기여했다.
저항 방식의 발전
● 초기 민주화운동(2•28대구민주화운동, 3•8대전민주의거, 3•15의거, 4•19혁명)에서는 주로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자발적이고 즉자적인 저항이 주를 이뤘다. 이 시기에는 명확한 조직이나 전략 없이 순수한 분노와 정의감에서 비롯된 저항이 특징이었다.
● 중기 민주화운동(6•3한일회담 반대운동, 3선개헌 반대운동, 유신헌법 반대운동)에서는 점차 지식인, 재야, 종교계 등으로 저항 세력이 확대되었고, 비폭력 저항의 원칙이 정립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는 보다 조직적이고 전략적인 저항 방식이 발전했다.
● 후기 민주화운동(부마항쟁, 5•18광주민주화운동, 인천5•3민주항쟁, 6•10항쟁)에서는 학생, 시민, 노동자 등 다양한 계층이 연대하는 전국적 항쟁으로 발전했다. 특히 6•10항쟁에서는 비폭력 원칙이 철저히 지켜지면서도 전략적인 저항이 펼쳐졌다.
● 12.3 민주수호운동에서는 SNS를 통한 실시간 정보 공유, 완전한 비폭력 원칙, 국제사회와의 실시간 연대 등 현대 기술을 활용한 새로운 저항 방식이 나타났다. 이는 과거 민주화운동의 경험과 교훈을 현대적으로 계승하고 발전시킨 결과였다.
60년 민주화운동의 과업 계승
12.3 민주수호운동은 한국 민주화운동 60년의 경험과 교훈이 집약된 사건이다. 2•28대구민주화운동부터 시작된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각 운동의 성과와 한계가 축적되어 마침내 12시간이라는 놀라운 속도로 계엄에 저항하고 승리할 수 있었다.
독립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