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 중인 베트남 근로자들의 모습.

좌파인사들이 위대한 사상가로 떠받드는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는 중국의 마오쩌뚱을 숭앙하는 극렬한 마오주의자이자 친북 사상가였다. 그는 "베트남전쟁은 이념 대립이 아닌 반(反)제국주의 전쟁"이라며 베트남 전쟁 때 우리 국군의 과오에 대해 사죄를 요구하기도 했다.

리영희는 북한을 수천만 인민의 자주성을 박탈하는 수령제 독재로 비난하면서도 '부정부패가 없고 민족 정통성을 가진 나라라서 남한이 배워야 한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자유를 찾아 북한을 탈출한 인사들이 보기에 희대의 거짓말쟁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의 허튼 소리는 운동권과 전교조 세대에게 영향을 끼쳐 '의식화의 원흉'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는 노무현, 문재인 등에게 큰 영향을 끼쳤는데, 문재인 전 대통령이 쓴 <운명>에 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대학 시절 나의 비판의식과 사회의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분은, 그 무렵 많은 대학생이 그러했듯 리영희 선생이었다. 나는 리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가 발간되기 전에, 그 속에 담긴 ‘베트남 전쟁’ 논문을 ‘창작과 비평’ 잡지에서 먼저 읽었다.... 처음 접한 리영희 선생 논문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베트남 전쟁의 부도덕성과 제국주의적 전쟁의 성격, 미국 내 반전운동 등을 다뤘다. 결국은 초강대국 미국이 결코 이길 수 없는 전쟁이라는 것이었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근거가 제시돼 있었고 명쾌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미국을 무조건 정의로 받아들이고 미국의 주장을 진실로 여기며 상대편은 무찔러 버려야 할 악으로 취급해 버리는 우리 사회의 허위의식을 발가벗겨 주는 것이었다.”

과연 그럴까? 좌파인사들이 '미국과 전쟁에 승리한 유일한 나라'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은 베트남은 천국이 됐을까?

결론적으로 공산주의 치하에서 비참하게 살았으며, 지금 경제개발을 했다고 하는데도 공산당 기득권들은 '월급 300달러로 월세 500달러 아파트에 살면서 자녀를 해외유학 보내는 '부패 신공'의 나라가 되었다.

좌파들은 베트남의 공산화 된 직후 "베트남은 공산통일 되어서 지금 잘 살고 있다"고 암암리에 선전했는데, 통일 직후 베트남의 실상을 알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이 좌파사고에 물들면 어떻게 변할 지를 베트남 상황에 빗대어서 예상해볼 수 있다.

1975년 4월30일 남베트남(월남)이 무조건 항복한 후 10년 동안 베트남은 국경을 폐쇄하고 공산화 사업을 전개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숙청작업을 했다. ‘인간개조’를 위한 수용소를 만들어 놓고 군인, 경찰, 공무원, 교사, 정치인 등 사회의 지도층을 모두 잡아 들였다.

특이한 것은 성직자들은 잡아들이지 않았다. 인간개조가 안 된다고 판단해서 모두 처형하였다. 베트남에는 성당은 있어도 베트남 신부가 단 한명도 없다. 약100만명을 잡아들여서 장교, 경찰간부, 6급이상 공무원, 보직교사, 여당정치인, 자본가 등은 개조가 아닌 처형을 했다고 한다.

주목할 일은 베트남 공산통일의 1등 공신인 '베트콩' 지도자들을 "모두 숙청"했다는 것. 자유를 맛 본 놈들은 언제고 배신을 한다는 것이 베트콩들을 죽인 이유였다.

6.25 후 김일성이 남로당 박헌영을 제일 먼저 죽인 것과 같은 이치이다. 써 먹을 것 다 써 먹은 후, 박헌영을 미제스파이로 몰아 죽였다.

이렇게 무자비한 처형을 하자 국외로 탈출한 인구가 보트피풀 106만명, 육상 탈출이 50만명이라고 하며 탈출 중 사망자가 11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지금도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 등 인접국 호수에는 탈출 베트남인들이 만든 수상 마을이 수없이 많다. 이런 학살로 경제는 완전히 무너져서 어쩔수 없이 1986 '도이모이 정책'을 도입한 이후, 월남은 중국과 마찬가지로 개방경제를 택하게 된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숙청했는지 지금 베트남에는 노인이 거의 없고 평균 연령이 27세라고 한다. '젊은 나라 베트남'의 이면에는 이런 슬픈 역사가 있다.

김상민, ‘좌파는 무슨 생각으로 사는가’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