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3년 순 한문으로 창간한 <한성순보>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신문으로 외교통상 사무 전반을 담당했던 통리아문 소속의 박문국에서 발간했다. 김인식, 장박, 오용묵, 김기준, 강위, 주우남, 현영운, 정만조, 오세창 등 박문국 주사와 사사(司事)들이 한국 최초의 기자라고 할 수 있겠다.

사람의 일생은 그가 처한 환경은 물론이고 어떠한 계기에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지기도 하는데, 격동의 우리 근현대사에 그런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구한말 개화파 인사였던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의 엇갈린 운명이 아마 가장 대표적일 것이다. 이들 보다는 덜 드라마틱하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를 만들었던 세 사람의 운명도 크게 달라져서 그 시대를 살아가야 했던 지식인들의 고뇌와 운명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신문 발간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생각한 사람은 박영효(朴泳孝 1861~1939)였다. 박영효는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하고 귀국할 때 일본인 인쇄기술자와 인쇄시설을 같이 들여왔고, 자신이 한성 판윤이 되자 한성부에서 신문을 발간하려 했고 편집 실무를 유길준(兪吉濬, 1856~1914)에게 맡기려 했다. 그러나 민씨 척족들의 견제로 박영효는 석달 만에 한성 판윤에서 경질되었다.

그러자 당시 협판(차관)이던 운양 김윤식(金允植 1835~1922)이 고종의 윤허를 얻어 동문학에 박문국을 두고 신문을 발간하게 됐다. 박영효와 같이 조선에 입국한 인쇄기술자 이노우에 카코루의 거소(居所) 겸 인쇄소에 박문국이 생겼고, 김윤식의 사촌으로 수신사 일행이었던 김만식(金晩植 1834~1900)이 동문학 장교로 박문국을 운영하게 됐다. 김만식은 친척인 김인식(金寅植), 그리고 김윤식이 영선사로 청나라를 다녀올 때 일행이었던 중국어 역관 고영철(高永喆 1853~1911)을 박문국 주사(主事)로 임명했다. 김인식이 질병으로 일을 하기 어렵자 추가로 여규형(呂圭亨 1848~1921)을 박문국 주사로 임명하고 장박(張博 1848~1921) 등 3명을 그 아래인 사사(司事)로 임명했다. 이렇게 해서 <한성순보> 창간호가 1883년 10월에 나오게 됐다.

이런 연유로 언론학자 정진석 교수는 우리나라 최초의 기자는 여규형과 고영철이라고 본다. (고영철은 나의 외조부 고희동의 부친이다. 나한테는 외증조부가 된다.) 여규형은 문과 급제해서 외아문(外衙門) 주사가 되어 박문국에 부임했는데, 한문과 한시에 재능이 출중해서 당시 유명했다고 한다. (다만 그는 성격이 괴팍하고 술을 많이 먹고 말이 험해서 그런 품성이 <매천야록(梅泉野錄)>에 나오며, 이 때문에 몇 차례 귀양을 갔다.)

한성순보 발간을 준비하던 중 고영철은 보빙사(報聘使) 수원(隨員)으로 선발돼서 민영익과 홍영식을 수행해서 1883년 7월 미국을 향해 출발해서 그해 12월에 귀국하게 되어 <한성순보> 초창기에는 편집에 참여할 수 없었다. 고영철이 없는 동안에 여규형과 함께 <한성순보>를 펴내는 데 역할을 한 사람은 사사인 장박(張博 1848~1921)이었다. 함경도 사대부 집안 출신의 한문 수재로 소문이 났던 장박은 늦은 나이에 상경해서 박문국 사사로 관료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나라 최초의 기자는 여규형, 고영철, 장박 세 사람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인다.

