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학생이나 지성인에게 민주주의가 뭐냐고 물으면 '국민이 주인되는 세상'이라고 말한다. 영국과 미국 등의 대학생이나 지성인에게 민주주의가 뭐냐고 물으면 '법치(Rule of Law, 법의 지배)'라고 말한다. 이 글을 읽는 분은 민주주의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민주주의는 영어로 데모크라시(democracy)인데, 사실 '법치 즉 법 앞의 평등'을 뜻하는 단어로 '이소노미아(Isonomia)'가 있다. 이소노미아는 데모크라시보다 먼저 출현했다.

세계 역사나 정치사를 수강할 때 우리는 민주주의가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시작됐다고 배운다. 일본의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은 이에 대해 달리 말한다. 진정한 민주주의가 소아시아 해안 지역 이오니아에서 발원했다는 것. 이오니아에서 출현한 이소노미아(isonomia)가 민주주의의 뿌리라는 것이다. 이소노미아는 권리의 평등을 뜻하며 결국 누구나 권리를 가지기 위해서는 '법 앞의 평등'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그리스어인데, 민주주의와 거의 같은 말로 통용돼 왔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이소노미아를 민주주의와 명확하게 분리하면서 이소노미아를 비지배(no rule)로 번역했다. 민주주의는 데모크라시, 곧 인민(데모스, 대중)의 지배(크라시)이므로 지배의 한 형태이지만, 이소노미아는 지배 자체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지배 없는 자유롭고 평등한 상태가 이소노미아다.

이소노미아의 기원이 된다는 이오니아는 기원전 10~8세기에 그리스 본토 사람들이 이주해 세운 수많은 폴리스가 있던 곳이다. 이 지역에선 누구나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었다. 한곳에 매여 강자의 지배를 받으며 불평등을 감수할 이유가 없었다. 자유로웠기 때문에 평등했던 곳이 바로 이오니아 도시국가였다. 이 이소노미아의 땅에서 탈레스(철학, 서양철학의 아버지), 헤로도토스(역사), 히포크라테스(의학)가 나왔다. 훗날 이소노미아의 정신이 그리스 본토로 들어가 꽃피운 게 민주주의였다. 민주주의는 이소노미아의 불완전한 형태였다. 언제든 참주정이나 독재정이 되고, 심지어 선동가(데마고그)의 손아귀에 들어갈 위험이 있었다.

한국인들은 이러한 민주주의의 위험성을 모르고 그저 '민주주의여 만세!'를 외친다. 그러다보니 '선택적 법 적용'이 만연해있다. 이소노미아가 진정한 민주주의 정신이라는 걸 지금이라도 널리 알렸으면 한다.

다음 글은 중앙일보 2025년 1월20일자 칼럼이다

정치적 내전이 계속되고 있다. 망상에 사로잡혀 내란을 일으킨 현직 대통령이 헌정 사상 처음으로 구속되자 일부 지지자들은 폭도가 돼 법원에 난입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몰락한 윤석열 대통령을 하루라도 빨리 추방하려고 핏발을 세워 왔다. 이제 속이 시원한가. 그(이재명)는 “법은 모두에게 평등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자신의 재판에 대해서도 “신속하게 판결을 내려 달라”고 해야 한다. 국민의힘 지지율이 민주당을 추월했다. 윤석열이 끝났으니 이재명도 끝내자는 것이 민심인가. 혼란을 정리할 주체가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1987년 체제’에 살고 있다. 주기적으로 정권을 교체하는 민주주의 모범국이었다. 다만 헌법을 고치면서 열망했던 “내 손으로 뽑는” 대통령 직선제에만 치중했다. 유신헌법의 제왕적 대통령제 흔적을 지우지 못했다. 권력이 발작을 일으켰던 원인이다. 대한민국을 리셋해야 한다. 개헌으로 제7공화국을 열고 국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건 기적 같은 일이었다. 87년 5월 탄생한 민주헌법쟁취 범국민운동본부가 학생·시민들과 함께 6·29 항복 선언을 이끌어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분신인 김덕룡은 “민추협이 없었으면 신민당 창당도, 6월항쟁도 없었다. 후농(後農·김상현의 호)이 민추협 탄생의 일등공신이다”고 했다.

