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 <담론>의 허구10 – ‘보이는 것’만 집착하는 좌파식 사고의 편협성이 민주주의를 망가뜨린다

수도시민경제 승인 2024.06.12 19:18 | 최종 수정 2024.06.13 18:48 의견 0


젊은 20~30대가 요즘 거의 가지지 않는다는 모임이 있습니다. 바로 ‘동창회’입니다. 어차피 만날 사람은 만나게 되는데, 특정 기간에 같은 공간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시간과 돈을 들여 만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중장년 세대가 혈연 지연 학연에 연연하고, 고시 동기니 군대 동기니 심지어 3개월짜리 대학원 단기과정 동기니 하며 어떻게든 인연을 엮으려는 것과 참으로 대비됩니다.

젊은 세대가 무작정 만남을 기피하고 관계 맺기를 싫어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다만 그들은 ‘개인의 독립성과 주체성’을 중시하다 보니,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겉치레 만남’은 피하고 싶기 때문일 것입니다. 젊은 세대들이 대체로 도시에 살면서 서양의 개인 문화에 익숙한 것도 하나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평생 좌파적 사고를 했던 신영복은 ‘개인의 독립성과 주체성’에 대해, 그리고 도시의 독립적인 삶을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다음은 <담론>에 실린 글입니다.

“인간관계는 사회의 본질입니다. 사회에 대한 정의가 많지만, 사회의 본질은 ‘인간관계의 지속적 질서’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근대사회, 자본주의 사회, 상품사회의 인간관계는 대단히 왜소합니다. 인간관계가 지속적이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도시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도시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의 삶을 돌이켜보면 인간적 만남이 대단히 빈약합니다. 이양역지(以羊易之)를 통해서 확인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우리 시대의 인간관계와 사회성의 실상입니다.” (이양역지는 제나라 선왕이 ‘슬픈 모습으로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대신 ‘직접 보지 않은 양’을 제사에 올리라고 명령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맹자>에 일화가 나옵니다)

신영복의 도시에 대해 다음처럼 이야기합니다.

“도시는 누가 만드는 만들었나를 물어야 합니다. 도시는 자본주의가 만들었습니다. 자본주의의 역사적 존재 형태가 도시입니다. 그리고 그 본질은 상품 교환 관계입니다. 얼굴 없는 생산과 얼굴 없는 소비가 상품 교환이라는 형식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관계입니다. 얼굴 없는 인간관계, 만남이 없는 인간관계란 사실 관계없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유해 식품이 만들어질 수 있는 구조입니다. (사회주의 국가는 유해 식품을 다지기에 앞서 식품 자체가 없던 구조였습니다) 우리 시대의 삶은 서로 만나서 선(線)이 되지 못하고 있는 점(點)입니다. 더구나 장(場)을 이루지 못함은 물론입니다.”

신영복의 이러한 시각은 매우 편협되고 잘못됐다고 느껴집니다.

신영복은 만남과 관계를 중시하는데, 그도 중세에 ‘도시의 공기가 자유를 만든다(독일어: Stadtluft macht frei)’는 표현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도시는 자유를 가져왔을 까요?사실 농촌으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사회에서 만남과 관계는 매우 폐쇄적입니다. 도시에 살다가 자연을 찾아 시골로 이주한 분들이 가장 크게 느끼는 게 ‘시골 사람들의 따돌림’이기도 합니다. 전통적인 사회에서 그들은 관습과 선례에 기초한 집단적 권리와 특권을 행사하기도 합니다. 예컨대, 전통적인 사회에서 사람이 일상적으로 만날 수 있는 사람의 범위는 매우 좁습니다. 시간과 장소의 제약, 즉 물리적으로 많은 사람을 만나는 게 불가능합니다. 신영복의 주장처럼 만남과 관계를 중시하게 되면 그렇게 모인 사람은 ‘내부 집단’이 되고 이들은 곧바로 집단의 힘을 빌려 외부를 배척하게 됩니다. 혈연, 지연, 학연에 얽힌다든지 혹은 이념과 이익에 기초한 폐쇄 집단이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도시의 삶은 근대의 기본권 즉 ‘개인의 자유’를 보장해줍니다. 타인에게 손실을 입히지 않는 한 대체로 모든 행동이 자유롭습니다. 타인에게 쓸데없이 간섭하지도 간여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만큼 대체로 모든 거래가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이뤄집니다. 도시의 발전 덕분에 근대 사회가 열렸고, 세계 경제가 크게 발전해 인류는 오늘의 번영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신영복이 마음의 양식으로 삼은 <자본론>에 기초한 그의 시각은 사실 ‘근대의 기본권을 버리고, 전통 사회 혹은 집단 사회로 가자’라는 주장의 다른 표현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요.

신영복은 ‘이양역지’를 통해서 ‘보이지 않는 것’도 중시한다고 했으나. 사실 그의 시각은 ‘보는 것’에 갇혀 있는 것 같습니다.

흔히 좌파는 ‘본 것’에 집중하고, 우파는 ‘보지 못한 것’에 집중합니다. 좌파는 당장 달콤한 선심 정책 즉 눈에 보이는 포퓰리즘에 집중하고, 우파는 당장은 달콤하지 않아도 미래에 좋을 ‘입에 쓴 정책’을 펼칩니다. 좌파는 경쟁을 비인간적이라며 배격하지만, 우파는 경쟁이 진정으로 우리 삶을 윤택하게 한다고 믿습니다. (경쟁을 없앤 사회주의 국가 사람들은 공동식당에서 똑같은 식단으로 짜인 맛없는 식사에 의존했고, 경쟁의 가치를 깨달은 민주주의 국가 사람들은 다양한 식단의 다양한 음식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전통시장의 순대국 거리에 가보면 다양한 순대국 식당이 있는데 우리가 순대국도 취향대로 골라 먹을 수 있는 건 경쟁 덕분입니다. 반면 군 생활을 하신 분들은 알겠지만, 주는 대로 먹어야 하는 군대 짬밥은 참 맛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마카세의 원조는 ‘군대 짬밥’이라는 웃픈 농담도 있습니다)

그 결과 좌파는 집단적 사고에 기초한 사회주의 계획경제에 집중해 빈곤해지고, 우파는 개인의 독립성을 중시한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에 집중에 발전합니다. 좌파는 눈으로 보는 것만 따지니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만 우대하고 자본가를 경멸하며, 우파는 보이지 않는 것까지 따지니 노동자 못지않게 자본가를 매우 우대합니다. (손에 든 망치만 따진 김제동은 ‘판사의 망치와 목수의 망치가 같은 가치를 가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판사의 ‘보이지 않는 가치’를 일부러 외면한 결과지요, 그러면서도 본인은 시급 아르바이트생과 달리 회당 1000만원이 넘는 강연료를 받는 ‘내로남불’을 실천했습니다.)

신영복이 말한 ‘만남의 중요성’은 과거 농업 사회의 전근대적 사고방식의 연장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신영복의 한계는 ‘만남과 관계의 지나친 중시가 곧 간섭이 되고 정의를 왜곡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 같습니다. ‘만남과 관계의 중시’는 자칫 객관적 사고와 중립적 사고를 망칠 수 있고, 민주주의의 근간인 ‘법 앞의 평등’을 훼손할 수 있음을 보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정의의 여신 디케(Dike)는 ‘선악을 판별하여 벌을 주는 여신’으로 여신상은 대개 두 눈을 안대로 가리고 있습니다. 이는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는 공평무사한 자세를 지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좌파의 특징인 ‘내로남불’, 흔히 얘기하는 ‘우리가 남이가?’를 막기 위한 것입니다.

코라시아(필명), 블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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