고영철이 귀국하고 1년이 지난 1884년 12월 초, 갑신정변이 발생했다. 홍영식의 '개화 혁명'은 ‘3일 천하’로 끝나고 그는 참살됐으며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은 간신히 일본 선박에 올라타고 일본으로 도피했다. 이때 저동에 있던 박문국은 폭도에 의해 불탔으며 인쇄시설도 소실됐다. 정변 당시 고영철은 병가(病暇) 중이었고, 여규형과 장박도 화를 당하지는 않았다. 정변이 제압된 후 통리기무아문 독판(督辦, 장관)이 된 김윤식은 다시 인쇄시설을 도입해서 신문 복간을 준비해서 1886년 1월에 <한성주보>가 나오기 시작했다. <한성주보>는 경영란으로 1888년 7월까지 나오고 폐간됐고 박문국은 통리기무아문으로 편입되어 없어졌다.

갑신정변 후 여규형, 고영철, 장박은 각기 다른 길을 갔다. 여규형은 교리(校理), 사간(司諫), 동부승지를 지냈으나 말이 험해서 몇 차례 유배를 당했고 관직을 그만 두고 대동학교에서 한문을 가르쳤으며 한일합병 후에는 한성관립고등학교(경기고등학교 전신)에서 한문 교유(敎諭)를 지냈다. 고영철은 내무부 주사가 되었는데, 동문학이 없어진 후 생긴 육영공원(育英公院)과 <한성주보>와 관련된 일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영철은 1894년에 경상도 봉화 현감으로 발령이 날 때까지 10년 동안 내무부 주사로 있었는데, 이 기간 동안 김윤식이 실각해서 충청도로 유배간 것과 관련이 있을 듯하다. 고영철은 그 후 함경도 고원 군수와 평안도 삼화 감리를 지내고 은퇴했다. 중국어 역관으로 영어를 배우고 미국을 다녀온 이력에 비해선 초라한 경력이었으나 그 대신 을미사변, 아관파천 같은 혼란스러운 중앙정치와 무관할 수 있었다. 고영철이 우리나라에 미친 보다 큰 영향은 조카인 고희경(高羲敬 1873~1934)을 육영공원에 입학시켜 이토 히로부미가 신임하는 친일관료가 되는 계기를 만들었고, 셋째 아들 고희동을 한성법어학교에 보내서 결국은 일본으로 미술유학을 가게 되는 계기를 만든 것이 아닌가 한다.

장박은 <한성주보>를 발간하는데 주된 역할을 했고, <한성주보>가 폐간된 후에는 전보국(電報局) 주사로 전신전화 업무를 담당했다. 1894년 갑오개혁에 적극 참여해서 김홍집 내각에서 법부 참의가 됐으며 1895년에는 법부 협판이 되고 이어서 법부대신이 됐다. 그야말로 고속승진을 한 셈이다. 그러나 을미사변이 발생하고 1896년 2월 고종이 아관파천을 단행해서 개화파 척살 지시를 내리자 상황은 급변했다. 김홍집, 정병하, 어윤중은 군중에 의해 피살됐고, 유길준, 조희연, 장박은 간신히 일본으로 도피했다. 민비 시해를 진두지휘한 우범선도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다. 고종은 이들의 신병인도를 요구했으며, 우범선은 고영근에 의해 피살됐다. 1907년 정미7조약으로 고종이 폐위된 후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특사를 받은 장박은 유길준 등과 함께 귀국해서 망해가는 대한제국에서 이런저런 고위직을 했다. 이때 장박은 자신의 이름을 장석주(張錫周)로 개명했다.

한일합병 직후 장석주는 남작 작위를 받았고 활발한 친일활동을 벌였다. 3.1 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군대를 동원해서 진압할 것을 촉구했다. 유길준은 남작 지위를 거부하고 조용하게 지내다가 1914년에 사망했다. 하지만 동경제국대학을 나온 유길준의 두 아들 유만겸과 유억겸은 1930년대 말부터 노골적인 친일 행동에 나서서 장석주와 마찬가지로 친일인사로 분류된다. 탁월한 문장가로 우리나라 최초의 언론인이었던 장박은 “조국은 자기를 버렸고 일본이 자기를 구하고 알아주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상돈, 전 중앙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