후농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1971년 대선후보 선출 역전 드라마를 만든 주역이었다. 80년대 중반 김대중은 김영삼을 불신했고, 민추협과 신민당에도 부정적이었다. 후농은 정치적 유연성을 발휘해 양김을 하나로 만들어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버렸다. 김대중은 85년 2·12 총선 나흘 전인 2월 8일 귀국했다. 후농은 귀국환영대책위원회를 만들어 김대중을 신민당 돌풍의 주역으로 만들어버렸다. 신민당이라는 거대 선명 야당이 탄생했기에 87년 민주항쟁으로 전두환의 장기집권이 무산됐다. 87년 대선 때 후보 단일화를 주장했던 후농은 김대중이 ‘4자 필승론’을 꺼내며 평민당을 창당하자 참여를 거부했다. 김영삼이 3당 합당으로 민자당에 들어갈 때도 결별을 선언했다. 천하의 양김을 하나로 만들고, 거역한 정치인은 후농뿐이다. 이로 인해 인간적·정치적 상처를 입은 것은 그의 한계이자 운명이었다.

후농은 타협의 정치인이었다. 그러나 원칙은 타협하지 않았다. 1967년 후농은 돈키호테처럼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유진오 신민당 총재와의 영수회담을 약속받았다. 유진오도 동의했지만 당내 반발로 무산됐다. “사쿠라” 소리를 들었고, 화형식까지 당했다. 이때 박정희에게 “야당을 포용해야 한다. 야당이 왜 민주화 운동을 하는지 이해해야 한다”고 당당히 말했다. 박정희가 “내가 장기집권을 꾀한다든가 국민의 기본권을 유린하는 일이 있다면 김 의원이 앞장서서 극한 투쟁을 하시오”라고 하자 “그러겠다”고 했다. 후농은 약속대로 72년 유신 반대에 앞장서 투옥됐다.

후농은 1979년 11월 보안사에 잡혀가 고문을 당했다. 엿새 되는 날 전두환 사령관에게 불려가 둘이서 양주를 마셨다. 꼬여버린 정국을 수습할 방안을 묻자 “정치적 반대세력이 서로 화해하고 대타협을 하는 길밖에 없다. 군이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다. 전두환이 감옥에 보내자 그를 위해 “정치를 잘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10·26 이후 재야 인사들이 윤보선 전 대통령 집에 모여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은 즉시 퇴진하라”고 했다. 그는 “군부가 나설 빌미를 준다”며 홀로 반대했다. 민주당이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을 무리하게 탄핵했고, 중도층 민심이 떠난 장면과 오버랩된다. 이 대표가 “한 대행을 탄핵하지 말라”고 했으면 어땠을까.

후농은 어릴 적에 껌팔이, 구두닦이를 했다. 땅굴을 파고 살면서 야간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어머니는 고향 장성에서 무의(巫儀)를 집전하는 ‘당굴’이었고, 한국전쟁 때 빨치산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토벌대에 총살됐다. 와중에도 “나 혼자 밥을 해줬다”며 다른 여인들을 살린 의인(義人)이다. 후농도 휴머니스트다. 자기를 혹독하게 고문한 사람도 문상을 갔다. 보안사 요원들이 골병든 그를 집에 떨궈놓고 가려 하자 “당신들이 무슨 죄냐. 밥이나 먹고 가라”며 붙잡았다. 이들은 평생 후농을 존경했다.

명색이 헌법기관이라는 사람들이 이재명과 윤석열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상대에게 삿대질한다. 구차하고 한심하다. 최근 후농 평전을 낸 김학민과 고원은 “그에게 정치란 선과 악이 서로 섞이고 소통하면서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가는 영역이었다”고 평가했다. 후농의 가톨릭 세례명은 베드로다. 허술하고 비겁하며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했지만 참회했던 인간적인 사도(使徒)여서 자신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함세웅 신부에게 고백했다. 유독 눈물이 많았지만 저 사나운 원수까지 품었던 정치인, 상처투성이인 이 나라 민주주의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한 휴머니스트의 생애에 경의를 보낸다.

코라시아, 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