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악 선거관리위원장

고려시대부터 시작된 음서(蔭敍)제도가 조선시대를 거쳐 21세기 대한민국의 선거관리위원회에서 불꽃을 가장 확실하게 태우고 있는 것 같다. 음서는 陰(그늘 음)에 敍(순번 서)를 의미하는 말로 은밀히 정해진 순번에 따라 자리를 잡는 것을 말한다.

떳떳하지 못한 것을 일컷는 말인데,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의 음서제도와 현재 우리나라 선거관리위원회에서 채택하고 있는 음서제도는 다른 면이 상당히 있다.

조선시대의 음서제도는 3품 이상 고위관리의 자손으로 과거시험을 보지 않고 간단한 취재(取才)시험을 거쳐 공무원이 되는 제도를 말하는데, 이 경우 과거시험을 통해 관직에 오른 공무원과는 처우가 완전히 달랐다.

조선시대는 문과시험에 합격한 문관은 왕의 동쪽에 무과시험에 합격한 무관은 서쪽에 섰지만, 음서로 관직을 얻은 사람은 아전과 동류로 취급돼 남쪽이나 문 밖에 섰고, 별도의 과거시험에 합격하지 못할 경우 어느 정도 이상의 벼슬에 오를 수 없었다.

특히 음서로 관직을 받은 음관들은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 등에는 들어갈 수 없어 승진에 필요한 경력을 쌓을 수 없어 일찍부터 한계가 정해졌다.

수양대군의 책사인 한명회조차도 계유정난이 성공한 뒤 벼슬을 얻기위해 과거시험을 따로 치를 정도로 음서의 한계는 뚜렷했다.

지금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면서 선관위 간부가 되지 못한 많은 아버지들에게 상실감을 안겨준 선거관리위원회의 음서제도는 썩어도 너무 썩은 고인 물을 보는 것 같아 뭐라 할 말을 잃게 만든다. 결국 감사 사각지대에서 발생한 천인공노할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비단 이곳 뿐이겠는가? 감사 사각지대인 지방의회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

최근 감사원이 공개한 선관위 채용비리는 지난 10년 간 경력직 채용 291차례에서 규정 위반 878건이 발견됐다.

음서제도와 관련해서는 선관위 전 현직 직원 3236명 중에 가족관계 파악에 동의한 직원 339명의 4촌 이내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66명의 친인척이 음서제도를 통해 선관위에 입사한 것으로 밝혀졌다.

3236명 전체에 대해 4촌 이상의 범위로 확대할 경우 비율 대로라면 10배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660명 이상까지 늘어난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야말로 음서 아니면 못들어가는 가족회사인 셈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감사를 거부하고 있다. 현재 감사원 감사를 받지 않는 곳은 국회, 법원, 헌법재판소 등 헌법기관인데, 지난달 헌법재판소는 선거관리위원회에 대한 감사원 감사는 위헌이라는 판결을 냈고, 이어서 다음날 더불어민주당은 감사원의 직무감찰 대상에서 선관위는 제외하는 감사원법 개정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요즘은 일반 사기업에서도 입사 과정에서 청탁이나 뒷거래가 발견될 경우 심각한 이미지 실추에 더해 불공정 관련 법적 제재도 받는다.

지난 2017년 우리은행 이광구 행장은 금감원이나 금융위 간부들 자녀를 부정입사 시킨 것이 발각돼 은행장 직을 사퇴했지만, 결국 2019년 채용비리로 인한 업무방해 혐의로 1년 6개월의 징역형에 처해져 법정구속 된 바 있었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대학입시, 군대, 직장 입사에서의 불공정 만큼은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인다.

하물며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하는 정부기관이 입사 비리를 저지르고도 감사를 받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외계인들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우리 국민들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나라가 내라는 세금을 아무 말없이 내는 가장 큰 이유는 그 돈으로 나의 방패가 돼주고,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고, 산업을 살려주고 하는 과정에서 공정하게 집행할 것을 믿고 감내하는 것이다.

내 주머니에서 나간 돈으로 자기 집안 배를 채우는 집단을 정치권에서 보호한다니 이것이 말이 되는 것인가. 차제에 국회나 법원 그리고 헌법재판소 등 헌법기관 역시 어떤 형태로든 감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곳들 역시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곳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전국 243개 지방의회 대부분이 감사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것도 지방행정의 투명성 차원에서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지난 2018년 국민권익위원회가 지방자치단체에 권고한 지방자치단체 감사규칙 감사대상에서 그동안 빠져있던 ‘의회사무기구’를 포함시켜, 감사대상의 범위를 늘려놨지만, 상당수 지방의회가 감사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권익위 조사 내용을 보면, 지방의회의 불법적인 예산사용 사례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며, 시·군의회 의원들의 편법 및 불법행위가 수없이 적발됐다. 그럼에도 상당수 지방의회가 감사를 받지 않기 위해 용을 쓰고 있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지방의회 역시 정기 감사를 통해 투명한 시민의 대변인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줘야 할 것이다.

충북 괴산군 의회는 이미 6년 전부터 괴산군 감사관실의 감사를 받고있는데,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하는 곳인 만큼 감사는 당연한 것이다”라는 의회 담당자의 말을 통해 당당하고 투명한 괴산군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선거관리위원회나, 지방의회나 모두 국민 앞에 떳떳하고 자신 있게 나서는 모습을 보고싶다. 이번 기회에 감사의 사각지대에서 성역이 되어있는 국회, 법원, 헌법재판소 역시 공정하게 일을 하고 있는 지 국민이 들여다볼 수 있는 장치가 절실하다는 생각을 한다.

이기영,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