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년의 김동성과 서울신문 사장을 지낸 월탄 박종화
1920년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기자로 명성을 날린 김동성을 알았던 동시대 언론인들은 그는 언론인이지 기관장이나 정치인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입을 모았다. 만화 그리기를 좋아하고 나무를 깎아 무엇을 만들기를 좋아하는 품성으로 볼 때 그런 평가는 충분히 이해가 된다. 김동성은 합동통신 사장을 지냈다고 하지만 반년 동안 미국 순방을 하고 동경의 맥아더 사령부를 방문하고 귀국해서 실질적인 경영은 매일신보 편집주임을 지낸 소설가 남상일(南相一) 등 동업자가 했을 것이나 이들도 사업에 어두워서 재산상 손실을 보았다고 한다. 김동성은 1948년 8월 4일자로 초대 공보처장으로 임명됐으나 얼마 후 대통령 특사로 중남미 국가를 순방했고, 이어서 12월에는 파리에서 열린 3차 유엔총회에 참석했다. 그러니까 그는 1948년 하반기에는 공보처장 일을 하지 않았다.
3차 유엔 총회에서 한국 문제를 다룰 때 중남미 국가들은 한 국가도 빠지지 않고 우리나라를 지지했다. 당시 아시아와 아프리카는 독립국가가 몇 나라가 없어서 중남미 국가들이 유엔 총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중남미 국가들이 우리를 지지한 배경은 장면 박사가 미국 가톨릭 인맥을 동원해서 중남미의 가톨릭 국가들을 움직였을 뿐더러 김동성이 중남미를 순방하면서 지지를 부탁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3차 유엔 총회가 한국을 승인한 것은 대외적으로는 물론이고 국내적으로도 이승만 대통령의 큰 승리였다. 파리 회의가 끝나고 초대 주미 대사로 임명된 장면은 워싱턴으로 부임해서 대사관을 열어야 했다. 파리에서 쾌거를 이루고 귀국한 김동성이 공보처장으로 다루어야 했던 문제는 서울신문이었다.
1949년 5월 3일, 국무회의는 서울신문에 대한 무기 정간을 의결했다. 다음 날 김동성 공보처장은 서울신문에 대한 무기정간을 발표했다. 법적 근거는 한일합병 직전에 일본 통감부가 만들어서 해방 후에도 군정 하에서도 효력을 유지해 온 신문지법이었다. 말하자면 일제 강점기에 총독부가 툭하면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정간시켰던 법에 근거해서 정부가 소유하고 있는 서울신문을 무기 정간에 처한 것이다. 김 공보처장은 “서울신문은 귀속재산의 하나이나 운영을 현재의 사 간부에게 일임하였을 뿐”이며 이미 사회 각 방면으로부터 “서울신문이 반정부적이고 이적행위를 하는 신문이라는 비난사례가 허다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반국가적인 보도태도와 파괴음모적인 공산게릴라 같은 신문제작을 배격해야 한다고 언급하고, 구체적으로 “5월 1일부 도하의 각 신문은 한미방위동맹에 관한 대통령 각하의 담화를 전부 제1면 톱 기사로 상단에 취급하였으나 서울신문만은 1행도 취급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와 반대로 정간처분을 내리던 날에 인쇄된 4일부 신문은 ‘한미방위동맹에 관한 미측의 의사 희박’이라는 기사를 타지와는 달리 제1면 상단에 게재하였으니 이만하면 서울신문이 의도하는 바가 어떠하였다는 것은 더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현명한 국민 여러분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미방위동맹에 관한 이승만 대통령의 담화를 동아, 조선 등 다른 신문들은 1면 톱으로 다루었는데, 서울신문은 아예 다루지 않고 오히려 부정적인 날조 기사를 썼으니 서울신문은 반(反)국가적 신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직접적인 원인이었고 그 뿌리는 더 깊었다. 총독부 기관지이던 매일신보가 군정에 의해 서울신문으로 다시 창간되었으나 기자와 직원 중에 죄익성향이 많았으며, 특히 북으로 넘어간 홍명희의 아들이 편집국장을 함에 따라 논설주간이 반탁(反託) 사설을 써서 공무국에 내려보내면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사설로 둔갑되는 일이 종종 발생했던 것이다. 그래서 조병옥 뿐 아니라 월탄 박종화도 서울신문은 이대로는 안 된다는 등 ‘민족진영’에서는 서울신문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졌는데, 그게 결국 폭발한 것이다.
