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12월 파리에서 열린 3차 유엔총회에 참석한 대한민국 대표단. 조병옥, 장면, 남궁염 등
1948년 12월 파리에서 열린 3차 유엔 총회에 참석한 우리 대표단을 설명하는 글과 사진을 열흘 전에 올린 바 있다. 우리 수석대표인 장면(張勉, 1899~1966))과 고문인 조병옥(趙炳玉, 1894~1960), 그리고 뒤에 배석한 남궁염(南宮炎 1888~1961)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하면서 김동성 공보처장은 언론인 출신이라고만 소개했다. 김동성(金東成, 1890~1969)은 이제는 거의 잊힌 인물이 됐거나 이승만 정권의 공보처장으로 서울신문을 무기 정간시킨 인물로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하지만 김동성은 우리 언론과 정치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기에 간단히 정리해 보고자 한다.
김동성은 1890년 개성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개성의 대단한 부호였으나 증조부 때 그곳에 유수(留守)로 부임한 탐관오리한테 재산을 많이 빼앗기고 부친은 그가 어릴 때 빨리 사망해서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했다. 개성에 미국인 선교사가 세운 한영서원(韓英書院)에서 영어를 배운 김동성은 조선 왕조에 실망하고 일본을 싫어했다. 한영서원을 세운 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김동성은 1909년 중국 수쩌우(蘇州)에 가서 영어를 더 공부하고 미국으로 건너가서 아칸소에 있는 작은 대학을 다니고 최종적으로 오하이오 주립대학에서 공부했다. 김동성은 그때 신문학을 공부했고 당시 미국에서 성행하기 시작한 만화에 깊은 흥미를 느끼고 좋아했다. 그는 그림 그리기와 목공(木工) 일을 좋아한 우아한 교양인이었다. 김동성은 미국 유학 시절에 이승만 박사를 만난 적이 있어서 해방 후에 이승만 대통령과 인연을 맺게 된다.
1919년에 귀국한 김동성은 당시로선 영어를 아주 잘하는 조선인이었다. 1920년에 동아일보가 창간되자 김동성은 동아일보 기자가 됐다. 동아일보 창간 당시 주간(主幹)은 장덕수, 편집국장은 이상협, 정치부장은 진병문, 사회부는 김형원, 유광열, 이서구, 문학기자는 염상섭, 미술기자는 고희동 등 그 후 한 시대를 주름잡는 인물들이 자리를 잡았다. 김동성은 조사부를 맡았는데, 신문학을 공부한 그는 조사부의 중요성을 알았을 것이다. 김동성은 삽화와 만화도 그렸는데, 사회 현상을 풍자한 그의 만화는 인기가 좋았다. 그 때부터 그는 천리구(千里駒,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말)라는 독특한 호(號)를 필명으로 사용했고 그림에는 ‘千里駒’라는 낙관(落款)을 찍어 넣었다.
창간 초기에 동아일보는 김동성을 베이징으로 파견해서 그곳을 방문 중인 미국 상원의원 일행을 취재해서 보도했다. 김동성은 이들이 경성(서울)을 방문하도록 했다. (1차 대전 때 미국과 영국 편으로 참전한 일본은 1920년대까지는 미국의 우방국이었다.) 김동성의 취재력과 영어 실력을 신뢰한 동아일보는 1921년 10월 하와이에서 열린 세계만국기자회의에 그를 파견했고, 동아일보는 이 회의에 참석한 유일한 조선인 기자를 지면을 통해 널리 홍보했다. 김동성은 하와이에서 워싱턴 DC로 가서 워싱턴 군축회의를 몰래 취재했다. 공식참가는 불가능했으나 그런 회의에 동아의 기자가 갔다는 자체가 대단한 사건이었다. 갑자기 스타가 된 김동성은 송진우 사장, 장덕수 주간과 함께 전국을 순회하면서 동아일보 부수 늘리기 운동을 벌였다. 그러면서도 김동성은 <신문학>이라는 책을 펴냈고 최남선이 펴내는 잡지 <동명>에 삽화와 만화를 그렸다. 하지만 김동성의 동아 시절은 갑자기 끝나고 말았다. 1924년 10월, 송진우 사장이 친일파 박춘금의 꼬임에 빠져서 사실도 아닌 각서를 몰래 써준 것이 들어나서 기자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결국 김동성은 편집국장이던 이상협 등과 함께 월남 이상재(李商在, 1850~1927)를 사장으로 영입한 조선일보로 옮겨갔다.
