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담론>의 허구20 – 신영복의 대한민국 비하! 그의 반(反)역사의 실체

수도시민경제 승인 2024.06.26 21:37 의견 0

신영복은 철저하게 ‘마르크스의 계급역사관, 그리고 반미(反美) 자본주의’ 시각에서 세계를 바라봅니다.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는 그의 머릿속에 ‘착취와 종속의 체제’로서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평생 사회주의 세상을 꿈꾼 그에게 오늘날 대한민국의 모습은 ‘비정한 세상, 반(反)지성의 세상’이었습니다.

신영복은 <담론>에서 사회주의와 포퓰리즘에 물든 라틴아메리카(중남미)를 대한민국보다 더욱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독립전쟁과 역사전쟁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현재 중남미는 대부분 사회주의와 포퓰리즘으로 정신이 병들면서 ‘빈부 격차가 심하고, 마약과 갱단이 판치는 이류국가, 삼류국가’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신영복은 그런 나라가 대한민국보다 훨씬 좋은 나라이고, 우리가 본받을 나라라고 생각하는가 봅니다. 어이가 없습니다.

(‘현대판 국가붕괴의 표본’으로 불리는 대표적인 나라가 베네수엘라입니다. 1998년 권력을 잡은 우고 차베스는 “가난을 끝장내는 유일한 방법은 빈민들에게 권력을 주는 것이다. 수많은 지식인들이 말해왔듯이, 우리는 자본주의를 넘어서야 한다. 자본주의 안에서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는 없다. 사회주의를 통해서만, 평등과 정의가 살아있는 진정한 사회주의를 통해서만이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정말 말이 안되는 주장입니다. 그런데도 신영복과 그를 따르는 국내 좌파 언론, 좌파 지식인들은 베네수엘라 찬양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노무현재단 이사를 지내기도 한 정연주 전 KBS 사장은 재임 당시 KBS는 자원 부국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대통령을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영웅으로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정연주라는 사람은 자신의 두 아들을 미국 시민권자로 만들어 병역 면제를 시키는 ‘뻔뻔함의 극치’를 보여준 인물입니다. 좌파들의 ‘내로남불’을 잘 보여주는 사례지요.)

아무튼 신영복은 <담론>에서 다음처럼 말합니다.

“콜럼버스 이후 지금까지의 세계질서는 본질에 있어서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유럽의 근대사는 한마디로 나의 존재가 타인의 존재보다 강한 것이어야 하는 강철의 논리로 일관된 역사였습니다. 이러한 논리를 모든 나라들이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조선을 흡수합병한 메이지(明治) 일본의 탈아론(脫亞論)도 그중 하나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논리의 희생이 된 나라들마저도 그러한 논리를 모방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심지어는 그러한 논리와 싸워야 할 해방운동마저 그러한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개인이든, 회사든, 국가든 언제나 나의 존재성을 앞세우고 다른 것들을 지배하고 흡수하려는 존재론의 논리에 한없이 충실합니다. 더러는 자신을 낮추거나 뒤에 세우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철저하게 계산된 프로그램의 일환일 뿐입니다. ‘마키아벨리의 지성’에 지나지 않습니다. 단기적으로는 다소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장기적인 이득을 염두에 둔 계산된 희생이 어쩌면 우리가 도달한 지성의 현 수준인지도 모릅니다. 진정한 의미의 연대와 공유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중략)

오늘날도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고 이 발상의 전환을 강조하는 예로서 반드시 콜럼버스가 등장합니다. 여러분도 잘 아는 계란 이야기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계란을 책상 위에 세우지 못하는데 콜럼버스만이 계란을 세웠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단지 발상의 전환에 관한 일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계란의 모양은 어미의 체온을 골고루 줄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입니다. 모든 알이 그렇습니다. 어미 품을 빠져나가 굴러가더라도 다시 돌아오게끔 만들어진 타원형의 구적(球積)입니다. 바로 생명의 모양입니다. 이것을 깨뜨려 세운다는 것은 발상의 전환이기에 앞서 생명에 대한 잔혹한 폭력입니다. 잔혹한 폭력을 발상의 전환이라고 예찬하는 우리의 무심함은 무심함이 아니라 비정함에 다름 아닙니다. ...(중략)”

신영복은 콜럼버스의 달걀을 얘기하면서 난데없이 ‘생명에 대한 잔혹한 폭력’을 말합니다. 묘하게 말을 비트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닭고기를 먹고 달걀을 먹는 사람들은 모두 비정(非情)한 사람들이란 얘기입니까? ‘치킨공화국 대한민국’에서 도축되는 닭이 하루에만 120만 마리가 넘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은 일주일에 1인당 평균 5개의 달걀을 먹습니다. 신영복의 기준에 의하면 ‘비정하고 폭력적인 대한민국 국민’이 됩니다. 그런데도 달걀을 깨뜨리는 게 생명에 대한 폭력이라고 주장하는 신영복이라는 사람의 세상 이해가 참으로 놀라울 따름입니다.