서울신문 무기 정간은 국회에서도 논란이 됐는데, 김동성 처장은 같은 논리를 반복하면서 자기는 이미 사표를 냈다고 밝혔다. 김동성이 공보처장을 사임했다고 하니까 국회에서도 더 이상 처장을 상대로 공세를 가할 수도 없었다. 김동성은 5월 23일 11명으로 구성된 견미(遣美)친선사절단의 일원으로 김포공항을 떠나서 3개월 간의 미국 순방에 나섰다. 이승만 대통령은 6월 초에 김 처장의 사표를 수리하고 후임으로 군정에서 공보부장을 지낸 이철원(李哲源, 1900~1979)을 임명했다. 이철원은 국회에서 “다시는 신문지법에 의해 신문을 정간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답변해서 서울신문 사태는 일단락을 지었다.
제2의 보빙사와 같은 ‘견미(遣美)친선사절단’ 구상은 이승만 대통령과 가까웠던 변영태(卞榮泰, 1892~1969, 나중에 외무장관과 국무총리를 지낸다)가 처음 발의해서 김동성, 고희동, 전용순의 동의를 얻어 그해 3월부터 추진해서 성사된 것이다. 따라서 서울신문 문제가 불거지기 전에 김동성은 또 다른 미국 방문을 구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동성은 미국 순방과 중남미 순방, 그리고 3차 유엔 총회에서 자기가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했던 것 같으며 이승만 대통령도 김동성이 할 일은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김동성은 3개월 간의 미국 순방을 마치고 귀국했으니 그의 필명 천리구(千里駒,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말) 다웠다.
그동안 이철원 공보처장은 서울신문 사장에 월탄 박종화(朴鍾和, 1901~1981)를 임명하고 편집국장과 논설 주간, 이사진도 모두 바꾸었고 서울신문은 49일 만에 다시 발행을 재개했다. 이렇게 해서 김동성은 서울신문을 정간시킨 공보처장으로 이름이 남았으나 그 보다는 이철원이 이승만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했다고 보는 게 맞다고 생각된다. 미국 체류 중부터 이승만과 가까운 이철원은 6.25가 발발하자 이 대통령을 수행해서(모시고) 피난을 간 4명 측근 중 최고위 인사였고 대전에서 이 대통령이 대국민 방송을 할 때 원고를 작성한 인물이기도 하다.
김동성은 잠시 쉬다가 1950년 5월 총선에 당시는 경기도이던 개성시에 무소속으로 출마해서 경쟁자가 없이 당선됐다. 그는 고향 개성에서 너무 유명한 인물이었다. 김동성은 6.25 전란을 무사하게 지냈으나 그의 고향과 선대에서 물려받은 토지는 북한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그는 2대 국회 후반기에 민의원 부의장을 지냈고 그 후에는 출마하지 않았다. 김동성은 4.19 후 민주당이 장악한 국회의 사무총장을 지냈다. 아마 장면 총리가 놀고 있는 그를 배려한 듯하다. 그러나 5.16이 일어남에 따라 장면도 김동성도 모두 ‘실업자’가 되고 말았다. 그 후 김동성은 책을 집필했고 1969년에 타계했으니,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삶이었다. 숙명여대 총장을 지낸 정치학자 김옥렬(金玉烈, 1930~2021)이 김동성의 딸이다.
이상돈, 전 중앙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