조선일보에서 김동성은 4단 만화 ‘멍텅구리’를 연재해서 장안의 지가(紙價)를 올렸다. 고희동의 후임으로 동아에서 미술 기자를 하던 노수현(盧壽鉉)도 조선으로 옮겨가서 김동성이 기안하고 노수현이 그린 ‘멍텅구리’는 그 후 한국 언론에 4단 만화가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다. 1925년 들어서 김동성은 조선일보의 편집 겸 발행인으로 언론인으로서는 전성기를 구가했다. 하지만 조선일보가 일본-러시아 관계를 다룬 기사가 문제가 되어 조선일보는 정간을 당하고 김동성은 징역 2월에 집행유예 선고를 받고 조선일보를 그만두었다. 몇 년을 쉰 후에 김동성은 중앙일보 편집국장을 지냈으나 일본이 중국을 침략함에 따라 언론 환경은 급속하게 나빠졌고 김동성은 퇴사하고 1945년 해방까지 칩거에 들어갔다. 미국을 잘 아는 그는 일본은 결코 미국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으며,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집에서 책을 읽고 <한영사전>을 집필하면서 암울한 일제 말기를 보냈다.
8.15 해방이 되어 미 군정이 시작되고 이승만 박사가 귀국함에 따라 친일에서 자유롭고 영어에 능통한 언론인 출신인 김동성은 새로운 기회를 맞게 됐다. 미 군정 당국은 미국에서 공부하고 오래 체류하면서 이승만과 잘 아는 이철원(李哲源 1900~1979)을 공보부장으로 임명했다. 군정은 남한에 민간 통신사가 있어야 AP, UPI 같은 서방 통신사와 제휴할 수 있음을 알고 김동성에게 통신사를 맡아달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김동성과 몇몇 언론인은 합동통신을 세우고 김동성이 사장이 됐다. 하지만 신문사들의 운영이 어려운 데다 군정이 통신사 운영에 제대로 지원을 하지 못해서 경영이 어려웠다. 1946년 가을부터 반년 동안 김동성은 미국을 방문해서 한국 문제를 미국 조야(朝野)에 알리고 귀국 길에 맥아더 사령부를 방문했다. 아마도 이승만이 부탁해서 군정 당국이 주선하고 경비를 댄 것으로 추정된다.
1948년 정부 수립과 더불어 이승만 대통령은 김동성을 공보처장에 임명했다. 공보처 차장에는 김동성과 함께 동아일보 기자를 하고 해방 후 조선일보가 복간한 후 첫 편집국장을 지낸 김형원(金炯元, 1900~6.25 납북)이 임명됐다. 그의 필명인 ‘천리구’에 걸맞게 김동성은 공보처 일보다는 외국 순방이 더 많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김동성을 중남미에 특사로 보내서 대한민국에 대한 지지를 부탁하도록 했다. 1948년 12월에는 파리에서 열린 3차 유엔총회 대표단의 일원으로 수석 대표인 장면, 고문인 조병옥을 보좌했다. 회의장에서 장면 및 조병옥과 이야기하는 유명한 사진 몇 장은 김동성이 장면과 조병옥을 보좌한 최고의 브레인이었음을 보여준다. 키가 훌쩍 크고 옷도 잘 입고 영어가 능통한 그는 국제사회에서 새로 태어난 대한민국을 상징했을 법도 하다. 그런 그가 본국에서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으니 바로 ‘서울신문 문제’였다. (계속)
이상돈, 전 중앙대학교 교수