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열린 지역의사 관련 법안에 대한 공청회에서 김유일 대한의학회 지역의료정책이사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의료계와 의학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여당은 지역의대와 지역의사제를 도입할 기세다. 참으로 한심해서 무어라고 할 말이 없다. 이른바 의료 소외지역에서 필요한 의사는 필수의료라고 부르는 응급의료 및 심장/뇌 질환 같은 긴급한 증상을 다루는 의사이기 때문에 이 문제는 지역의료가 아닌 필수의료 문제로 접근해야 마땅하다. 무엇보다 지역의사제를 시행하면 ‘지역’이란 명칭이 ‘주홍글씨’처럼 따라다닐 텐데 이런 무리수를 왜 강행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대학, 특히 학부과정 대학에선 지역 우대 같은 혜택을 두는 것은 괜찮은 방법이다. 하지만 졸업자 대부분이 의사 시험에 합격하는 의대의 경우에 그런 혜택을 부여하는 것은 정말 조심해야 한다. 이 점에서 가장 유명한 경우는 UC 데이비스 메디컬 스쿨 입학을 둘러싸고 벌어진 1978년 미국 대법원 판결인 앨런 바키 사건일 것이기에 여기서 소개하고자 한다.

앨런 바키(Allen P. Bakke 1940~2024)는 플로리다 출신으로 미네소타 대학을 평점 3.51로 졸업하고 해병대 장교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고 대위로 제대한 후 나사(NASA)에서 근무했다. 그러면서 그는 의사가 되고자 하는 생각이 들어서 1972년에 뒤늦게 메디컬 스쿨에 입학을 시도했으나 나이가 많다는 등 이유로 입학을 거절당했다. 1973년에 다시 입학을 시도했는데, UC 데이비스와 입학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바키는 UC 데이비스로부터 입학을 거부당했다. 그는 대학측에 이의신청을 했다. 그런 과정에서 그는 자기보다 종합평점이 낮은 흑인 학생 5명이 입학했음을 알게 됐다. 바키는 변호사를 찾아가서 자신이 차별을 당했다는 소송을 제기했다. 말하자면 백인인 자기가 역차별(reverse discrimination)을 당했다는 것이다.

1965년 민권법 제정 후에도 흑인 등 소수인종의 사회적 진출이 향상되지 않자 단순히 차별을 금지하는 것을 넘어서 소수인종을 우대하자는 우선처우(Affirmative action) 조치가 여러 분야에 의무화됐다. 로스쿨과 메디칼 스쿨도 이런 취지에 부응했는데, 어떤 대학은 소수인종 학생에게 일정한 가점(加點)을 주고 어떤 대학은 아예 소수인종 쿼터제를 운영했다. UC 데이비스 의대는 소수인종 쿼터를 두었고 이 때문에 보다 우수한 평점을 갖고 있는 바키가 입학에 실패한 것이다. 캘리포니아 주법원과 주 대법원은 예상을 깨고 바키 편을 들어주었고, 결국 이 사건은 연방대법원으로 가게 됐다. 1978년 6월 대법원은 대학에 대해 바키를 입학하도록 판결했다. 그럼에도 대법원은 소수인종 우대 자체를 위헌으로 판결하지는 않았고 단지 이 경우와 같은 쿼터제를 위헌으로 판시하는데 그쳤다.

이렇게 해서 앨런 바키는 그해 9월 UC 데이비스 의대에서 38세의 나이로 의학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그 후 마취과 의사가 되어 미네소타에 있는 메이요 병원에서 일하고 은퇴했다. 그러면 1973년에 바키 대신에 입학하는 데 성공한 흑인 학생들은 어떤 인생 항로를 갔을까? 그 중 잘 알려진 흑인 의사는 패트릭 차비스(Patrick Chavis)였다. 왜냐하면 당시 진보적이라는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이 차비스의 경우를 들어서 흑인 학생에 대한 우대를 주장했을 뿐 아니라 그의 죽음이 뉴스로 도배가 됐기 때문이다.

2002년 9월 캘리포니아 LA 공항 남쪽에 위치한 호슨이란 백인 인구가 10% 밖에 안 되는 작은 도시에서 한 흑인 남자가 자동차를 세워놓고 아이스크림을 사고 차로 돌아오는 순간에 자동차를 탈취하려는 강도들에 의해 총에 맞아 죽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죽은 흑인이 바로 패트릭 차비스였다. 피살자가 앨런 바키 대신 의대에 들어간 인물이라서 흔히 있는 강도 살인 사건임에도 전국적으로 뉴스를 탔다. 그러면 패트릭 차비스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UC 데이비스 의대를 졸업한 차비스는 롱비치 메모리얼 병원에서 레지던시(전문의 과정)을 마치고 그 병원에 취직했다. 그는 자신이 차별당한다고 주장한 끝에 산부인과 부과장으로 승진했으나 집게 분만(forcept delivery)으로 인한 문제로 병원에서 견책을 당하자 인종차별이라면서 소송을 제기해서 1심에서 승소했으나 항소심에선 기각당했다. 그 후 낙태와 복부지방 제거술을 주로 했으나 27번에 걸쳐 의료과실 소송을 당했고 일곱 차례에 걸쳐 캘리포니아 의료위원회에 의료과실 청원이 접수됐는데, 그중 한번은 출혈하는 환자를 방치해서 죽은 경우가 있었다. 1997년 캘리포니아 의료위원회는 차비스에 대한 의사 면허를 정지시켰고 1998년에 결국 의사면허를 취소했다. 그러자 그는 백인 의사들이 자기를 차별했다고 주장해서 뉴스를 탔으나 4년 후 강도를 당해서 죽고 말았다. 결국 의사가 되어선 안 될 사람이 의사가 되어 환자를 죽게 하는 등 커뮤니티에 큰 피해를 입혔고 자신도 한심한 인생을 살고 말았다. 차비스 사례는 극단적인 경우이겠으나 생명을 만지는 의사를 양성하는 교육에 다른 고려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일깨워 주었다.

하버드를 나오고 시카고 대학에서 박사를 한 저명한 흑인 경제학자 토머스 소웰(Thomas Sowell 1930~)은 소수인종 우대 정책으로 인해 소수인종이 자립정신을 잃어간다고 지적했다. 역시 흑인으로 예일 로스쿨을 나온 클러렌스 토머스(Clarence Thomas 1948~) 대법관은 자기가 변호사가 되어도 취직하기가 어려웠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자기가 소수인종 우대정책으로 예일 로스쿨을 나온 줄 알았기 때문이라면서 소수인종 우대를 아예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상돈, 전 중앙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