신영복이 찬영하는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은? '베네수엘라와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볼리비아 등 국가붕괴의 표본인 나라들'이 즐비하다

신영복은 <담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라틴아메리카는 콤플렉스 투성이인 우리들의 의식으로서는 다가가기 어려운 거인입니다. 라틴아메리카의 정체성은 대학생들이 자부하고 있듯이 ‘독립’입니다. 우리에게는 ‘라틴’이라는 수식어부터 라틴유럽의 하위문화라는 느낌을 떨쳐버리기 어렵지만 그들에게는 독립전쟁, 혁명전쟁의 역사와 자부심이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라틴아메리카의 독립은 아시아의 가열찬 해방 투쟁에 비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독립 후 지금까지 그들이 견지하고 있는 독립 의지와 자부심이 이와 같은 문화적 성취로 빛나고 있는 것만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독립 의지와 자부심이 우리에게는 없다는 것도 또한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인도의 시공간은 엄청난 상상력이 요구됩니다. 유한한 선분이 아니라 윤회입니다. 그러한 시 공을 넘나드는 인도의 사유를 우리로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것이 이성을 포기하게 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아닌가 하는 의문으로 우리들의 협소한 사유를 합리화합니다. 어쨌든 인도를 콜럼버스와 나란히 대비하면 서로가 서로를 잘 설명해 줍니다. 근대와 탈(脫)근대를 아울러 바라보게 합니다....(중략)

우엘사의 콜럼버스와 인도의 바라나시를 나란히 놓은 이유를 여러분이 고민하시기 바랍니다. 한쪽을 수탈해서 자기의 성취를 만들어내는 근대사회의 기본적인 구조를 직시하기 위해서는 양쪽을 아울러 바라보는 두 개의 시각이 필요합니다. 유럽과 라틴아메리카, 우엘바와 바라나시를 함께 바라보기를 권합니다. 유럽은 스페인으로 대체해도 됩니다. 콜럼버스가 스페인에 많이 남아 있기도 하고 스페인은 또 우리나라와 비슷한 현대사를 경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장기 집권한 프랑코 군사 정부도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프랑코는 인민정부를 쿠데타로 전복시켰습니다. 스페인 귀족들의 위기를 프랑코가 구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4.19혁명으로 위기에 처한 보수 권력이 5.16 군사쿠데타에 의해서 구원받는 것과 닮았습니다. 물론 5.16 군사쿠데타가 미국의 동북아 전략의 일환이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지 않다고 하지만 1936년 스페인 내전 역시 내전이 아니라 2차 대전의 전초전이며 국제전입니다. 여러분은 인민 전선에 투신한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 대해서는 알고 있을 것입니다.”

신영복은 ‘(라틴아메리카와 같은) 독립 의지와 자부심이 우리에게는 없다는 것도 또한 부인하기 어렵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세게적인 경제 강국이자 문화 강국으로 거듭나는 대한민국을 모독하는 궤변 중의 궤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국민이라면 신영복의 바로 이러한 면을 정확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신영복의 주장은 진보세력이 대한민국 경제 발전에 전혀 기여한 게 없다는 걸 인정하는 것

신영복은 우리나라 보수 세력이 5.16 군사쿠데타에 의해 구원을 받았다고 썼습니다. 5.16으로 인해 박정희 정권이 들어섰고, 권위주의적이고 비민주적인 요소가 많았으나 어찌 됐든 대한민국의 경제 기적을 만들었습니다. 대한민국의 경제 기적을 말할 때 박정희 대통령과 이병철, 정주영, 박태준 등의 기업인을 빼놓으면 얘기가 안 됩니다. 신영복은 이러한 사람을 모두 보수세력으로 규정합니다. 그렇다면 신영복의 주장은 그가 속한 ‘진보세력, 좌파세력의 대한민국 경제에 대한 기여’는 전혀 없다는 얘기가 됩니다.

하기야 대한민국 진보세력은 대체로 ‘반대를 위한 반대’의 논리에만 충실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를 만들 때 길에 드러누워서 반대했습니다. 일본에서 차관을 들여와 포항제철을 만들 때도 반대만 했습니다. 그래도 김대중 정부 시절까지 민주당은 대한민국 경제와 미래에 대한 걱정과 조금의 대안이라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노무현 정부 이후 ‘운동권이 득세한 민주당’ 그리고 문재인 정부가 끝난 이후 이제는 ‘이재명을 아버지로 모시고, 이재명 사당(私黨)이 된 민주당’에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만드는 대안이나 정책이 아예 없습니다. 이런 편협한 사람들이 이념적, 사상적 선생으로 모시는 사람이 바로 신영복입니다. 그런 면에서 신영복은 이미 고인이 되었으나 여전히 대한민국에 ‘어둡고 나쁜 기운’을 퍼뜨리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코라시아, 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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