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된 덕수궁 중명전 앞에거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필자. 사진=이상돈
금년 11월은 을사늑약 120년 주년이 된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정동의 중명전(重明殿)에선 특별전시가 있어서 구경할 만하다. 덕수궁 담 넘어 있는 중명전은 원래 수옥헌(漱玉軒)이라 불렸고 명색이 ’대한제국의 황제‘라는 고종은 여차하면 길 건너 러시아 공사관이나 미국 공사관으로 도망가기 쉬운 수옥헌에서 머물렀는데, 결국 그곳에서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말았다.
바로 그날 수옥헌에서 무슨 일이 생겼나를 기록으로 남긴 사람은 당시 참정대신(參政大臣)으로 조약체결에 반대했던 한규설(韓圭卨1848~1930)이다. 지금 열리고 있는 중명전 전시에서 한규설의 진술을 토대로 한 동아일보 기사를 볼 수 있다. 1930년 1월 1일부터 3일까지 동아일보는 한규설의 회고담을 기사화했다. 한규설은 그해 가을에 82세로 사망했으니까 죽음을 앞두고 역사적 순간에 대한 기록을 남긴 셈이다. 말년의 한규설을 찾아가서 진술을 받아낸 동아일보 편집자의 기자 정신도 대단하지만, 이런 기사가 나가도록 그대로 둔 총독부도 조금은 이해하기 어렵다. 3대 총독 사이토(齋藤実 1858~1936)의 ’문민통치‘로 인해 정국이 안정을 찾고 경성은 이른바 ’번영의 20년대‘를 보내다 보니 총독부 검열관은 이 정도 기사가 나가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듯하다. 동아일보 기사에 나온 한규설의 회고담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을 현대 국어로 풀어 쓰면 이러하다. (박윤석, <경성 모던 타임스 : 1920, 조선의 거리를 걷다> 2014, 101~102쪽에서 인용)
“나는 ‘이 일은 군주와 신하들끼리만으로도 해결치 못할 중대한 일이라 만민공론에 부치어 천천히 해결함이 옳으니 얼마 동안 연기를 하게 합소서’하는 의견을 폐하께 올려 기한을 연기해 놓고 다시 힘을 다해보아 일을 틀어놓을 생각을 하고 회의에서 빠져나와 폐하 알현을 예식과장(禮式課長) 고희경(高羲敬)에게 부탁하였소. 얼마쯤 있다가 고희경이가 나오기에 나는 부르심인가 하였더니 뜻밖에 그 말에는 대답도 없이 아주 딴소리, ‘이등 대사가 좀 뵈옵겠다고 합니다’ 하지 않겠소. 너무 어이가 없어 그게 무슨 소리냐고 호령을 하고 내가 이등 대사를 볼 이유가 무어냐고 하였더니 고희경이는 간데없고 공사관 통역관 염천(鹽川)이라는 자가 와서 내 옷자락을 잡으면서 이등 대사가 보자고 한다고 수옥헌 마루방으로 가더니, 이등 대사가 들어오는데 말인즉 역시 도장을 찍도록 하라는 것이오. 내야 그럴 도리가 있느냐고 다시 반대하였더니 대사는 슬그머니 나가버리고, 일본 사관(士官)들이 문을 지키고 내어 보내지를 않습디다. 속아서 갇힌 것이오. 허허…갇히었지요.”
한규설의 회고에 나오는 고희경(高羲敬 1873~1934)은 나의 외조부 고희동(高羲東 1886~1965)의 사촌형으로, 당시 궁내부 예식과장 겸 외사과장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의전실장 겸 외교수석인 셈이다. 고희경은 고희동의 부친 고영철(高永喆 1853~1911)의 둘째 형님인 고영희(高永喜 1849~1916)의 장남이다. 역관 가문 고씨 4형제 중 고영주, 고영선, 고영철은 한학(漢學), 즉 중국어를 했는데 둘째인 고영희는 왜학(倭學), 즉 일본어를 했고, 이것이 결국 형제들 간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고영희는 주일공사, 한성판윤, 그리고 탁지부, 학부, 법부 협판(協辦, 차관)을 지냈고 을사늑약 당시에는 황해도 관찰사이었고, 그 후에 탁지부대신을 지낸다. 고희경은 동문학이 페쇄되고 생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교육기관인 육영공원(育英公院) 1기생으로, 미국인 교사들한테 영어를 배웠다. 육영공원은 기성 관료반인 좌원(左院)과 고위관료의 자제들이 다니는 우원(右院)이 있었는데, 1기생 좌원에서는 이완용(李完用 1858~1926)이, 우원에선 고희경이 가장 유명해진다. 고위 관직 자제들이 입학했던 우원에 중인(中人) 역관이던 고영희의 아들인 고희경이 입학할 수 있었던 것은 삼촌인 고영철이 추천했기 때문이다. 동문학 주사이던 고영철은 육영공원을 설립하는 작업을 했고, 이 때 조카인 고희경을 자기가 추천하고 자기의 큰 아들 고희명은 동료 주사 진상언(秦相諺)의 추천으로 입학시켰다. 고영철과 함께 영선사 일행으로 청나라를 다녀온 진상언은 고영철의 친구였다.
어학에 탁월한 소질이 있는 고희경은 진사(進士) 과거시험에 합격하고 1894년에 외아문(外衙門, 외교부) 주사로 관료생활을 시작했다. 일본 주재 공사관, 영국 주재 공사관의 참서관을 지낸 후 1899년에는 궁내부 번역과장이 됐고, 1902년에는 영국 에드워드 1세 즉위식에 참석하는 황족 이재극을 수행해서 캐나다와 영국을 다녀왔다. 영국에서 돌아온 후에는 궁내부 외사과장이 됐다. 1904년 봄 이토 히로부미(伊藤 博文 1941~1909)가 그해 2월 한일의정서가 체결된 후 흔들리는 조선 민심을 바로 잡기 위해 조선에 왔을 때 고희경은 반접관(畔接官)으로 인천항에 나가서 일본 군함을 타고 도착한 이토 특사를 영접했다. 이때 이토는 일어와 영어가 유창한 고희경을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1905년 3월, 고희경은 궁내부 예식과장 겸 외사과장이 됐다. 고종의 의전실장 겸 외교수석이 된 것이다. 그해 11월 8일 이토 히로부미가 을사조약 체결을 위해 부산 초량에 일본 군함으로 도착했을 때 고희경 예식과장은 반접관으로 부산에 내려가서 이토를 영접했다. 고희경은 이토를 태운 특별열차에 편승해서 남대문역에 도착했다. 11월 17일 자정이 넘은 18일 밤 경운궁(덕수궁)에는 일본 헌병 기마대가 삼엄하게 경비를 섰고 수옥헌(漱玉軒)에선 을사늑약이 체결됐다. 고희경은 그날 밤 수옥헌에 있었다. 11월 29일, 이토 일행은 남대문역에서 부산행 특별열차에 올랐고, 고희경 예식과장과 예식관 현백운이 동승했다. 부산 초량에 도착한 이토 일행은 대기 중인 일본 군함에 올랐고 이토는 고희경과 현백운을 군함에 오르게 하고 그간의 노고를 치하했다. 이들을 태운 일본 군함은 12월 1일 마산포 항구에 도착했고 고희경과 현백운은 이토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경성으로 향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던 1905년 11월, 한성법어학교에서 프랑스어를 배운 고희동은 궁내부 주사로 경운궁 사무실에서 프랑스어 문서를 번역하고 정리하고 있었다. 당시 19살이었던 고희동은 1903년 궁내부에 일자리를 얻어서 일한 지가 3년째였다. 고희동은 그날 자신이 보았던 일을 지인과 후손들에게 이야기하곤 했는데, 처조카인 조용만(趙容萬 1909~1995)이 이를 중앙일보에 연재한 회고록에 활자화해서 그의 책 <경성야화(京城夜話)>에 남게 됐다. 고희동은 1901년에 자기보다 두 살 많은 임천 조(趙)씨와 결혼했는데, 조(趙)씨는 성공한 역관 가문이었다. 고희동의 부인 조씨는 현상건(玄尙健 1875~1926)의 부인의 동생이었다. 따라서 현상건은 고희동의 손위 동서인 셈이다. 현(玄)씨 또한 성공한 역관 가문이며, 한성법어학교를 다녀서 불어에 능통한 현상건은 러일전쟁을 앞두고 고종이 프랑스와 러시아에 보낸 비밀특사로 알려져 있다. 러일 전쟁 와중에 현상건은 일본군을 피해서 인천에서 미국 군함을 타고 상해(上海)로 망명했다. 격동과 혼란의 시대에 외국어를 잘했던 세 젊은이, 고희경, 현상건, 고희동은 각각의 길을 향해 달리게 된다. (계속)
이상돈, 전 중앙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